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경북 경산 불굴사

태양 뜻하는 홍주암에선 원효대사가 수행

약사보전·갓바위 약사여래불, 부부로 불려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 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17세 화랑 김유신, 이곳서 삼국통일 꿈꿨다”…천년고찰 불굴사 [정용식의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경북 경산 불굴사 입구 김유신 상

폭우와 산사태로 1000년 이상 된 절이 모두 묻혔다. 50여동의 전각, 12개의 부속 암자, 8개의 물방아를 갖춘 대사찰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300여 년 전 대구 팔공산 인근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최근 시간당 100㎜전후의 기록적인 폭우가 중부 지방을 중심으로 국지성으로 나타나 피해가 속출했다. 우리나라 사찰들은 대부분 화재나, 왜란, 호란, 동란 등 전쟁 때문에 역사적 유물들이 사라지고 큰 피해를 입었지만 폭우로 인해 사찰이 묻혀 버린 예는 흔치 않다.

대구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신화(神話) 많은 산 팔공산(八公山), 고려 개국 과정에서 8명의 장수가 전사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넓고 큰 바위산이지만 한반도 산줄기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독산(獨山)이라 하는데 2023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통일신라 수도 경주에서 반도로 나아가는 길목이었기에 팔공산 자락에는 수많은 절과 불교 유적들이 조성됐다.

“17세 화랑 김유신, 이곳서 삼국통일 꿈꿨다”…천년고찰 불굴사 [정용식의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불굴사 전경

최고봉인 비로봉(1192m)을 비롯해 미타봉(동봉 1167m), 삼성봉(서봉 1150m) 등 높은 산들이 대구 동구와 인접한 5개 시군구에 걸쳐 넓게 자리하고 있어, 봉우리마다 부처님이 새겨지고 계곡마다 사찰이 조성됐다. 조계종 교구본사로서 대표적 사찰인 동화사(9교구 본사), 은해사(10교구 본사) 등 대형 사찰에서부터 갓바위를 안고 있는 선본사, 파계사, 송림사, 북지장사, 부인사, 거조암, 염불암 등 유서 깊고 큰 사찰들과 암자 수십 곳이 팔공산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다. 경주 남산을 제외하곤 흔치 않은 일이다보니 하나의 산에 전통 사찰이 가장 많이 등록된 곳이 됐다.

팔공산 남쪽 무학산(588m) 자락에도 팔공산 갓바위와 짝을 이룬다는 약사여래불이 있는 천년고찰 불굴사(佛窟寺)가 있다. 장맛비가 잠시 주춤한 틈을 타서 김유신과 원효대사의 기도처로 알려진 원효굴이 있는 경북 경산의 불굴사 홍주암을 다녀왔다.

김유신 장군과 원효굴(홍주암)

“17세 화랑 김유신, 이곳서 삼국통일 꿈꿨다”…천년고찰 불굴사 [정용식의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불굴사 전경

우리나라 사찰 중에는 원효대사, 의상대사와 연을 맺은 곳이 특별히 많다. 그만큼 두 사람이 통일신라 시대 불교 중흥과 연계된 최대의 고승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원효는 일생 대부분을 깊고 높은 산속 토굴이나 초막에서 수행 생활을 했는데, 그가 수도했다는 원효굴이 전국 각지에 여러 곳이 있다.

국토의 70%가 산(山)인 한민족에게 산은 하늘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신령이 머물거나 신령이 내려오는 장소로 엄숙하고 숭고한 기도처였다. 특히, 바위산들은 더욱 그러했다.

“17세 화랑 김유신, 이곳서 삼국통일 꿈꿨다”…천년고찰 불굴사 [정용식의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홍주암으로 가는 길

얼마 전에 갔던 안양의 삼막사에도 원효굴이 있었다. 경기 동두천 소요산 자재암 인근, 전북 부안 개암사 뒤편, 경북 봉화 청량산에도 있고 팔공산에만 해도 두 곳이 있다.

