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대한민국에 “내 편 들어줘” 투정
-김정은 “오지랖 중재자 말고 당사자 돼야”
-미국 “한국, 미국 편에서 비핵화 마무리해야”
-북미 모두 속뜻은 ‘중재자 역할 더 잘해줘’
[헤럴드경제=김수한 기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측에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민족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 그 의도와 배경에 대한 해석이 무성하다.
이를 놓고 정부의 중재자 역할에 빨간 불이 켜졌다는 분석이 나오는가 하면, 극우보수층을 중심으로 북한이 남한에 미국과 북한 중 북한 편을 들라고 요구했다는 해석까지 나온다. 그러나 과연 그런지는 의문이다.
13일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전날 열린 최고인민회의 2일차 회의 시정연설에서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정신을 가지고 제가 할 소리는 당당히 하면서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외세의존 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모든 것을 북남관계 개선에 복종시켜야 한다”면서 “진실로 북남관계 개선과 평화와 통일의 길로 나아갈 의향이라면 우리의 입장과 의지에 공감하고 보조를 맞추어야 하며 말로서가 아니라 실천적 행동으로 그 진심을 보여주는 용단을 내려야 한다”고 주문했다.
북한이 ‘외세 배격’과 ‘민족 공조’를 강조한 것은 새롭지 않지만, 김 위원장이 ‘오지랖’ 등 노골적인 표현을 동원해 직접 이를 주문한 것은 이례적이다.
이 와중에 미국은 한국에 ‘중재자’ 역할에 치중하기보다 확실하게 미국 편을 들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이뤄내자고 촉구하고 있다.
◆북한과 미국, 모두 한국에 “내 편 들어줘”=이렇게 한국은 북한과 미국 사이에 낀 처지다. 북한과 미국이 모두 한국에게 좀 더 자기 편을 들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양상 자체가 한국의 중재자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반증한다.
비핵화를 놓고 북미간 첨예한 갈등이 전개되는 가운데 그 중간에서 대화가 단절되지 않도록 한국이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기에 양측에서 아쉬움 담은 볼멘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또한 북미간 갈등 속에 북한과 미국이 모두 한국에 ‘내 편을 들어달라’고 요구한 사실 자체 역시 한국이 얼마나 중재자 역할을 잘 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한국이 중재자로서 북미 사이에서 양측 모두와 대화의 동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현상이다.
예를 들어, 수십년간 싸워 온 A와 B를 화해시키려는 C가 있을 때, C가 A와 B 모두와 대화가 통하는 존재가 아니라면 A와 B는 C에게 기대를 걸지도 않는다. 갈등을 빚는 A와 B 모두가 C에게 ‘내 편을 들어달라’고 호소한다는 것은 그만큼 C와 A, B의 관계가 원만하다는 의미다.
A와 B가 C에 ‘내 편을 들어달라’며 투정을 부린 것은 C가 잘못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C가 잘 하고 있다는 의미에 가깝다.
미국과 북한의 ‘투정’에 한국이 당황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어차피 이 상황에 A, B 사이에서 C가 중재자 외의 역할을 맡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양쪽 투정을 더 잘 들어줄 뿐이다.
일각에서 한국이 이 국면을 맞아 중재 역할을 하기 어려운 국면이 조성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마침 한국이 한미정상회담 직후 본격적 중재 행보에 나선 시점에 나왔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북미 모두 한국 역할을 인정한 것..중재역할 더 충실해야=그러나 이런 해석은 탁상공론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일단 지금 국면에서 C가 다른 역할을 맡는다 해도 허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북미간 비핵화 협상이 타결될 시점까지는 한국이 중재자 외의 역할에 현실적으로 나서기 어렵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문재인 대통령에게 북미간 중재자 역할을 간곡하게 부탁했다.
문 대통령이 한미정상회담에서 “조만간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또는 남북접촉을 통해 한국이 파악하는 북한의 입장을 가능한 한 조속히 알려달라”라고 요청했다.
한국이 북미간 중재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달라는 요청에 다름 아니다.
북한 역시 중재자 역할을 하는 한국에 ‘북한 편을 들어달라’라고 요청했을지언정 남북관계의 파탄을 예고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북한은 남북관계 합의사항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답답해 하고 있다. ‘앞으로 남북이 더 잘 지내자’는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은 남조선 당국에 ‘속도 조절’을 노골적으로 강박하고 있으며 북남합의 이행을 저들의 대조선제재압박정책에 복종시키려고 각방으로 책동하고 있다”며 남북 합의이행에 더 속도를 내야 한다는 의사를 강하게 표명했다.
즉, 북한과 미국 모두 한국의 중재자 역할에 불만을 표시한 게 아니다. 오히려 중재자 역할을 더 잘 해 달라고 주문한 것으로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