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니맨 인생’을 축하받던, ‘저니맨 대표’가 되던 날‘축’. 한 글자가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저니맨야구육성사관학교(이하 저니맨 학교)가 열리는 날, 학교 앞엔 참 많은 화환이 놓였다. 모든 화환엔 저니맨이 적혀 있었고 그 앞엔 ‘축’이란 단어가 붙어있었다. ‘실패자’, ‘떠돌이’ 같은 꼬리표였던, 내게 괴로움을 줬던 그 단어가 세상 사람들에게 축하받던 순간이었다. 저니맨으로 살아온 내 삶이 처음으로 축하받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참 굴곡진 저니맨 인생이었다. 처음엔 저니맨으로 살기 정말 힘들었다. 숨으려고도 했고, 저니맨이란 호칭을 떼어내고도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 품에서 다시 태어난 이후 다 내려놓고 저니맨 인생을 인정했다. 내 인생에 다가오는 수많은 일들을 다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다보니 어느새 저니맨을 ‘육성’하는 사관학교까지 만들었다. 뿌듯했다. 저니맨을 지탄받던 단어에서 축하받는 단어로 만든 것 같아서. 이 모든 것이 내가 저니맨을 전면에 내세우며, 모든 일을 ‘정면돌파’했기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난 최익성 대표가 됐다. 저니맨 학교의 대표이자 저니맨을 대표하는 사람. 막중한 책임감이 들었다. 하루아침에 ‘저니맨’이 축하받는 단어가 된 것처럼, 저니맨의 일부가 아닌 저니맨을 대표하게 된 내 인생도 크게 바뀌었다. 시작과 동시에 닥친 난관미지의 세계로 발을 내딛었다. 사무실-웨이트-야구연습장이 공존하는 곳은 내가 알기로는 우리가 최초였다. 남들이 걸은 길은 없었다. 우리가 가는 곳이 곧 길이었다. 나는 최초의 길을 만드는 기간을 2년으로 잡았다. 2년 동안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프로를 보내는 방법-선수 육성법-합당한 가격대를 설정하는 것 등을 해내고 싶었다. 그래서 초반엔 아주 적은 인원만 받았다. 발을 내딛자마자 추진력을 잃었다. 사관학교를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해준 사업가의 지원이 끊겼다. 오픈식이 시작되기 직전부터 흔들거리던 회사가 결국 손을 쓸 수 없는 지경까지 다다랐기 때문이다. 지원이 끊기고 난 모든 짐을 홀로 떠안아야했다. 최초의 길을 만드는 것보다 당장 살 수 있는 숨구멍부터 뚫어야했다. 당장 다음 월세부터 고민해야할 형편이 됐다. 난 이 상황을 담담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려 했다. ‘사업가로서도 시험대에 올랐구나. 2년 동안 회사를 운영할 수 없다면 난 그저 기술자인 것이지 사업가가 아니다. 어차피 이 일은 돈이 아니라 마음으로 풀어내야한다. 나는 이 사업을 절대 실패로 끝내지 않을 것이다. 내 스스로 납득이 될 때 야구를 그만뒀듯이 사업도 그렇게 마무리 지을 테다.’ [정리=차원석 기자 @Notimeover]* 최익성이름보다 ‘저니맨’이란 호칭으로 더 유명한 남자. 힘들고 외로웠던 저니맨 인생을 거름삼아 두 번째 인생을 ‘정면돌파’ 중이다. 현재 저니맨야구육성사관학교 대표를 지내며 후진양성에 힘 쏟고 있다.
sports@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