비로봉이 보이는 오도암에서 800계단 오르면 청운대 절벽에 있는 바위굴이 원효굴이라 알려졌다. 불굴사 창건 계기가 된 홍주암에도 원효굴이 있다. 특히 이곳은 원효 이전에 삼국 통일의 중추적 역할을 한 김유신(595~673) 장군이 17세 때 수련하고 삼국 통일로 이어졌다고 하며 그 이후 원효(617~686)가 수련(668년)하고 690년 옥희 대사가 불굴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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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위에 자리 잡은 홍주암

불굴사에서 홍주암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다. 초입 주차장에서 우측 은행나무 밑 김유신 동상이 있는 곳에서 곧바로 위로 50여m 흙길을 따라가다 보면 붉은 채색이 된 4층 형식의 암벽에 붙어 있는 그림 같은 암자를 볼 수 있다. 소나무 숲과 돌탑, 바윗길로 쌓인 108계단을 오르면 바위에 붉은 글씨로 홍주암이라고 새겨있는 곳을 만나게 된다. 들어가는 초입이다. 또 다른 길은 불굴사 적멸보궁 뒤 사리탑을 지나 곧바로 산길의 108개의 철제 계단을 올라 30여m만 더 가면 홍주암 표지가 나온다. 필자는 적멸보궁에서 올라가 주차장 방향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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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 석굴 바위 틈에 있는 아동제일약수

홍주암 표지바위에서 한 층을 올라가니 신비스런 천연 석굴 바위 틈에 아동제일약수(我東第一藥水)라는 글귀가 뚜렷하게 새겨진 천연약수가 있다. 구전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조성된 이 석간수는 김유신 장군이 이 물을 마시면서 삼국 통일의 염원을 기도했고 천신(天神)으로부터 깨달음과 지혜를 얻어 삼국통일을 하게 됐다고 해 ‘장군수’라 불렸다고 한다. 물맛이 좋고 귀한 약수라 해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졌다. 소화불량과 신장염에 좋다고 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하니 필자도 한 사발 가득 마셔봤다.

김유신이 기도를 마치고 원효굴에서 나오는데 맞은편 산에서 백마가 울며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도 있어 불굴사와 마주한 산봉우리는 명마산(500.1m)이라 부른다. 김유신의 화신인 장군바위도 팔공산을 지키고 있다는데 원효암을 마주하는 건너편 산자락의 몇 개의 암벽바위 중 하나일 것이라 짐작해본다.

“17세 화랑 김유신, 이곳서 삼국통일 꿈꿨다”…천년고찰 불굴사 [정용식의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원효 대사가 수행한 곳으로 알려진 원효굴

석간수 옆 바위 천장에 원효굴이라는 현판과 함께 기도처가 마련돼 있다. 제작 연도야 알 수 없지만 석굴 석벽엔 석가모니불과 금강역사가 새겨져 있다. 1976년 석굴을 수리하다 신라시대 청동불상 1좌를 발굴했다 하니 석굴의 역사만큼은 가늠이 된다. 언제부터 홍주암이라 불렀는지 모르겠지만 ‘붉은 구슬’의 의미는 태양을 뜻해서 음의 기운을 가진 불굴사 경내에서 가장 먼저 양의 기운인 해(일출)를 마주하는 장소라고 한다.

“17세 화랑 김유신, 이곳서 삼국통일 꿈꿨다”…천년고찰 불굴사 [정용식의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제일 상층에 위치한 기도처인 독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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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성각에서 바라본 팔공산과 시내 풍광

원효굴에서 한 층을 더 오르니 제일 상층에 독성각(獨聖閣)과 기도처가 있다. 천태산 꼭대기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 않고 홀로 깨달아 자유경지에 든 성자를 독성(獨聖)이라 부르며 나반존자(那畔尊者)라 일컫는다. 나반존자는 수행을 완수해 가장 높은 도력을 지닌 부처님의 제자 16나한 중 신통력이 제일 뛰어난 제1존자라고 한다.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고 알려져서 인지 독성각 앞 난간에는 소원문들이 가득하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팔공산과 시내 풍광은 일품이었다.

