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에서 ‘중재자’된 루카셴코…“슬라브 피스메이커” vs “러시아 경제 종속 심화” 논란 [디브리핑]
러시아 변방의 소국 벨라루스가 국제 정세의 한가운데로 부상했다. 알렉산더 루카셴코(왼쪽) 벨라루스 대통령이 바그너 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가운데)과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 러시아 대통령의 충돌을 막은 중재자라는 명성을 얻게 됐다. 하지만 이는 벨라루스가 더욱 우크라이나 침공에 깊게 관여하는 일이 되며, 서방의 강력한 제재를 촉발,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자충수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로이터·AFP]

[헤럴드경제=이민경 기자] 국제사회 ‘왕따’ 신세였던 알렉산더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지난주 반란을 일으킨 예브게니 프리고진 바그너그룹 수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휴전을 도우며 ‘중재자’로 떠올랐다. 중재로 루카셴코 대통령은 몸값을 높였지만, 러시아와 점점 ‘한몸’이 돼가는 벨라루스의 경제에는 빨간불이 들어왔다는 냉랭한 분석이 이어지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일(현지시간) 지난 한 주간 벨라루스 국영 언론들이 루카셴코에 대한 극찬 일색이었다고 전했다. 한 뉴스 앵커는 루카셴코 대통령을 “슬라브 문명의 피스메이커”라고 불렀고, 한 러시아 TV 평론가는 “러시아의 영웅”이라고 극찬했다.

늘 푸틴의 그림자에 가려져있던 그가 국제 무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로 조명 받게 되자 안방에서 들뜬 반응이 터져나온 것이다.

하지만 벨라루스 야당 정치인들과 국제관계 전문가들은 루카셴코 대통령이 갈수록 푸틴 대통령의 꼭두각시가 돼가고 있을 뿐 아니라 벨라루스가 사회·경제적으로 러시아 종속이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벨라루스의 망명한 야당 지도자 스비아틀라나 치카누스카야는 “푸틴이 없으면 루카셴코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일침했다.

최근 벨라루스 역사 교과서에는 제정 러시아에 대한 기술이 다시 등장했다. 수도 민스크의 거리 표지판에는 벨라루스 라틴 알파벳이 러시아어 문자로 대체되고 있다고 FT는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노골적인 러시아 의존은 경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의 힘을 빌려 2020년 반정부시위를 진압한 이후 최소 2000개의 기업이 벨라루스를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IT 엔지니어들이 대거 탈출에 동참해 폴란드 등지로 이민을 떠났다. 현재 민스크에 남아있는 엔지니어들은 군대에 징집되거나 서방 고객과 연결된 일자리를 잃을까 걱정하고 있다. 한 엔지니어는 프랑스 통신 회사가 폴란드에 정착한 벨라루스인을 점점 더 많이 고용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엔 EU의 수출금지조치로 벨라루스 국영 농기계 제조업체 ‘보브루이스카그로마시’는 이탈리아산 부품을 사용하던 트랙터 트레일러의 관련 부품을 교체하는 방법을 찾는 데 6~10개월이 소요됐다.

가장 최근의 제재는 지난달에 추가됐는데, 영국은 고무, 목재, 금을 포함한 벨라루스산 상품 수입을 금지했다.

또 벨라루스의 농업 공학 센터인 벨라그로멕은 우크라이나에서 수입하던 실린더와 교류 발전기를 더는 수입하지 못하게 되면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개인 무역상을 거치게 됐다. 중개업체를 거치면서 구매비용은 15%가 증가했다.

벨라루스에서 여전히 제조업을 영위하는 극소수의 서방 기업들은 제재를 준수하려는 노력과 러시아 시장의 매력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스위스 기차 제조업체인 스타들러는 민스크 외곽에 위치한 공장에서 1600명이었던 인력을 고용하던 회사였으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200명으로 줄였다.

스타들러는 또한 슬로바키아와 노르웨이가 주문한 열차를 벨로루시에서 만들었다가는 해당 국가 국민들의 반발을 살 것을 염려해 폴란드에서 제조하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산업 뿐만 아니라 금융에서도 벨라루스의 입지는 쪼그라들고 있다.

서방의 국제 대출 기관은 벨라루스에 대한 자금 지원을 중단했으며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은 칼스버그가 소유한 벨라루스 맥주 회사 알리바리아를 비롯한 벨라루스 기업 3곳의 지분을 매각하려 하고 있다.

민스크에 본사를 둔 프라이어뱅크는 최근 은행의 오스트리아 소유주인 라이파이센에 러시아를 포기하라는 제재 동참 압력이 가해지면서 서방 고객들과의 거래가 중단됐다.

이같은 상황에서 러시아 용병 바그너 그룹이 벨라루스에 둥지를 틀려는 계획이 알려지면서 긴장감을 더하고 있다. 이미 바그너 용병 8000여명 중 1000명이 프리고진을 따라 벨라루스로 가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타임스(NYT)는 상업 위성업체 미디어랩의 위성사진을 분석한 결과 지난 26일부터 벨라루스 인근의 군 기지 연병장에 대형 텐트로 추정되는 가건물이 들어섰다고 전했다. 연병장 3만2000㎢의 면적에 6줄로 된 대형텐트로 보이는 임시 구조물이 건립 중이다.

치카누스카야는 벨라루스에 바그너 용병이 있는 것만으로도 지역 안보를 위협하고 있으며 이 전쟁에서의 벨로루시의 역할이 커지고 있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루카셴코는 “벨라루스의 주권을 어느 정도 팔아넘긴 것에 대해 국민들로부터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