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상속세 개정안 부결에

재계 “사기 꺾는 결정” 반응

2000년 이후 과세체계 그대로

과도한 상속세 탓에 승계 포기

25년 만에 상속세 최고세율을 낮추기 위해 발의됐던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이 결국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탄핵정국 속 기업들의 경영 불확실성을 완화해줄 핵심 법안마저 벽에 부딪히자 재계에서는 ‘사기를 꺾는 결정’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우리나라는 오랜 기간 상속세 과세체계를 손보지 않아 세제가 시대 변화를 못 따라간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이번 국회 본회의가 현실과 동떨어진 상속세제를 바꿀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지만 부결로 무산된 것이다.

대기업에 비해 자금조달 여력이 낮은 중소·중견기업들의 경우 과도한 수준의 상속세를 감당 못해 향후 가업 승계를 포기하거나 해외 이전이 가속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11일 국회와 재계에 따르면 전날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던 상속세·증여세법 개정안은 재석 281명 중 찬성 98명, 반대 180명, 기권 3명으로 부결됐다.

앞서 정부는 상속세 최고세율을 50%에서 40%로 인하하는 내용이 담긴 상속세·증여세법 개정안을 지난 9월 발의한 바 있다. 지난 2000년 이후 무려 25년 만의 개편인 만큼 재계의 높은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야당의 반대로 물거품이 되면서 아쉽다는 반응이 나온다. 오문철 한양여대 세무회계학과 교수는 “상속세율 50%는 전 세계적으로 봐도 높은 수준이다. 이번 상속세 개편은 사실 인하가 아니라 비합리적인 수준에서 합리적인 수준으로 맞추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상속세 최고세율은 5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일본(55%) 다음으로 높다. 최대주주가 보유한 주식(중소·중견기업 제외)을 상속할 경우 여기에 20% 할증이 적용돼 최고세율은 60%로 올라간다. 사실상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인 셈이다.

현행 상속세 과세체계(세율 및 과표구간)는 2000년 수준에 머물러 있어 그 사이 물가와 자산이 크게 상승한 시대 변화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미국 조세재단(US Tax Foundation)이 발표한 ‘2024년 글로벌 조세경쟁력 지수’에서 우리나라는 OECD 38개국 중 32위로 하위권이다.

대기업의 한 관계자는 “현행 상속세 제도는 물가와 자산가격 상승을 반영하지 못하는 등 현실에 맞지 않는 측면이 있다”며 “가업상속공제 확대는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필수 제도로 생각했는데 이번 부결로 무산돼 기업들의 불확실성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 2022년 고(故) 김정주 넥슨 창업자 유족이 국가에 납부해야 하는 상속세 규모가 6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자 업계에서는 유족이 과도한 상속세 부담 때문에 지분을 중국 텐센트에 매각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유족은 결국 기업 지분을 승계하기로 결정했지만 자칫 국내 대표 게임회사가 상속세 때문에 중국 자본에 넘어갈 뻔 했다며 업계가 술렁였다. 이를 계기로 경영 안정성을 저해하는 상속세를 이제라도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받았다.

정부도 이러한 의견을 반영해 개정안에서 현행 50% 최고세율을 적용하는 30억원 초과 과표구간을 삭제하고, 과세표준이 10억원을 넘는 상속금액부터 일괄적으로 40% 세율을 적용했다. 최고세율을 50%에서 40%로 낮춘 것이다.

또한, 10%의 최저세율이 적용되는 과표구간은 1억원 이하에서 2억원 이하로 확대했다. 최대주주 주식의 경우 20% 할증하는 내용도 폐지하는 등 전반적으로 상속세 부담 완화에 초점을 뒀다.

그러나 민주당은 상속세 개편에 대해 ‘부자감세’라고 평가하며 개정안 통과를 반대했다. 전날 국회 표결 전 오기형 민주당 의원도 반대토론에서 “개정안의 주된 내용은 ‘초부자 감세’”라며 부결시켜달라고 주장했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최대주주 주식 할증 적용은 우리나라만 있는 예외적인 과세”라며 “기업의 안정적인 승계는 국제 경쟁력 제고를 위한 필수 기반인데 (상속세 개정안 부결로) 합리적 처방에 대한 기대를 저버려 큰 실망을 안겨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상속세 개정안 처리가 물거품이 되면서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중소·중견기업이다.

정부 개정안에는 우수기업 요건에 해당하면 가업상속공제 대상에 매출액 5000억원 이상 중견기업을 포함하고, 피상속인의 가업 영위기간에 따른 공제한도를 두 배로 상향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현행 가업상속공제는 중소기업 또는 매출액 5000억원 미만 중견기업을 대상으로, 피상속인이 10년 이상 경영한 가업상속 재산에 대해 최대 600억원 한도로 공제해주고 있다.

김우철 교수는 “현재 중소·중견기업 CEO들의 고령화가 심각한 상황인 만큼 승계가 시급하다”며 “상속세 개정 불발로 기업의 사기가 상당히 떨어지고, 안정적인 승계를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포기할 수도 있는 위험이 크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탄핵정국 속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파 논리로 이번 상속세 개정안이 무산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정파적으로 입장이 다를 수 있더라도 상속세 부담 완화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 모인 상황에서 이걸 무산시킨 것은 무책임한 것”이라며 “경제 이슈와 정치 이슈는 분리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현일·고은결·한영대·김민지·박혜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