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문화재단 ‘M클래식 축제’

피아니스트 김도현 ‘문 소나타’

달빛 주제로 한 일관된 레퍼토리

야외 무대 소란함도 음악으로…

가을의 문턱에 전해진 위로

“설득력 있는 연주 위해 고민”

담백한 위로가 건넨 완전한 치유…김도현의 ‘달에게 부치는 편지’ [고승희의 리와인드]
최근 서울 월드컵공원 수변무대에선 마포문화재단의 여덟 번째 ‘M 클래식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첫 공연 ‘문 소나타(Moon Sonata)’(9월 8일)가 열렸다. 올해 마포문화재단이 도입한 ‘M 아티스트’ 제도의 초대 음악가인 김도현의 두 번째 공연이자, 생애 첫 야외 공연이다. [마포문화재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깊고 검은 호수 위로 제 모양을 잃어가는 하현달이 떠오른다. 물 위에 살포시 앉은 ‘달빛’(드뷔시)은 화려함을 뽐내지 않았다. 고단함이 그득해진 누군가의 곁으로 살며시 다가와 가만가만 어루만진다. 먹먹한 피아노 선율은 한낮의 열기를 덜어내는 밤바람을 움직이고, 호수 위로 그려진 윤슬처럼 잔잔하고 조심스럽게 어깨를 감싸안는다. 피아니스트 김도현이 ‘달에게 부치는 편지’의 첫 장이었다.

가을의 문턱에서 만난 김도현은 섣부른 낭만을 강요하지도, 질척이는 감정을 묻히지도 않았다. ‘담백한 위로’가 건넨 ‘완전한 치유’였다. 최근 서울 월드컵공원 수변무대에선 마포문화재단의 여덟 번째 ‘M 클래식 축제’의 일환으로 ‘문 소나타(Moon Sonata)’(9월 8일)가 열렸다. 올해 마포문화재단이 도입한 ‘M 아티스트’ 제도의 초대 음악가인 김도현의 두 번째 공연이자, 생애 첫 야외 공연이다. 마포문화재단으로도 4년 만에 여는 대규모 야외 공연이었다.

공연장 밖으로 나온 클래식 음악회는 대중 곁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어렵고 낯선 레퍼토리 대신 많은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친숙한 곡이 채워졌다. 선곡 하나 하나가 ‘문 소나타’라는 주제를 향해 일관되게 이어졌다. 프로그램은 마포문화재단과 김도현이 의견이 두루 반영됐다.

저녁 8시, 수변무대의 정취를 살릴 수 있는 ‘달’을 테마로 한 드뷔시의 ‘달빛’과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달밤의 분위기를 담아낸 쇼팽의 ‘녹턴 내림 마장조 9-2’,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1번’이 프로그램으로 먼저 구성됐다. 그런 다음, 야외무대와 잘 어우러질 곡으로 차이콥스키의 소품과 ‘호두까기 인형’ 피아노를 위한 콘서트용 모음곡(플레트네프 편곡)을 골랐다.

잘 알려진 곡을 연주하는 것은 도리어 더 어려운 일이다. 익숙한 만큼 색다른 순간을 만들고, 새로움을 주는 것이 쉽지 않아서다. 김도현 역시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어려운 곡보다도 이 곡들을 매력적으로 연주하는 것이 어려운 작업인 것 같다”며 “어떻게 하면 나만의 방법으로 설득력 있게 연주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준비했다”고 연습과정을 들려줬다.

담백한 위로가 건넨 완전한 치유…김도현의 ‘달에게 부치는 편지’ [고승희의 리와인드]
마포문화재단의 여덟 번째 ‘M 클래식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첫 공연 ‘문 소나타(Moon Sonata)’를 통해 관객과 만난 피아니스트 김도현 [마포문화재단 제공]

드뷔시로 시작해 에릭 사티로…수미쌍관의 무대

이 날의 공연은 촘촘히 짜여진 플롯의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처럼 모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익숙함 속의 다름이 더해져 상념에 빠질 틈이 없었다.

