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전남 화순 개천사(開天寺)
828년(신라 흥덕왕 3) 창건
사찰은 불교라는 종교적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 자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산에 오르고 사찰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100곳의 사찰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두 번째 방문지는 전라남도 화순군에 있는 개천사(開天寺)입니다. 〈편집자 주〉
개천사, 불교-동학-기독교-민간신앙의 하모니
전라남도 화순군 개천산(開天山)은 해발 497m의 낮은 산이다. 하늘이 열린다는 뜻의 이 산의 중턱엔 828년(신라 흥덕왕 3년)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개천사(開天寺)가 자리하고 있다. 조계종 송광사의 말사다. 두 번째 사찰기행의 목적지이기도 했다.
개천산은 불교와 동학, 기독교와 민간신앙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종교 간 화해와 소통, 공감의 장소인 셈이다. 말 그대로 이곳에서 하늘이 열리고 용이 승천하는 기세를 지녔다. 전설에 의하면 풍수지리에 능했던 도선국사가 개천산에서 수도하면서, ‘거북이가 개천산 정상을 오르면 우리나라가 주변국을 지배하는 강대국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고 한다. 비범한 기운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품고 개천산을 찾았다.
동학엔 개천(開天)과 개인(開人), 개지(開地) 등 하늘과 인간, 땅이 열려서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개벽사상(開闢思想)이 있다. 개천사에서 2km쯤 떨어진 곳에 동학 창시자 수은 최제우 선생이 은거했던 은적암터(남원 은적암이라는 주장도 많다.)가 있다. 동학의 일부 종파에선 성지로 여긴다. 수은선생이 이곳에서 천도교 경전인 ‘동경대전’, 포교가사집인 ‘용담유사’를 집필했다는 기록이 개천사 입구에 있는 조국통일 기원비에 새겨져 있다. 동학대종원(東學大宗院)이 세운 것이다.
개천사 뒤쪽 개천산에는 금욕생활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기독교인의 참 모범으로 꼽히는 (화순)이세종 선생의 생가와 기도처가 있다. 거기엔 ‘한국기독교 첫 영성가 이세종 선생 성지 순례길’이 조성되어 있다. 불교, 개신교, 천주교 3대 종교 지도자들이 함께 걷기도 했던 길이다.
필자가 개천사를 찾았을 때 대웅전 뒤 비자나무 숲 중앙에 놓인 거북바위 앞에선 산신제와 해원 상생굿이 한창이었다. 개천산에서 기독교, 동학, 불교, 민간신앙이 만나고 개천사 음악회에선 수도원 수사님과 교회 목사님이 함께 어울리고 있었다.
바람소리마저 쉬어가는 산사(山寺)
개천사는 통일신라시대 창건된 유서 깊은 천년 고찰이다. 절 입구 주차장에서 산책길을 따라 걷다보면 만나는 부도전(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한 비석 등이 세워진 장소)은 17~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지금보다 훨씬 장엄했을 과거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지금의 넓은 절 마당에는 불상이나 탑은 보이지 않고, 몇백년 수령의 은행나무 그늘과 목을 적셔주는 약수터만 놓여 있다. 건물이라고 해봐야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천불전’과 싸리나무로 가린 요사채 정도다. 정유재란, 6·25전쟁 등 난리를 겪으며 소실된 아픔이 있어서다. 부처님 세계로 들어간다는 일주문, 사천왕문은 없다. 담장 따위도 있을 리 없다.
그마저 천불전에도 ‘오백불’만 모셔져 있다. 이걸 두고 여백의 미라고 해야 할지, 아님 빈궁함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엇이든 좋다. 부족함이 상대에게 오히려 편안함을 주는 것 만은 확실하다. 스님의 깊은 속내를 사부대중이 어찌 알겠는가.
천불전은 ‘누구든지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상징이다. 절대적 권능을 가진 유일신을 믿는 종교들과 달리 불교에선 ‘부처는 수없이 많고 앞으로도 수많은 부처가 생길 수 있다’고 말한다. 현세에 1000명의 부처님이 출현하고 중생을 제도(濟度, 고통의 바다에서 건져냄)한다고 한다. 개천사의 채워지지 않은 오백불, 비어있는 여백이 주는 나름의 의미가 울림이 있다.
