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클’ 테너 이용훈, ‘투란도트’로 국내 데뷔
“그 어떤 외국 무대보다 더 떨리고 긴장돼”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빈체로, 빈체로(승리하리라, 승리하리라!)”
가장 히트한 오페라 아리아인 ‘네순 도르마’(Nessun dorma, 아무도 잠들지 말라)의 마지막 가사가 울려 퍼지자, 객석에선 연주가 끝나기도 전에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지난 2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의 인기 아리아를 ‘월드 클래스’ 테너 이용훈이 부르자, 관객들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박수를 쏟아냈다.
서정적이면서 힘찬 음색이 어우러진 테너 이용훈의 첫 한국 무대. 끊이지 않는 박수에 이용훈은 지휘자와 눈을 맞추더니 “한 번 더”라고 말하는 듯한 입모양을 그렸다. 눈치 빠른 관객들이 박수와 함성으로 화답하자, 이용훈도 웃음을 보이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 제스처를 보이고는 다시 ‘네순 도르마’를 시작했다. 연이어 부르는 아리아는 처음보다 더 완벽했다. 음정은 흔들림이 없었고, 감정은 더 깊었다. 투란도트를 끝내 얻게될 것이라는 확신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두 번의 ‘네순 도르마’는 한국에서의 데뷔 무대를 무사히 마친 이용훈의 깜짝 선물이었다. 월드 클래스 테너의 ‘네순 도르마’를 두 번이나 들은 것만으로 ‘투란도트’는 관객 만족도 측면에선 올 하반기 오페라 춘추전국 시대의 ‘승자’가 확실했다.
서울시오페라단의 ‘투란도트’는 테너 이용훈의 데뷔 무대로 개막 전부터 화제가 된 작품이다. 2010년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돈 카를로’를 통해 주역으로 데뷔한 이후 영국 로열 오페라 하우스, 이탈리아 스칼라 극장 등 세계 유수의 무대에서 공연했다. 한국 무대는 프로 데뷔 20년 만에 처음이다.
이용훈의 한국 데뷔는 당초 2024년 예정된 ‘오텔로’였다. ‘투란도트’의 출연은 극적으로 성사됐다. 현재 출연 중인 독일 드레스덴 젬페오페라의 ‘투란도트’가 2주 휴식에 들어갔고, 서울시오페라단의 적극적인 구애로 승낙한 무대였다. 워낙 빽빽한 일정이 이어진 탓에 공연 전주에나 무대에 합류했음에도 이용훈의 칼라프 왕자는 단연 돋보였다. 현재도 같은 작품을 하고 있는 데다, 이미 110~120번이나 칼라프 왕자로 무대에 선 탄탄한 내공이 바탕했기에 가능한 무대였다.
서울시오페라단의 ‘투란도트’는 ‘연극 거장’ 손진책 연출가의 오페라 데뷔작이기도 하다. 무대부터 인상적이었다. 불필요할 정도로 깊고 큰 무대를 가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특징을 현명하게 활용한 무대 디자인은 손진책 연출가가 해석한 ‘투란도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였다. 그는 이 작품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재해석하며 새로운 결말의 ‘투란도트’를 완성했다.
그 과정에서 무대 디자인은 손 연출가의 의도를 여실히 드러냈다. 서양인의 왜곡된 시선으로 그린 고전 원작이 보여준 ‘동양적 판타지’와 ‘중국색’을 배제했고, 독재와 불평등이 존재하는 ‘계급 사회’의 단면을 담아낸 것이다.
거대한 콘크리트로 세워진 구조물은 고대 중국을 배경으로 한 원작과 달리 과거로 회귀한 미래 도시의 하나처럼 보여줬다. 이 구조물은 폐쇄적인 위압적인 모습으로 설계됐다. 권력자 투란도트는 언제나 2층에서 등장하고, 군중은 계단 아래에 자리한다. ‘투란도트’에 참여한 무대미술가 이태섭은 이 무대를 “콘크리트 디스토피아”라고 정의했다.