첫 무대는 드뷔시. 달빛이 만들어낸 잔물결처럼 일렁이는 소리들이 따스한 온기로 감싸 안더니, 이내 조금은 화사해진 음색을 담은 희망의 ‘녹턴’으로, 복잡다단한 감정의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로 이어졌다.

‘월광 소나타’에선 베토벤에 충실하면서도, 그 안에 김도현의 색을 넣었다. 1악장부터 3악장까지 이어지는 템포의 변화가 한 사람의 감정 변화를 보여주려는 의도처럼 들렸다.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로 시작하는 1악장에선 셋잇단음표가 균일한 속도로 이어지며, 내면에 ‘감정의 물결’을 만들었다. 2악장은 기존의 ‘알레그레토’보다 조금 느리게 이어졌으나, 도리어 그것이 평안을 줬다. 김도현은 “어두운 분위기에서 밝은 미소를 주고 싶었다”고 했다. 3악장에 이르면 엄청난 속도(프레스토 아지타토)로 내달리며 짙어가는 불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폭풍 같은 질주 속에서도 리듬감을 잃지 않았고, 들쑥날쑥한 소리의 밀당(밀고 당기기)이 초조한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감정의 변화를 추동 엔진 삼아 내달린 마무리는 명쾌했다.

베토벤에 이어 차이콥스키에 이르자, 서울의 가을엔 이국의 감성이 더해졌다. 차이콥스키의 소품 중에선 러시아와 동유럽의 정서가 담긴 곡들로 골랐다. 김도현은 “차이콥스키는 슈만과 쇼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다”며 “특히 쇼팽의 센티멘털한 감성을 음악에 많이 담았는데, ‘호두까기 인형’ 파드되는 쇼팽의 정신이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곡”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김도현의 ‘파드되’ 연주에선 때때로 쇼팽이 들려왔다.

차이콥스키의 소품과 ‘호두까기 인형’에선 그의 강점이 잘 살아났다. 김도현은 다른 시선으로 음악을 바라보고,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연주자이기 때문이다. ‘조금의 다름’은 회색 도시에 등장한 무지개처럼 산뜻한 재미를 안긴다. 되풀이되는 형식을 살며시 비틀어, 미소를 띄게 되는 재기발랄한 연주가 이어졌다. 그는 “반복된 형식 자체가 즉흥적인 것을 추가하라고 요구하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첫 야외 연주회라는 것이 무색할 만큼 피아노의 음색도 자유자재로 다뤘다. 드뷔시에서 쇼팽, 베토벤으로 이어지며 조금씩 변화를 거듭한 소리는 차이콥스키에 이르러 완전히 달라졌다. 전혀 다른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처럼 투명하고 선명한 음색이 습기가 내려앉은 수변무대를 가득 채웠다. ‘호두까기 인형’ 피아노를 위한 콘서트용 모음곡에선 유리구슬처럼 통통 튀어오르는 터치가 기계음향으로 쌓아올린 게임 음악을 듣는 것처럼 흥미로웠다. ‘행진곡’부터 ‘사탕요정의 춤’, ‘러시아 춤’, ‘중국 춤’이 이어질 땐 발끝을 세운 작은 인형들이 건반 위를 깡총거리며 뛰어다녔다. 정교한 리듬감이 눈부신 음색으로 담겨 지루할 틈이 없었다.

에릭 사티의 ‘짐 노페디 1번’은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다음으로 이어질 곡이었지만, 이날 무대에선 가장 마지막 곡으로 순서를 바꿨다. 김도현은 “격정적으로 끝나는 베토벤 이후로 명상적인 잔잔함의 사티보다는 호소하는 목소리의 차이콥스키가 맞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고 귀띔했다. ‘신의 한 수’였다. 드뷔시로 문을 열고 사티로 닫는 두 프랑스 음악가의 곡이 ‘수미쌍관’을 이뤘다. 절제된 멜로디와 깨끗한 화성의 이 곡은 드뷔시가 관현악으로 편곡하기도 했다.