막힘이 없기에 탁 트인 하늘 아래 사색할 수 있는 아담하고 고즈넉한 곳이다. 멍 때려도 좋다. 요사체 문 두드려 차 한 잔 요청해도 보원스님이 언제든지 방석을 내어줄 것만 같다. 필자와 스님의 우연한 첫만남도 무심한 듯 그리했다. 낙엽 지는 가을, 함박눈 내리는 겨울. 요사채 마루에 걸터앉아 낯선 방문자들을 무심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백구(白拘) ‘보리’와 눈을 마주치고 놀아도 좋다. 봄에는 진달래 따서 절 마당에서 화전놀이도 하고 대웅전 옆에선 쑥 캐며 자연과 하나 된다.
부처님오신날이나 비자향기 발산할 땐 음악회가 열려 흥겨운 잔치마당이 벌어진다. 절 마당은 그렇게 사람이 자연스레 드나들고 노니는 공간이 되었다. 모두에게 열어 주고 있기에 바람도 머물다 간다. 주지스님도 영락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닮아가듯 절과 스님도 하나가 되어 있다.
비자림 숲길과 모자나무(연리목)
개천사는 450년 된 연리목을 비롯해 100~200년 된 1000여 그루 비자나무가 뒤를 받치고 있다. 비자나무숲은 2007년 천연기념물 483호로 지정되었다. 비자 열매는 약제(구충제)로 쓰고 기름을 짜서 식용하기도 한다. 목재는 바둑판 등 각종 가구 재료로 사용한다.
450여년 된 비자나무는 어미나무에서 다른 가지가 나와 다시 한 몸을 이룬 연리목으로, 모자(母子)나무라 이름 지어져 있다. 높이가 20여m는 됨직하고 자태가 보통이 아니다.
주지스님은 우스개로 “모자나무가 아니라 모녀(母女)나무로 바꿔야 한다”고 한다. 자식나무가 어미나무보다 훤칠하게 커서 아들 나무라 붙였지만 두 나무 모두 열매를 맺기에 모녀나무가 더 어울린다는 것이다. 비자도 은행처럼 암수가 있어 암나무만 열매를 맺는다.
올해 비자림 탐방로가 개설되고 정비되었다. 개천사에서 출발해 1시간 30분 오르면 비자숲길과 개천산 정상까지 닿을 수 있다. 간혹 주말엔 주지스님과 함께 비자나무 숲길을 걷는 행사도 열린다. 필자가 방문한 날에는 마침 탐방로에서 대금과 오카리나 버스킹이 열렸다. 청아한 소리가 비자나무숲을 휘감으니 날렵한 초록빛 비자 씨앗이 진한 향을 풍겼다.
개천사에선 젊은 나이로 열반한 ‘노래하는 수행자’ 범능스님을 추모하는 기념 음악회가 몇 차례 열렸다. 필자가 개천사와 인연을 맺었던 첫 방문의 계기이기도 했다. 올해는 ‘개천사 비자나무 음악회’라는 이름으로 지역주민회와 절이 함께 행사를 열었다. 산들바람이 머물 때마다 노란 은행잎이 절 마당 사방으로 흩날렸다.
거북바위와 해원(解冤)
대웅전 뒷길로 10여분 오르다보면 거북바위가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영락없이 등이 이끼로 뒤덮인 거대한 거북 한 마리가 산 정상을 오르고 있는 형상이다. 도선국사의 예언 전설을 들은 일본 장수가 기분 나빠 거북의 머리를 베어서 버렸다 한다. 이후 거북이 머리를 찾아 붙여 놓은 것이 현재 모습이란다. 거북바위 앞에서 10년만에 복원된 ‘개천산 산신제’와 ‘개천산 희생자 해원 상생굿’을 마을 주민회에서 진행하고 있었다.
동학혁명 당시엔 동학군 주둔했고 해방 후 인근 백아산엔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도당이 있었다. 개천사도 빨치산의 주둔지로 간주돼 국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미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중건된 적이 있다. 아픈 역사는 야속하게도 반복된다.
화순 백아산에서 장흥 가지산까지 산에서 산으로 이어지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동학, 의병, 해방후 6·25전쟁까지 격변기마다 얼마나 많은 지역 양민들이 희생의 대상이 되었을까. 원혼들의 ‘해원 상생’과 극락왕생을 기원해본다. 하늘과 바람, 그리고 인간들에게 모두 열려 있는 산사인 개천사가 화순읍에서 겨우 30분 거리에 있었다. 그리고 절을 닮아 막힘이 없고, 사람 좋아하는 보원스님이 거기에 계신다.
글·사진 = 헤럴드 정용식 상무
정리 = 박준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