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대 기업 사장단이 21일 이례적으로 긴급성명을 내고 상법 개정 논의 중단을 요구했다.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총주주’로 확대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이 강행될 경우 끝없는 소송전과 경영 위축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게 기업들의 우려다. 주요 그룹이 공동 성명을 낸 것은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유행으로 심각한 내수 부진이 이어진 2015년 7월 이후 9년 만이다. 지금 한국 경제 상황이 그만큼 위중하다고 본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고 있는 상법 개정안은 의사의 충실 의무대상을 회사 대신 모든 주주로 넓히는 게 골자다. 소액주주를 보호하고 투명 경영을 도모한다는 취지지만 개인 투자자와 투기 자본까지 다양한 주주의 이해관계를 모두 만족시키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해관계에 따라 중대 결정이 미뤄지거나 추진이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모든 혁신 기술은 초기에는 위험 부담을 안고 가게 마련인데 당장 주주들에게 손해가 간다는 이유로 결정이 방해를 받을 수 있다. 소송 남발과 이사에 법적 책임을 묻는 일이 늘어나면 경영이 위축될 수 밖에 없다. 신성장 동력 확보가 어렵게 되는 것이다. 되레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와 멀어지게 된다. 집중투표제 의무화 역시 의사결정을 어렵게 하고 투기 자본의 경영권 공격 수단이 될 수 있어 우려가 크다.

기업이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 없이 지배구조를 흔드는 것은 글로벌 스탠더드에도 맞지 않다. 미국 영국 등 주요국들은 기업에 차등의결권을 부여하고 있고 일본은 포이즌 필을 통해 경영권을 보호할 수 있게 하고 있다. 해외 투기자본의 표적이 되기 쉽고, 장기적인 성장 전략보다는 단기적인 이익에만 치중하는 경영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렇지 않아도 기업들은 공급망 재편과 글로벌 보호무역 강화 속에서 극심한 생존 경쟁을 벌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2기 체제의 관세 강화와 중국의 공세로 이중 삼중의 어려움이 크다. 특히 중국의 기술력과 저가 공세에 설 자리가 줄어드는 처지다. 철강, 화학 등 전통적인 제조업들이 점점 밀려나고 주력 수출산업인 자동차와 반도체마저 중국의 가격경쟁력과 기술력에 쫒기고 있다. 중국기업은 손해를 봐도 국가가 지원금과 규제 완화로 밀어주기 때문에 마음놓고 기술개발에 매진하는 게 가능하다.

기업이 곧 국가경쟁력인 시대에 한국 경제만 중요한 시기를 허비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과도한 규제가 아니라, 기업 활동을 뒷받침할 정책적 지원이다. 정치가 경제를 가로막아선 안된다. 상법 개정안이 가져올 경제적 효과를 면밀히 재검토하고 더 심도 있는 논의를 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