담백한 위로가 건넨 완전한 치유…김도현의 ‘달에게 부치는 편지’ [고승희의 리와인드]
최근 서울 월드컵공원 수변무대에선 마포문화재단의 여덟 번째 ‘M 클래식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첫 공연 ‘문 소나타(Moon Sonata)’(9월 8일)가 열렸다. 올해 마포문화재단이 도입한 ‘M 아티스트’ 제도의 초대 음악가인 김도현의 두 번째 공연이자, 생애 첫 야외 공연이다. [마포문화재단 제공]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연주하는 음악가

김도현은 자신을 연주하는 음악가다. 공연 프로그램은 익히 알려진 곡이었지만, 이 안엔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김도현의 해석과 감성이 빼곡히 채워졌다. 잘 직조된 세계 안에 오래도록 곱씹은 그의 이야기는 따뜻하고 포근했다. 또 한 번 진화하고 성장한 음악가의 현재를 보여준 자리였다.

무수한 고민으로 자신만의 음악을 찾아가며 스스로를 치유해온 그의 연주는 누군가의 불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앙코르 곡이었던 슈베르트-리스트의 ‘리타나이’와 모차르트 ‘K332 2악장 아다지오’까지 이르면 ‘온전한 위로’가 차곡차곡 채워졌다. ‘리타나이’는 김도현이 이날의 연주 중 가장 흡족하게 표현한 곡이라고 했다.

야외에서 열린 피아노 연주회엔 온갖 변수가 출몰했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에선 안내 방송이 나왔고, 저녁 산책을 나온 가족들의 기분 좋은 소란함, 아이들의 울고 웃는 소리, 사이렌 소리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그 모든 소음 앞에서도 김도현과 관객들은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소음이 더해지다 모든 것이 잦아든 순간 음악은 빛났고, 간간이 들고 나는 수선스런 변수 역시 오롯이 음악이 됐다.

모든 공연에 임하는 그의 마음은 한결같다. “귀한 시간을 내서 찾아온 관객들에게 기쁨을 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 기쁨엔 감동과 위로, 행복 등 다양한 감정이 담겼다. 이번 공연에서도 음악으로 전하고 싶은 그의 마음이 온전히 전달됐다.

김도현은 “혹시라도 관객 분들이 방해를 받을까 걱정했는데 지나고 보니 이 또한 추억이 되지 않을까 싶다”며 “안 좋은 상황에서 연주하는 것을 즐긴다. 이런 경험이 한 번 있으면 다음에 어떤 일이 있어도 크게 당황하지 않을 거 같아 감사한 경험이었다”고 돌아봤다.

올 한 해 그는 어느 때보다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 9월만 해도 ‘문 소나타’ 야외 무대를 시작으로 예술의전당 11시 콘서트(9월 16일),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9월 22일, 부천아트센터)와의 협연이 이어지고 있다. 공연마다 슈베르트·라벨·베토벤·라흐마니노프·차이콥스키·포레 등 여러 작곡가를 연주한다.

그는 “올해는 내게 도전인 해”라며 “습관처럼 굳어진 방식을 바꿔 좀 더 좋은 소리를 내는 방법을 공부하며 공연을 준비해왔다”고 말했다. 요즘엔 음악에 대한 접근 방식을 바꿨다. 우나 코르나(피아노 주법에서 약음 페달을 밟으라는 지시)를 쓰지 않으면서 이상적인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작곡가의 음악을 시도하고, 어떻게 하면 한 호흡으로 노래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연습 중이다. 기교에 집중하기 보단 어떤 음악을 만들고 담을지를 더 염두한다.

스스로는 “아직은 찾아가고 있는 단계”라며 “언젠가는 더 자유롭게 연주하고 성장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노력의 결과는 이미 무대로 증명되고 있다. 다양한 연주 일정에서 김도현의 음악은 더 깊은 빛을 발한다. 그의 음악이 들려주는 ‘위로의 힘’이 상당하다.

김도현은 “예전엔 몰랐던 것들이 음악에 대한 접근방식을 바꾸며 조금은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100%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스승이신 세르게이 바바얀 선생님이 생각하는 좋은 음악에 다가선 느낌”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