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스터디그룹’부터 ‘애나엑스’까지

석 달간 영화·드라마 3편, 연극 1편 다작

“그래도 커지는 연기 갈증…연극 무대 찾아”

배우 한지은 [(주) 글림아티스트, (주)글림컴퍼니 제공]
배우 한지은 [(주) 글림아티스트, (주)글림컴퍼니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늘 ‘온에어’ 상태였다. 경주마처럼 달리던 날들이 많았다. 때론 ‘겹치기’도 감수했다. 최근 석 달간 무려 세 편(tvN ‘별들에게 물어봐’, 티빙 ‘스터디그룹’, 영화 ‘히트맨2’). 드라마나 영화의 제작 환경 특성상 배우에게 주어지는 시간도 짧은데, 소위 ‘다작 배우’로 지내다 보니 출연작의 숫자만큼 연기 갈증이 커졌다. 그 무렵 ‘정체기’도 찾아왔다.

“매체 연기를 오랫동안 해오며 어느 순간 제 안에선 만족이 안되더라고요. 매번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지만, 익숙한 틀 안에서 익숙한 방식으로 연기하며 내 안에 나도 모르게 잡힌 틀이 있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한지은(38)은 2006년 단편영화 ‘동방불패’로 데뷔, 어느덧 20년차에 접어들었다. 그는 “연기는 늘 답이 없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하는 직업인데 자칫 한계를 만날까 싶어 덜컥 겁이 났다”고 했다. 연극을 선택한 것은 “더 오래, 더 멀리, 그리고 깊이 가기 위한 관문”이라고 생각해서다.

드라마 ‘스터디그룹’의 글로벌 인기로 해외팬이 부쩍 늘자, 그의 연극 무대엔 외국인 관객도 적지 않게 찾았다. 그는 최근 막을 내린 연극 ‘애나 엑스’에서 ‘800억대 상속녀’라고 자신을 포장한 ‘뉴욕 사교계의 사기꾼’ 애나 소로킨 역할을 연기했다.

한 달 반의 무대를 마친 그는 “연기 자체를 처음한다는 신인의 마음으로 오른 무대였다”고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한 편의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배우에게 주어지는 공식적 시간은 두 세달. 대본을 어느 시점에 받느냐에 따라 준비 기간은 더 길어지나, 대부분의 공연 무대가 두 달 전 대본 리딩을 시작해 작품과 체화하는 시간을 갖는다. 촉박한 스케줄로 카메라 앞에 서야 했던 한지은에게 연극의 제작과정은 하나의 인물을 만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줬다.

배우 한지은 [(주) 글림아티스트, (주)글림컴퍼니 제공]
배우 한지은 [(주) 글림아티스트, (주)글림컴퍼니 제공]

그는 “캐릭터를 만날 때 늘 최선을 다했지만, 내가 정말 완벽하게 모든 것을 쏟아냈는지 스스로 만족이 안 되는 지점들이 있었다”며 “한 인물을 더 깊이있게 가져가고 싶은데 이 친구를 이해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던 갈증이 무대에선 해소된 부분이 있다”고 했다.

무수히 많은 자료를 찾고, 애나 소로킨이 돼 그의 날들을 상상하며 한 인물을 분석했다. 애나 소로킨은 한지은을 만나 속살까지 내보이며 한 꺼풀 한 꺼풀 깊은 내면을 드러낸다. 한지은은 애나에 대해 “평범의 범주에서 벗어난 심리를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하면서도, 그에게 공감한 지점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정성껏 꾸며낸 사진 몇 장으로 가짜의 삶을 전시하는 시대에 등장한 애나라는 인물의 삶이 모든 것이 노출된 환경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배우의 삶과 다르지 않다고 본 것이다.

