하얀사과가 온다
‘언뜻 보면 복숭아, 다시 보니 배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빨갛게 익어야만 하는 표면은 하얬다. 원래는 둥그렇게 탐스러워야 할 껍질에는 불쑥 튀어나온 부분들이 많았다. 꼭지 부분이 노랗게 익어버린 경우도 더러 있었다. 사과가 폭염에 타고, 서리에 얼고, 빗물에 젖은 흔적들이다.
사과가 죽어간다. 갈수록 뜨거워지는 한반도에서. 더위와 함께 잦아진 이상기후 현상은 사과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앞으로 80여년 뒤 한반도에서 사과를 볼 수 없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온난화로 인한 잦은 열대야
착색·생산량·당도 떨어져…
특히 올해 날씨는 사과에게 더 가혹했다. 3~5월에는 서리로 인한 ‘냉해’피해, 6~8월에는 역대급 긴 장마와 열대야, 9~10월에는 때아닌 태풍이 과수원을 강타했다.
참혹했던 올해의 기후변화에 실태를 확인하기 위해 헤럴드경제는 지난 10월 대구광역시와 경북 영주·영덕, 충북 제천·충주 등지를 찾았다. 때는 사과의 마지막 수확철. 사과가 가장 탐스럽게 익어야 하는 시점임에도, 농민들의 얼굴엔 그늘이 져 있었다.
“작년을 100으로 봤을 때 올해는 70정도?”
대구 평광동에 위치한 우 대표의 과수원. 우 대표에게 올해 사과에 대해 묻자, 그는 이내 움켜쥔 손을 펼쳐 시든 잎들을 보여준다. “사과나무 잎을 보면 올해 작황을 알 수 있어요. 잎이 시든 나무의 과실은 품질이 나빠요.”
시든 잎은 광합성 능력이 떨어진다. 잎이 시든 나무에서 자란 사과는 하얗게 보일 정도로 착색이 나빠진다. 하얀 사과는 맛도 떨어진다. 광합성 물질이 사과에 축적이 못되니 당도도 자연스레 떨어지는 것이다. 올해는 최상품 사과인 특 비중이 10~20%가량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원래는 특 비중이 전체 물량의 30% 수준인데, 올해는 24~27%에 그칠 것이란 전망이다.
“밤에 날씨가 더우면, 낮에 광합성으로 축적한 에너지가 나무의 호흡에 쓰입니다. 결국 사과착색이 나빠지는 결과로 이어지죠.” (권헌중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사과연구소 연구관)
농촌진흥청은 최근 논문에서 ‘지구 온난화로 인해 열대야 발생 빈도가 증가하고 있으며, 야간 저온의 감소에 의한 사과의 착색 불량이 예상된다’고 봤다.
“강원도에서는 정선·평창·인제·양구, 경기도 쪽으로는 파주·포천…”
경북 영주의 한 과수원. 권헌중 연구관이 ‘신(新) 사과산지’라며 이름을 나열한 도시들은 과수원보다는 군부대나 스키장이 어울릴법한 도시들이었다.
생존을 위한 선택이다. 사과 생산량은 1990년대 전국적으로 60~70만 톤 수준이었지만, 그래프상에서 점차 우하향하는 모습을 보인다. 올해 사과 생산량은 2016년 생산치에서 약 21% 못 미치는 올해는 45만톤 수준일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 농업인들이 착색이 잘되고, 농사가 잘 되는 지역으로 찾아가 과수원을 개원하고 있습니다. 평지보다 2~3도가 낮은 각 지역의 산간지역이죠.” 말을 마친 권 연구관은 과수원 옆 야산을 손으로 가리켰다. 가리킨 야산에는 사과나무가 듬성이 자라고 있다.
농장, 온도 낮은 산간으로 이동
대구 생산 줄고 강원 크게 늘어
이는 지역별 생산량 변화로도 감지된다. 대구의 사과생산량은 지난해 378톤에 불과했다. 과거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 생산량의 80% 이상을 차지했던 명성을 잃어가는 중이다.
반면에 강원도 사과생산량은 지난 2014년 이후로 크게 증가하는 모습이다. 당시 2225 톤에 지나지 않았던 생산량이 2019년에는 1만486 톤까지 치고 올랐다.
오는 2100년이면 한반도에서는 사과를 찾아볼 수 없을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유엔 국제기후변화위원회(IPCC) 지구온난화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사과는 오는 2100년에는 백두대간 일부지역에서만 자라는 작물이 된다. 충북 제천. 18년간 사과농사를 했다는 조영수(59) 씨는 냉해 피해를 입은 비정형과를 신중하게 하나하나 솎아냈다. 그가 비정형과 하나를 꺼내 들어 보인다. “우리 말로는 딱과라고 그래요. 날씨가 추우면 꽃이 수정이 잘 안되고, 한쪽만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면 모양이 비뚫어 지는 거지. 봄에는 우박, 우박이 온 다음에 꽃이 필 때 냉해가 왔고. 또 그 그다음엔 또 긴 장마가 와가지고. 이렇게 기상이변이 많이 온 해도 드물다니까.”
80년 뒤 백두대간 외 생산못해
한반도 사과 볼 수 없을지도…
올해는 다른 해와 비교했을 때 유달리 장마철이 길고 강수량도 많다. 올해 장마철에만 중부지방에는 평균 851.7mm(강우일수 34.7일), 남부지방에는 평균 566.5mm(23.7일)의 비가 쏟아졌다. 지난 10년간 평균치인 중부지방 366.4mm(17.2일), 남부지방 348.6mm(17.1일)를 크게 웃도는 수치다.
가을철엔 태풍이 찾아왔다. 10월에만 7개의 태풍이 발생했는데, 이처럼 10월에 태풍이 잦았던 것은 지난 십수년간 처음있는 일이었다.
이에 권헌중 연구관은 내년도 피해를 우려했다. “사과는 한번 기상이 좋지 않으면, 내년 내 후년도에도 영향을 주게 됩니다. 올해 사과작황이 나빴습니다. 그리고 내년도에도 과실은 썩 좋지 않은 상태를 보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유사이래, 사과는 대한민국에서는 국민 과일이었고, 전지구적으로 봤을 때도 ‘보편적인 작물’이었다.
문학과 예술작품에서도 사과는 자주 등장해왔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동화 백설공주에는 ‘탐스렇게 잘 익은’ 사과가 나온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서 주인공 미자가 시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은 ‘빨갛게 익은’ 사과를 매개로 그려진다. 만약 탐스런 빨간 사과가 사라지고 하얀 사과의 세상이 온다면? 먼훗날 백설공주나 이창동의 ‘시’를 보게 될 미래세대들은 작품의 메시지를 어떻게 이해할까? 김성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