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20대 종합광고대행사 최초의 단독 여성CEO의 삶 -“스펙보다 능력이 인정받는 곳, 제가 꿈꾸는 기업문화” -아이 낳고 늦게 시작했지만 CEO로…업계서 단박 주목 -“소통ㆍ자유로움 있으면 대기업에 인재뺏기는 일 없죠”
[헤럴드경제=구민정 기자] 악바리, 억척, 철녀(鐵女)…. 한국 사회에서 여성 최고경영자(CEO)에 대한 이미지는 대개이럴 것이다. 결혼 또는 육아를 포기하고, 남성 위주 간부들 사이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아 끝내 CEO 자리를 거머쥐는 모습. 광고업계 같이 치열하게 능력으로 승부하는 곳, 뒷말이 무성한 곳 역시 이같은 인식이 팽배할 것이다. CEO직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한 삶, 그렇게 남들이 수군거릴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조유미 퍼블리시스원 대표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포기한 것이 없다. 가족을 제1순위로 여기며, 자신의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한다. 대신 그는 ‘수평적 리더십’을 강조한다. 조직에선 의사소통이 최고이며, 문화적으로 자유로운 조직이 강한 조직이라는 신념을 수평적 리더십으로 설파하고 있다. 그의 수평적 리더십은 대기업으로의 인재 유출이 잦은 광고업계에서 직원 이탈을 막는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되기도 한다.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여성 리더십이 아닌, 소통에 강하고 이해심이 깊은 배려 리더십을 강조하는 조 대표. 그가 국내 20대 종합광고대행사 최초의 단독 여성CEO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내공이 보통이 아님이 짐작된다. 그는 지난 3월 홍콩서 열린 ‘2017 Women Leading Change Award(변화를 이끄는 여성 어워드)’에서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수상해 주목받은 바 있다. 하지만 외부의 시선을 의식, 수상에 큰 의미를 두기보다는 광고전문가답게 ‘창의적(creativity) 리더’로 인정받기 위해 고민하는 중이다.
▶출산 후 늦게 시작한 직장생활…꽃은 피었다=조 대표는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항상 남들보다 한 발짝 늦은 편이었다. 92학번인 그는 대학 졸업 후 성균관대 언론정보대학원을 다니던 중 광고대행사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입사는 쉽게 성사되지 않았다. 결혼과 출산 후 모유수유를 하고 있던 2000년 2월, 면접을 본 국내 한 광고대행사에서 “내일부터 나오라”고 해 일을 시작했지만 그곳은 많은 동료들이 매일 퇴사하는 불안한 직장이었다.
조 대표 역시 퇴사를 고민하던 찰나 외국계 광고대행사에 임시로 들어가게 됐고 일을 맡긴 광고주들에게 실력으로 인정받아 본격적인 광고대행사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외국계 회사였지만, 당시 조 대표는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
“만약 한국 대기업이었으면 영어 못하는 저는 그냥 입사도 못했을 거에요. 하지만 이 곳에선 필드에서 쌓은 경험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어디 대학 나왔냐, 아버지 뭐하시냐는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영어도 결국 같은 팀 원어민에게 시급 3만원을 주고 뒤늦게 배웠지만 아무 문제 없었습니다.”
외국계 회사에 근무했기 때문에 수평적인 문화의 소중함을 알기 어려웠다. 하지만 대기업에서 근무하던 직원들을 만나면서 경직되고 수직적인 한국기업 특유의 조직문화에 대해 간접적으로 알게됐다. 본인이 겪지 않았다고 해서 상관없는 문제가 아니었다. CEO가 된 이후 더 큰 책임감을 느꼈고, 대표로서 일선에서 뒤로 물러나지 않고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실전에 적극 뛰어들었다.
▶수평적 리더십은 시스템이다=스펙에 목매지 않는 문화 덕분에 소위 ‘클 수 있었던’ 조 대표는 직원들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단기간에 바꾸긴 쉽지 않았다. 실제로 조 대표가 스펙은 부족했지만 경력사항이 좋았던 직원들을 채용한 적이 있었는데, 그중 일부는 자격지심 때문에 스스로가 회사를 그만뒀다.