팔공산 갓바위와 불굴사 약사여래불

“17세 화랑 김유신, 이곳서 삼국통일 꿈꿨다”…천년고찰 불굴사 [정용식의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불굴사 약사보전

불굴사 적멸보궁 바로 옆 약사보전 전각 안에 모셔진 약사여래불(석불입상)은 1736년 산사태로 묻힌 것을 조계산 송광사의 노스님이 중건하면서 현몽으로 찾아냈다 한다. 석불입상은 땅 위 화강암에 2단의 받침대를 조성하고 연화대좌위에 불상을 세웠는데 전체 높이는 233㎝의 큰 석불이나 전체적으로 훼손이 심했다. 얼굴 부분은 이목구비를 다시 조각했으며 왼손 또한 분실돼 현재는 보주를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불굴사 약사여래불은 6㎞ 떨어진 팔공산 관봉의 갓바위 약사여래불과 마주보고 있는 부부라 해서 영험한 불상이라는 소문이 났다. 갓바위 약사불은 갓을 쓴 남성이고 불굴사 약사불은 족두리를 한 여성 모습을 하고 있어 음양의 이치에 맞춰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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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굴사 약사보전 안에 모셔진 약사여래불

불굴사 약사보전안의 여래불은 정면을 바라보지 않고 갓바위 여래불을 바라보고 있는 듯 쪽문 쪽으로 비스듬히 서 있다. 두 여래불이 정확히 마주보고 있는지에 대해 스님에게 물어보니 “약간 비켜서 있으며 서로에게 삐쳐 있어 그렇다”는 농담을 하신다.

팔공산 관봉(冠峰, 850m) 정상부에 5.5m 크기로 서 있어 팔공산 케이블카 정상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갓바위 불상은 머리 위에 넓적한 바위를 얹은 모습이 특징적이라 갓바위라고 부른다. 갓바위를 오르는 길은 여러 방향이 있지만 필자는 10개월여 전에 짧은 길이라는 ‘뒷갓바위’ 길 선본사 쪽에서 올랐다. 언덕길과 셀 수 없이 많은 계단을 30여분 정도 힘들게 올라가는 길이지만 후덕하고 무뚝뚝한 이미지의 갓바위 불상과 팔공산 전경을 마주하면 힘듦도 눈 녹듯 사그라진다.

“17세 화랑 김유신, 이곳서 삼국통일 꿈꿨다”…천년고찰 불굴사 [정용식의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팔공산 갓바위 약사여래불 [출처=경산시]

9세기 초반에 몸체가 만들어지고 고려시대 때 보개(갓)가 씌워진 것으로 알려져 보물로 지정됐다. 한때는 미륵불로 알려졌으나 만병통치의 위력을 갖춘 보살인 약사여래가 필요했던 1960년대에 갓바위를 중생의 질병을 고쳐준다는 약사여래불로 칭하게 됐다. 갓바위는 항상 찾는 사람들이 많지만 특히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둔 시기에는 그 가파른 길에 줄을 서서 올라갈 정도로 인파가 몰린다고 한다.

“17세 화랑 김유신, 이곳서 삼국통일 꿈꿨다”…천년고찰 불굴사 [정용식의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팔공산 갓바위 약사여래불

갓을 쓴 부처라 수능 기도에 효험이 있겠다는 생각일 것이니 갓바위가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미륵불이든, 여래불이든, 문수보살이든 불상의 명칭이야 어떠하든 중생의 고통, 아픔을 고치는 것은 다 같은 이치일 것이다.

