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워도 집에 있으면 뭐해. 집이 더 춥고 갑갑해.”
김낙관(80) 할아버지가 막걸리를 들이키며 말했다. 안주는 달걀 프라이. 그는 경기도 양주에서 지하철을 타고 매일같이 서울 종로 3가 낙원동 골목을 찾는다. 청국장을 3000원, 막걸리를 2000원에 먹을 수 있는 곳이다. 아는 동생들과 술 한잔 할거라는 김 씨는 멋스럽게 꾸미고 나온 모습이었다. 남색 카디건에 색을 맞춰 머플러를 맸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스냅 백 모자까지 썼다. 그는 “마음 외로울 때는 바깥에서 친구들 만나는 게 최고”라고 말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김기호(77) 할아버지도 거들었다. “여기 오면 시골 장터 같아. 마음이 따뜻해. 다른데 가면 늙은이 부담스러워 하잖아.”
낮 기온 영하 10도 살을 에는 한파가 몰아치던 24일 낙원동에는 소일거리를 찾아 나온 어르신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골목에 자리 잡은 청국장 집에는 식사를 하러 나온 어르신들로 테이블 8개가 모두 꽉 찼다.
오래된 단골이라는 한 할머니는 새벽에 폐지줍는 일을 마치고 배를 채울 겸 식당을 찾았다. 그는 “추운 날엔 뜨뜻한 국물을 먹어야 한다”며 “여기는 값이 싸 실컷 먹을 수 있어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많이 온다”고 했다. 그는 10분만에 우거지국 한 그릇을 싹 비워냈다. 밑반찬으로 나온 배추김치, 무생채무침도 깨끗이 비운 그는 애교 섞인 말투로 “여기 밥 한 숟갈만 더 줘요. 국물도 조금 더 주시던가요”라고 외쳤다. 금세 빈 뚝배기에 한 그릇에 가까운 밥 한 숟가락과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국물이 채워졌다. 테이블 여기저기에서 밥, 김치 더 달라는 요청이 끊이질 않았다. 식당 아주머니는 밥통에서 밥그릇에 현미밥을 꾹꾹 눌러 담으면서 “여기는 배부를 때까지 줘요”라고 말했다.
형편이 어려운 어르신에게 저렴한 가격에 푸근한 인심까지 맛볼 수 있는 낙원동은 좋은 쉼터였다. 이곳 별미라는 청국장을 먹고 있던 김성우(68) 씨는 “요즘 계속 한파가 몰아쳐서 밖에 나오기도 싫고 혼자 있다 보니 식욕도 없어지고 건강도 나빠지는 것 같아서 일부러 나왔다”며 “밖은 추워도 여기는 훈훈한 인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후식은 200원짜리 자판기 커피다. 카페조차 없는 이곳에선 식당 한 켠에 자리한 작은 커피 자판기가 이를 대신한다. 날 좋은 날엔 자판기 주변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몇 시간이고 수다를 떨지만 이날은 커피를 든 어르신들이 다시 식당으로 모여들었다.
달달한 후식까지 마치고 어르신들이 가는 다음 코스는 신나는 ‘노래 공연장’이었다. 무명가수들이 무료로 공연을 하는 이곳에는 노래를 듣기 위해 찾은 어르신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100명이 훌쩍 넘는 어르신들이 흥겨운 노래에 맞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 실내 놀 거리가 많지 않은 어르신들에게 제격이었다. 인천에서 왔다는 김모(72) 씨는 “일주일에 한번은 꼭 들린다. 무료로 공연도 보고 친구들도 만날 수 있으니 여기만한 곳이 없다”고 만족해했다.
바깥에선 장기판도 벌어졌다. 탑골공원 근처 과일가게 앞에서 이모(75) 씨는 추운 날씨에 벌겋게 언 손으로 친구와 장기를 뒀다. 진지한 표정으로 장기를 두던 그는 바람이 불자 몸을 잔뜩 웅크리고 발을 동동 굴렸다. 그는 “노인들이 갈 데도 없고 집에 있기 따분해서 나왔다. 집에 있으면 마음이 춥다”고 했다. 몇 분이 지나자 구경꾼 5~6명이 모여들었다. 가만히 서있기도 어려운 날씨인데도 이들은 장기판에서 한참을 눈을 못 뗐다. 이를 구경하던 김모(60) 씨는 “대부분 혼자 사는 독거노인들”이라며 “혼자 있으면 너무 무료하고 외로워서 나왔다”이라고 말했다. 추우니 실내 공연장이라도 가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묻자 그는 “공짜도 한 두 번이지 자주 가면 술도 시켜야 할 것 같고 눈치가 보여서 못 간다. 없는 사람은 조용히 짱 박혀 있어야 한다”고 손사래를 쳤다.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사람들을 지켜보던 한 할아버지는 “이 추운 날 밖에 왜 나왔겠소. 방 구석이 더 추우니까 나왔겠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세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