“리더 개인이 생각을 바꾸고 오픈마인드가 되더라도 한 개인이 갖고 있는 모든 장벽이 한순간에 무너지진 않더라고요. 리더 개인의 의지보다 중요한 건 시스템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새로운 시스템으로 조직 내 변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퍼블리시스원엔 총 350명 가량의 직원이 근무하는데 직원 수가 많아질수록 구성원 관리가 힘들었다. 특히 경직된 조직문화에 익숙한 경력 직원들이 올 경우 ‘문화적 자유로움’의 사각지대가 발생했다. 퍼블리시스원은 이후 직급과 연차에 따른 호칭을 없애고 대신 하는 업무와 역할에 따른 호칭을 부과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또 전 직원이 무기명으로 회사 전체를 상대로 평가하는 제도도 도입했다. 평가가 무기명으로 진행되다 보니 가슴 아픈 말들도 많다. 하지만 조 대표는 평가 결과를 전직원 앞에서 공개하고 앞으로 어떻게 개선해 나갈 지 발표한다.
“그런 시스템이 받쳐주기 때문에 직원들이 퍼블리시스원을 다른 직장보다 수평적인 곳이라고 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가끔 강압적으로 끌고 가야할 때도 있고, 무조건 해야 한다고 직원들에게 얘기해야 할 때가 있지만 그런 상황에선 쉽지 않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수평의 철학을 되새기면서 앞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퍼블리시스원을 직원의 의견을 진정으로 들으려고 하는 ‘사람 중심의 회사’라고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 중심의 조직 문화는 인재를 영입하는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한다. 수평적인 문화를 비롯해 물질적인 복지도 직원들에게 최고 수준으로 제공한다. 실제로 퍼블리시스원 코리아가 위치한 시그니처타워 건물 9층엔 전문 시각장애인 안마사가 근무하는 안마실과 수면실, 그리고 숙면용 쇼파와 임직원 가족이 운영하는 카페 등이 있다. 이곳에서 직원들은 근무시간에 언제든지 잠을 청할 수도, 안마를 받을 수도, 간식을 먹으며 쉴 수 있다. 직장인이라면 한번쯤 꿈꾸는 ‘드림 오피스’다.
“광고대행사 중 국내 대기업 계열사와 똑같은 기준에서 경쟁하긴 어렵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광고업계의 똑똑한 사람들을 대기업이 아닌 우리 회사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대기업엔 부족한 수평적인 문화와 충분히 회사서 놀고 쉬면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인재를 대기업에 뺏기지 않고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는 차원에서 휴식 공간을 마련하고, 복지 제도를 도입했는데 점점 그게 문화로 자리 잡아가는 것 같습니다.”
▶같이 성장해야 진짜 리더=조 대표는 ‘우리’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 “나도 너도 포기한다면 ‘우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대신 나도 너도 함께 인정하면서 일을 해야 조직이 발전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공동체적 의식을 많이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여성 리더십에도 공동체 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최근 프랑스 칸에서 개최된 마케팅 박람회에서도 인공지능(AI), 딥러닝 등 4차 산업혁명이 화두였지만 ‘양성평등’ 역시 여전히 창조적 마케팅을 논하는 데 있어 핵심 과제로 언급됐다. 그만큼 아직 해결이 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기술적으로 인류사회는 진보했지만 여전히 사회 곳곳엔 성별, 인종, 종교 등에 따른 공정한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고위직 리더일수록 성 평등성 이슈가 유행이 지난 옛 구호가 아닌 지금도 유효한 화두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적극 지원해야 하는 이유다. 조 대표가 특히 이번 칸 박람회에서 인상적으로 느낀 점은 유럽은 양성평등에서 나아가 동성애 문제까지 주요하게 다룬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선 동성애 얘기를 꺼내는 게 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젠더 이슈에 있어 누구든 사랑, 정체성에 의해 차별 당하지 않도록 공동체에서 나서서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든 사랑할 권리는 침해받지 않아야 합니다.”
조 대표에게도 사랑하는 사람, 가족은 언제나 제1순위다. 그의 남편과 자녀는 현재 독일에서 거주중이다. 조 대표 역시 일찌감치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일할 계획이었는데, CEO 기회가 생겨 홀로 한국에 남게 됐다. 그래서 그는 가족의 소중함을 더욱 절실히 느끼고 있다. 조 대표에게 가족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생활의 가장 기본적 바탕이 되는 뿌리다. 당연히 그에겐 가정이 직장보다 우선이다.
일과 가정 사이에서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조 대표가 향후 그리는 리더십은 어떤 모습일까.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리더는 개인적인 성장과 더불어 ‘함께 성장’하는 것을 중시해야 한다. 타인을 밟고 올라서야 성공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닌 각자가 가진 개성을 유지하면서 조직을 유지하는 것이다.
“시카고의 한 광고대행사엔 60세가 넘은 카피라이터가 있습니다. 그의 직급은 가장 높지 않을지라도 카피 부문에 있어선 단연코 최고로 존경받는 자리에 있습니다. 서로의 능력에 대해 존중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