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상수 기자]외교가에서 쓰이는 표현는 ‘해석’이 때론 말 자체보다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외교관도 기자들도 그래서 단어 하나에 굉장히 민감합니다.
외교부 한 고위 당국자는 사석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니다’와 ‘모른다’, ‘확인할 수 없다’, 이 표현의 해석을 배우는 것부터가 외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참 어려운 말입니다. 그만큼 외교는 해석의 대결이기도 합니다. 명확하게 상대국에 답을 주는 경우는 거의 없죠. 해석은 그 나라의 영역이자 외교 역량입니다.
최근 동북아 외교에선 ‘진정성’ 있는 사과란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일본이 도발할 때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촉구하며, 북한이 갖가지 이유로 협상을 거부할 때마다 대화 의지에 진정성을 보여달라 비판합니다.
진정성은 진정(眞情)이란 말 뒤에 성질을 뜻하는 접미사, 성(性)이 더해진 표현이죠. 진정의 사전적 의미는 ‘참된 사정’. ‘참된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를 종합하면, 진정성 있는 사과란 ‘거짓 없이 참된 마음을 담은 사과’ 정도가 되겠네요.
사과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니, 그 표현 안에 ‘진정’이 본질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일반적으론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진정성’이 외교로 넘어가게 되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일본이 나름 과거를 반성한다는 메시지를 내비치고 있지만, 여전히 국제사회가 진정성 있는 사과를 요구하는 이유입니다.
일본 입장에선 한편 답답할지 모르겠습니다. 진정성 ‘없는’ 사과가 가능하냐는 질문도 나올 수 있죠. 또 그 진정성을 어떻게 보여줘야 하느냐는 반발도 나올 수 있겠습니다.
진정성 있는 사과라 평가받는 독일을 보면 답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최근 일본을 방문하면서 갖가지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독일은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했다”며 일본의 과거사 태도를 지적했고, 군 위안부 문제 역시 제대로 해결하는 게 좋다는 말도 전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일본만 비판한 건 아닙니다. 주변국의 역할도 강조했죠. 하지만 제3국의 정상이, 그것도 해당국가를 방문해정상과 만나는 자리에서, 그것도 민감하기 그지없는 과거사 문제를 언급한 것 자체가 독일에는 적지않은 부담일 것입니다. 그런 부담 속에서도 메르켈 총리는 방일 기간 동안 수차례 과거사와 종전 70주년의 의미를 강조했습니다.
메르켈 총리는 2009년엔 독일 정상의 위치로 무릎 꿇고 과거사를 사죄해 전 세계에 독일의 메시지를 알렸습니다. “쇼아(홀로코스트의 히브리어)는 독일인의 가장 큰 수치”, “오늘날 우리가 자유와 주권을 말할 수 있는 건 과거사 인정 때문”, “수감자들의 운명을 떠올리며 깊은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나치의 만행을 기억하는 건 독일의 영원한 책임”이라는 등 취임 이후 그의 과거사 사죄 발언은 수시로 이어집니다.
메르켈 총리뿐인가요. 독일은 1970년 빌리 브란트 당시 총리가 유대인희생자 위령탑을 찾아 직접 무릎 꿇고 사죄하는 등 정권을 초월해 일관된 사과 메시지를 국제사회에 전파했습니다. 정당이 바뀐다고 메시지가 바뀌지 않았습니다. 제국주의에 대한 사과와 반성, 사죄는 일관된 국가의 가치관입니다.
독일의 진정성, 일본의 비(非)진정성을 구별할 수 있는 대목이 바로 이 일관성입니다. 1993년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사과한 ‘고노 담화’에는 분명 일본의 과거사 사과가 담겨 있습니다.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발표한 ‘무라야마 담화’엔 한층 더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에게 많은 손해와 고통을 줬다. 의심할 여지없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 경제위기를 겪고 일본이 보수화되면서 그들의 사과는 진정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정권이 바뀌면서 이 같은 사과는 계승되지 못했습니다. 정권이 바뀌면 사과 메시지가 바뀌고, 또 한 정권 내에도 통일된 메시지가 나오지 않는다면, 비록 사과를 밝힌다 해도 그 사과를 믿을 수 없습니다. 당시 처한 상황에 따른 면피용이란 인식을 버릴 수 없죠. 일본은 과거사 사과를 했습니다. 하지만 진정성 있는 사과는 하지 못했습니다.
독일과 일본의 예처럼 진정성 있는 사과엔 역사가 필요합니다. 시간이 지나도 흔들림 없다는 믿음이 더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입니다.
아베 총리는 오는 8월 과거사의 견해를 담은 아베 담화를 발표합니다. 과거사 사과가 담길 것인가가 우선 과제이지만, 사과를 표현한다고 해서 진정성까지 자연스레 따라올 순 없습니다. 더는 일본의 사과가 정권에 따라, 국가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일이 없다는 믿음을 줘야 합니다. 또 그런 표현이 필요할 것입니다. 일본이 궁금해 할 ‘진정성’ 있는 사과는 바로 그런 사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