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춤했던 가계부채·부동산 재점화 가능성
“금리 낮췄다 집값 뛸수…부동산 영향 분석 시급”
美연준 금리인하 속도 예상보다 늦어질 우려
미국 대선, 중동 불안 등 대외 불확실성도
정부·정치권에서는 금리인하 목소리 계속
[헤럴드경제=강승연·홍태화 기자]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로 ‘긴축’으로 틀어졌던 통화정책의 키가 3년 2개월 만에 ‘완화’를 향해 돌아가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인 피벗(통화정책 전환)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는 11일 열린 통화정책방향 결정회의에서 기준금리를 연 3.50%에서 3.25%로 0.25%포인트 내렸다. 2021년 8월 기준금리를 0.50%에서 0.75%로 인상하며 시작된 통화긴축 기조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한은의 기준금리 인하는 코로나19 위기가 발생한 2020년 5월(0.75→0.50%) 이후 4년 5개월 만이다.
한은이 피벗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기는 했지만, 앞으로 보폭은 크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다음 달 28일로 예정된 금통위에서 기준금리를 동결한 뒤 당분간 신중하게 시장을 지켜볼 것이란 예상에 무게가 실린다. 내년에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금통위는 1월·2월·4월·5월·7월·8월·10월·11월에 열린다.
무엇보다 가계부채와 부동산에 대한 부담이 큰 상황이다. 추가 금리 인하가 최근 주춤했던 가계부채나 부동산 시장에 다시 불을 붙일 가능성이 있는 만큼, 일단 이번 금리 인하의 효과를 주시하면서 다음 카드를 고민할 것이란 관측이다. 그간 한은이 가계부채 리스크를 고려해 보수적 행보를 보였던 것을 고려하면 추가 인하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금리 인하에 따라 부동산 자극할 수” 피벗 속도 늦출 듯
가계대출 추이 및 부동산 시장 흐름은 오락가락 하고 있다.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가계대출 잔액은 이달 4일 현재 729조3934억원으로, 전월 말 대비 1조5737억원(0.2%) 감소했다. 지난달에는 5조6029억원 늘어나며 월간 기준 역대 최대였던 8월(9조6259억원)에 비해 증가폭이 크게 축소했다.
부동산 시장 역시 한풀 꺾인 모습이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10월 첫째 주(7일 기준) 전국 아파트 매매가격 상승률은 0.01%로 전주(0.02%)보다 내렸다. 서울(0.10%)은 상승폭을 유지했지만, 인천(0.03→0.02%), 경기(0.05→0.04%)는 상승폭이 줄었고 지방은 하락세(-0.02%)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를 추세적 안정화 국면으로 판단하기는 아직 시기상조인 데다, 기준금리 인하의 영향을 반영할 경우 시장이 급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8월 금통위 때도 포워드가이던스(향후 3개월 기준금리 전망)를 통해 2명의 금통위원이 부동산 대책의 효과를 확인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금융안정에 보다 유의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그동안 한은이 기준금리를 인하하는 순간 부동산 시장이 즉각적으로 반응해왔다. 이번에도 한은이 금리를 빠르게 낮췄다가 부동산 가격이 뛰어오르면 한은의 책임론이 제기될 수 있는 만큼, 내년에 부동산 가격을 보면서 점진적으로 금리를 내릴 것”이라며 “한은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금리 인하에 따른 부동산 시장 영향 분석”이라고 내다봤다.
최진호 우리은행 이코노미스트도 “지금 인플레이션 변수는 정책 초점에서 많이 벗어나고 금융안정과 경기에 집중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결국 가계부채 문제가 (금리 결정에) 제일 크게 작용할 것”이라며 “이번에 금리를 한 번 내리고 난 뒤 그 효과를 면밀히 관찰하면서 시간을 벌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韓 기준금리, 美와 같은 속도론 못내려
미국과의 기준금리 격차도 급격한 금리인하 전망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하폭이 시장 기대보다 크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커지고 있어서다. 지난달 미국 고용 지표가 ‘서프라이즈’를 기록하면서 11월 빅컷(0.50%포인트 인하) 기대는 크게 낮아지고 베이비컷(0.25%포인트) 또는 동결 전망이 고개를 들고 있다. 자본 유출, 환율 불안 등을 막기 위해 미국과 적정 수준의 금리 차를 유지해야 하는 한은으로선 통화정책 운용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해 안 교수는 “미국의 경기 침체 징후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둔화 정도이지, 침체는 아니다. 2분기 경제성장률이 3.0%로 나왔을 정도”라며 “미국의 인하 속도가 예상보다 굉장히 늦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물가와 가계부채가 안정세로 간다는 전제 하에 내년 경기가 올해보다 더 안 좋아진다면 한은 입장에선 금리를 더 내릴 수 있다”면서도 “그렇다고 코로나19 때처럼 0%대로 가기는 어렵다. 미국과의 금리 차이가 있기 때문에 몇 번 더 내리면 더 내리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이 금리를 내리는 속도에 맞춰서 한은이 같은 속도로 내리지는 못할 것이다. 금리 인하 속도나 폭은 연준보다 늦을 수밖에 없다”며 “미국은 5.25~5.50%에서 기준금리 인하를 시작해 최종 3.00% 내외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게 되면 한은은 내년 말 2.5% 정도에 도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국내 금융시장에 충격을 줄 수 있는 대외 불확실성에 대한 경계감도 있다. 한 달도 남지 않은 미국 대선(11월 5일) 결과에 따라 글로벌 금융시장이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당선될 경우, 연준의 금리 인하를 압박하는 한편 달러화 약세 정책을 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스라엘-헤즈볼라 간 분쟁에 따른 중동 불안도 국내 금융 안정을 위협할 수 있는 요인이다.
이런 점들 때문에 한은이 기준금리를 동결해 나가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지금 한은은 한·미 금리차를 줄여나가는 게 가장 시급하다”며 “부동산과 경상수지, 환율 등을 감안하면 한동안 동결로 가야 한다. 지금도 미국에 비해 우리 금리 수준이 낮다”고 주장했다.
반면 정부와 정치권에서는 한은이 금리 인하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앞서 대통령실은 8월 금통위에서 금리 동결 결정이 나오자 “경기 회복과 내수 진작을 위해 선제적으로 (인하) 했으면 도움이 됐겠다는 아쉬움이 있다”며 이례적으로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은 내수 부진의 주원인으로 고금리 장기화를 꼽으며 금리 인하를 주문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