팔공산에는 근래에 만들어진 세계 최대 규모의 통일약사여래대불을 포함해 통일신라 시대에 주로 바위에 새긴 여러 곳의 마애약사불 등 유별나게 약사여래상이 많다. 갓바위 불상처럼 머리에 갓처럼 생긴 판석을 보개(寶蓋)라고 하는데 보개를 쓴 불상은 드물지 않게 있는데 논산 관촉사와 부여 대조사 미륵보살이 대표적이다. 주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져 보물로 지정돼 있다.

적멸보궁 불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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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굴사 적멸보궁과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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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굴사 적멸보궁 내부

불굴사는 팔공산 남쪽 무학산 자락에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신라 신문왕 10년(690) 에 옥희(玉熙) 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대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여러 차례 중창 불사를 펼쳤으나 1739년 대홍수로 인한 산사태로 떠내려가 삼층석탑만 남게 됐다고 한다.

불굴사는 자연 석굴 안에 부처님을 모셨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는데 지금은 약사보전 안 자연석 위에 세워진 약사여래불이 있을 뿐이다.

절이 갑자기 쇠퇴한 이유를 전하는 설화도 있다.

불굴사 설화

유생들이 절을 놀이터로 삼고 횡포를 부리던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 불굴사도 곤욕을 치루고 있었다. 어느 날 점잖은 선비가 와서 “산 너머 솔밭에 큰 거북 돌의 눈을 빼면 못된 유생들이 찾아오지 않으리라”고 일러줬다. 승려들이 이 말을 그대로 믿고 거북의 눈을 빼자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가 오더니 대 홍수가 일어나 절이 매몰됐다고 한다. 이후 전라도 송광사 노스님이 작은 암자를 복원하면서 중건했다. 1988년 주지 스님이 번성하던 시절의 옛 대웅전 초석을 찾아낸 뒤 그 자리에 적멸보궁을 짓고 인도에서 모셔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해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불굴사 적멸보궁 앞 삼층석탑은 이중 기단 위에 3층의 몸돌을 쌓아 올려 9세기 통일신라 시대 석탑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 보물로 지정됐다. 높이는 7.43m이며 상륜부 일부가 없어졌으나 대체로 온전한 상태로 보존돼 지붕돌은 넓고 추녀 밑이 수평이며 각 부의 비례는 서로 균형을 이뤄 아름다운 석탑이다.

경내에는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3층석탑, 약사여래입상(석불입상)을 모신 약사보전, 염불전, 관음전 등이 있으며 홍주암과 마주 볼 수 있는 언덕 위에는 최근에 미륵불이 조성됐다. 미륵불은 홍주암과는 달리 절 앞마당에서 훤히 보이는 곳이지만 적멸보궁에서 10여분은 올라가야 한다.

“17세 화랑 김유신, 이곳서 삼국통일 꿈꿨다”…천년고찰 불굴사 [정용식의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홍주암과 마주 보는 언덕 위에 조성된 미륵불

불굴사는 일주문과 천왕문이 없이 주차장에서 곧바로 계단을 오르면 경내로 들어간다. 특이한 것은 불굴사 주변에 우기가 있으면 석불(약사여래입상) 얼굴에 땀이 나고, 큰 비가 오기 전에는 불상의 온몸이 흠뻑 젖는다고 한다. 지금도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거나 하면 반드시 석불의 몸에 습기가 가득 찬다고 한다.

불굴사는 대구 팔공산의 기운이 고개 하나를 넘어 다시 이어지고 있는 무학산 골짜기를 따라 팔공산 관봉인 갓 바위와 마주 보고 있다. 그래서인지 무학산 불굴사를 팔공산 불굴사로도 부른다.

최근 쏟아진 중부지역의 기록적인 폭우로 부여 대조사 갓(보개)을 쓴 미륵보살 아래쪽 흙더미가 무너져 피해를 입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절들이 산속에 있고 목조물이다 보니 화재에 대한 대비뿐만 아니라 이젠 기후위기 시대에 폭우로 인한 산사태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다는 것이 불굴사를 다녀오며 드는 생각이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