”누구나 관심받고 싶고, 잘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생각해요.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이 나의 사회적 위치를 증명해 줄 수도 있고요.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제 마음 같지 않은 순간들이 많잖아요. 이상과 현실의 갭에서 오는 허망함, 세상에 대한 분노와 열등감, 온갖 염세적 감정이 쌓여 ‘애나’라는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어요.“

끊임없이 대본을 곱씹고, 대본 안에 담기지 않은 ‘서브 텍스트’를 상상하며 자신만의 애나를 만들고, 애나를 통해 보여줘야 할 연극의 메시지를 한 겹 한 겹 덧대 무대에서 풀어냈다. 그는 “애나가 느끼고 말하는 모든 순간을 믿고 연기했다”고 했다. 시종 당당한 애나의 이야기를 홀린듯 듣다보면 혼란의 한복판으로 관객은 떠밀려간다. “진실이 뭘까, 존재하긴 할까”라는 애나의 대사와 함께다.

“애나 소로킨이라는 사람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삶에 있어 ‘진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인생을 생각하며 통찰을 얻는 것. 그게 제 몫이라 생각했어요.”

애나를 만나며 그는 자신의 인생도 돌아보게 됐다. 낱낱이 분해해 그의 이야기에 다가서니 자연스레 자신의 삶도 거울처럼 비춰본 것이다. 그는 “애나와는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닮아 공감은 쉬웠지만, 세상을 대면하는 방식은 달라 인정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었다”고 돌아본다.

‘스터디그룹’ 한지은 [티빙 제공]
‘스터디그룹’ 한지은 [티빙 제공]

어릴 적부터 스스로를 ‘야망가’라 부를 만큼 “욕심도, 열정도, 야망도 큰 아이”였던 그에게 거대한 ‘현실의 벽’은 염세주의적인 시선을 키우도록 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지은이 달려갈 수 있게 한 동력이자 승부욕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굳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상을 대하는 자세는 정의롭고 싶어 한다”는 자기 진단을 내놓는다. ‘스터디그룹’에서 연기한 학교의 변화를 꿈꾸는 열혈 선생과 다르지 않다.

“가급적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 하고, 설사 손해나 피해를 보더라도 ‘좋은게 좋은 거지’라고 생각하게 돼요. 제 마음 안에서 불편한 지점들이 생기면 도리어 그걸로 인해 너무 힘들더라고요. 요즘엔 과연 정의로운 것이 현명한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어 다른 지점을 찾아가는 때이기도 해요.”

배우의 길을 걸어온 지난 20년이 매순간 충만했던 것은 아니다. 도망치고 싶은 날도 있었고, 그래서 도망친 때도 있었다. 그는 “연기가 정말 재밌고 좋아서 시작했는데 출발부터 주연으로 다수의 작품을 하던 것이 도리어 독이었던 것 같다”고 돌아본다.

“스타가 됐던 것도 아닌데 당시의 좋은 기회들이 나의 노력과는 별개로 주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능력치가 거기까지 닿지 않고, 아직 그런 연기를 해낼 만큼 깊이가 없다고 생각했었죠. 스스로에게 ‘너 정말 이걸 완벽하게 해낼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자신이 없었어요.”

연기를 할 때 가장 행복했지만, 만족할 수 없는 연기를 하는 것이 스스로가 원한 행복은 아니었다고 한다. 방황의 시간은 길었다. 3~4년의 공백이 있었고, 그 기간 스피치 학원에서 꽤나 잘나가는 강사가 돼 업계에선 이름도 날렸다. 그러다 다시 돌아온 자리다. 그는 “조금씩 나아가고 있지만 배우로의 갈증은 여전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다”며 “계속 가다 보면 배우로 나만의 길을 하나씩 개척해나갈 수 있으리란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늘 궁금한 배우가 되고 싶어요. 조금 거창할 수도 있을까요. 전 틀에 갇히지 않고, 사회적 시선과 인식, 사회의 선입견을 깨는 동기(motive)가 되는 용기를 주는 사람이자 배우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이 사람이 하는 연기는 늘 궁금한 배우라면 좋겠어요. 그래야 작품 안에서 온전히 그 캐릭터로 봐주실 것 같아요.”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