이 오페라는 사랑을 얻기 위한 ‘생존 게임’이다. 남자들을 증오하는 ‘얼음 공주’ 투란도트와 결혼하기 위한 남자들이 세 개의 수수께끼를 모두 맞춰야 살아남을 수 있다. 하나라도 틀리며 ‘처형’. 모두의 만류에도 이 게임에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칼라프 왕자다. 칼라프는 수수께끼를 모두 맞히고, “자신의 이름을 맞추라”는 수수께끼를 던진다. 칼라프 자신의 목숨을 건 수수께끼다. 이 과정에서 칼라프를 짝사랑하는 노예 류가 희생된다.
오페라에선 칼라프의 등장신부터 인상적이었다. 디스토피아 세계의 구원자처럼 등장한 칼라프 왕자 이용훈은 군중 사이를 오가며 죽음이 내려앉은 도시의 비극을 바라본다. 그의 연기는 자연스러웠다. 군더더기 없는 몸짓과 행동은 칼라프 왕자의 자신감과 당당함을 보여줬다. 노래를 하지 않을 때조차 세계적인 테너의 존재감을 입증했다. 뿐만 아니라 다채로운 감정들을 노래마다 실어보내며 풍성한 소리와 섬세한 기교를 보여줬다. 일부 아리아에서 감정과 호흡을 단호하게 끝맺는 것에 아쉬움도 있었으나, 3000석의 객석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압도적 성량과 서정적인 표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용훈는 공연 직후 “20년 동안 기다렸던 데뷔 무대였다. 해외 일정으로 아직 시차 적응이 안되어 부족한 점도 많고 힘이 들었지만 사랑으로 맞아주시고 반겨주셔서 침 감격적이었다”며 “그 어떤 외국 무대보다 긴장되고 떨렸던 것 같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한국 팬들을 직접 만나니 너무 기쁘고 가슴 설레고 뿌듯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투란도트를 연기한 이윤정과 류 역할의 서선영의 노래도 압권이었다. 서늘하고 날카로운 음색으로 쏟아내는 이윤정의 아리아는 아름답고 차가운 공주 투란도트 자체였다. 이 작품을 “‘숭고한 희생’을 한 류를 향한 헌사”라고 했던 손 연출가의 이야기처럼 무대에선 류의 대사와 노래마다 힘이 실렸다. 서선영은 먹먹하고 애절한 음색으로 ‘들어보세요, 왕자님(Signore, ascolta)’, ‘사랑? 비밀스럽게 남몰래 하는 사랑’을 소화하며 마음껏 기량을 뽐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결말이다. 3막의 ‘류의 죽음’ 장면까지만 쓴 푸치니의 미완성 유작인 ‘투란도트’는 후배 작곡가인 프랑코 알피노가 대신 결말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많은 사람들을 통해 레지테아터(원작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재해석하는 연출)가 시도됐다. 자신을 얻기 위해 찾아온 모든 남자들을 웃으며 사지로 내몬 투란도트가 난데없이 칼라프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 본래의 결말이나, 손 연출가는 다소 충격적인 끝을 그렸다. ‘투란도트의 자결’이라는 결말이다. 원치 않던 사랑에 빠진 투란도트가 칼라프의 이름을 알아낸 뒤 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마침내 칼라프의 이름을 알게 되고 광기어린 눈빛과 미소를 보내는 이윤정의 연기도 이 작품의 명장면이었다.
충격적인 죽음 이후, 투란도트는 새하얀 무대 위 동그란 원 안에서 류와 함께 등장해 “칼라프의 이름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손진책은 “류가 투란도트를 구원하면서 사랑의 승리를 민중의 행복으로 바꾸는 방향으로 연출해보고 싶었다. 견강부회식 해석이 약간 있을 수 있지만 큰 문제없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