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만에 세계 경제 3위 자리 獨에 내줘

엔저에 물가 뛰지만 실질임금 하락

BOJ 긴축 선회 전망속...경기침체 우려 고조

日 경제 찐부활, 경제성장 절반 넘는 ‘소비’에 달렸다 [디브리핑]
지난달 23일 가즈오 우에다 일본은행 총재가 금융정책결정 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AFP]

[헤럴드경제=원호연 기자]기록적인 엔화 약세로 물가가 급등하면서 일본 경제의 기초가 되는 민간 소비가 무너지고 있다. 고물가에 생필품마저 사지 않는 등 소비자들이 허리띠를 졸라 매면서다. 아무리 증시가 활황을 보이고 외국인 자금이 몰려들어도 경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소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성장이 어렵다는 얘기다. 물가를 잡는 한편 경기가 다시 침체에 빠지지 않도록 소비를 활성화시키는 것이 모처럼 활기를 보이는 일본 경제 성장의 관건이 될 전망이다.

일본은 지난해 3분기 마이너스 3.3% 성장에 이어 4분기에도 마이너스 0.4% 성장을 기록했다. 시장이 전망한 1.4% 성장에서 크게 빗나간 성적표다. 달러로 환산한 지난해 일본의 명목 GDP는 4조2100억달러로 독일(4조4600달러)보다 적었다. 독일에게 밀린 것은 1968년 이후 55년 만이다.

기업 실적 호조에 힘입어 일본 증시는 ‘거품 경제’ 이후 34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경제가 뒷걸음 친 것은 GDP의 약 55%를 차지하는 개인소비가 지난 4분기에 전 분기 대비 0.2% 감소한 영향이 컸다. 개인소비 다음으로 중요한 자본 지출도 전 분기보다 0.1% 줄었다. 소비와 자본지출 모두 3분기 연속 감소세가 이어진 것이다. 일본 경제에서 내수가 차지하는 비율이 약 85%로 60%대인 한국과 비교해 내수 의존도가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큰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는 기록적인 엔저의 두 얼굴도 한 몫했다. 슈퍼 엔저 현상은 일본 수출 기업과 관광산업에 호재로 작용했지만 에너지 등 수입물가가 올라가면서 소비 위축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일본의 소비자 물가지수 상승률은 3.8%로 42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반면 지난해 1인당 실질임금은 전년 대비 2.5% 감소하며 실질임금 하락폭은 2022년(1.0%)에서 크게 확대됐다. 일본인 대부분이 “물가는 오르는데 왜 내 월급만 안 오를까”라는 하소연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최근 달러-엔 환율이 재차 150엔 대로 상승하는 등 슈퍼 엔저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며 “엔화 약세가 일본 기업의 수출과 주가 랠리에는 기여하고 있지만 수입 물가를 끌어올리는 등 일본 소비자들에게는 낯선 인플레이션 환경을 만들어 소비를 제약했다”고 말했다.

日 경제 찐부활, 경제성장 절반 넘는 ‘소비’에 달렸다 [디브리핑]

결국 일본 소비자들은 주머니를 단단히 잠그는 것으로 높은 물가에 대응하고 있다. 식품, 연료 및 기타 상품에 대한 지난 4분기 소비가 전년비 0.9% 감소하면서 3분기 연속 하락세를 이어갔다. 생활하는 데 필수적인 생필품 소비도 줄어든 것이다. 지난 1월 노토반도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소비 심리는 더욱 악화되고 있어 1분기에도 회복이 쉽지 않다는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사카이 사이스케 미즈호리서치 앤 테크놀로지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실질임금이 늘지 않으면 소비자는 지갑을 열지 않는다”며 “기업 매출도 증가하지 않아 투자와 임금을 적극적으로 늘리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진다”고 분석했다.

박 연구원은 “일본 정부나 일본은행이 누차 강조하는 임금 인상도 아직 목표에 미치지 못했다”며 “이번 춘투기간의 임금 상승폭이 소비 사이클을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예상을 빗나간 경제 성적표를 받아 들면서 이르면 오는 4월 금리를 인상하며 역사적인 초장기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끝내려던 일본은행(BOJ)의 고심도 커지고 있다.

가뜩이나 소비 심리가 위축된 상황에서 통화 정책이 긴축으로 선회하면 경제가 다시 침체 국면으로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금리를 올릴 경우 정부와 가계가 빚 부담에 시달려야 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최규호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일본은 장기금리 조정을 위해 국채 매입을 꾸준히 늘리면서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이 237.5%로 주요국에 비해 크게 높아 금리 반등 시 정부 이자 부담이 상대적으로 크다”고 설명했다. 이어 “최근 자산가격 상승률은 둔화되는 반면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상승하고 있어 금리 상승시 가계의 금융 건전성이 악화될 수 있는 점도 BOJ의 고민을 더한다”고 덧붙였다.

여기에 올해 유로존과 중국 등 일본의 주요 무역 대상국의 성장이 크게 둔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BOJ 입장에선 소비에 이어 수출도 다시 제약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미 BOJ는 최근 분기별 전망에서 “해외 경제의 회복 속도 둔화로 경제가 하방 압력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한 바 있다.

타케시 미나미 노린추킨리서치 이코노미스트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일종의 약한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것”이라며 “3월이나 4월에 금리를 인상하려던 BOJ 입장에선 역풍을 맞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