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삿포로)=이정아 기자] “우리 지역의 맥주 축제는 세계 3대 맥주 축제인 일본 ‘삿포로 오도리 비어 가든(삿포로 맥주 축제)’, 중국 ‘칭다오 국제 맥주 축제’, 독일 ‘옥토버페스트’에 버금가는 행사가 될 것입니다.”
국내 각 지역 맥주 축제를 연 고위 공무원들이 입 모아 하는 말입니다. 실제로 코로나19 엔데믹 이후 첫 여름 대목을 맞아 국내 곳곳에서 맥주 축제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맥주 축제가 열리는 지역만 해도 부산·인천·광주·예산·전주까지 사실상 전국을 아우르는데요. 그런데 면밀히 들여다보면, 맥주 축제가 어째 맥주 축제가 아닌 듯 보입니다. 정작 맥주는 수단에 불과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맥주도 판매’하는 맥주 축제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지방자치단체가 경기침체로 어려운 시기에 지역경제 활성화를 꾀한 전략으로 맥주 축제를 낙점한 것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캔맥주를 따서 플라스틱 컵에 담아서 판매하는 한 맥주 축제에서, 앉을 자리를 일부러 적게 만들어 5시간 동안 서서 맥주를 마시게 만든 또 다른 맥주 축제에서, 맥주 축제를 한 철 장사로 생각하고 3배가량 비싼 값에 안주를 판매하는 맥주 축제에서, 맥주 그 자체를 오롯이 즐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맥주가 주인공…“깊고 진한 맛 감동받게” 기획 1순위
안타깝지만 글로벌 ‘3대 맥주 축제’로 꼽히는 삿포로 맥주 축제는 조금 다릅니다.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 중심에 위치한 오도리공원 5~11초메에서 여름 한 달간 열린 삿포로 맥주 축제 현장을 이달 중순 찾았습니다. 1954년 시작된 삿포로 맥주 축제는 국내 맥주 축제의 모티브가 된 대표적인 행사입니다. 올해 방문자 수도 88만6000여 명에 달했습니다. 지난해에 비해 185% 늘어난 수치입니다. 방문자가 가장 많았을 때(2006년)에는 무려 152만3000명이 찾았습니다.
70년가량 매년 여름에 열린 오랜 역사를 보여주듯, 삿포로 맥주 축제에는 다양한 국적의 방문객이 축제에 참여했습니다. 이 축제에서 한국인을 비롯해 같은 동양권인 중국·홍콩·대만인은 물론 서양권인 미국·벨기에·영국인까지 만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인인 셰던(31) 씨는 “삿포로 맥주 축제를 즐기기 위해 일부러 기간을 맞춰 일본 여행을 왔다”고 말했습니다. 도쿄에서 온 일본인 테츠야(27) 씨도 “대학 친구들과 함께 참여하기 위해 축제 일정에 맞춰 삿포로로 놀러 왔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비행기를 타고 삿포로 맥주 축제까지 오게 만든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각자 저마다 이유가 있었겠지만, 분명한 공통점이 보였습니다. 삿포로 맥주 축제의 주인공인 핵심 상품(Key Product)은 단연 맥주였다는 점입니다. 축제 공간과 채워진 콘텐츠까지 ‘일본=맥주’ 브랜드 포지셔닝이 분명했다는 것이죠. 실제로 삿포로 맥주 축제에서는 한정으로 맛볼 수 있는 생맥주가, 각각의 특성에 맞는 전용 유리잔에 담겨,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국내 맥주 축제에서는 보기 어려운 광경입니다.
기린·산토리·삿포로·아사히(가나다순), 일본 4대 맥주기업 모두 삿포로 맥주 축제에서 생맥주를 판매했습니다. 특히 산토리는 올해 캔으로만 출시한 신제품인 ‘산토리 나마(生)’를 생맥주로 한정 판매했습니다. 아사히는 일본 현지에서도 생맥주로 마시기 어려운 ‘마루에프 흑맥주’를 한정으로 선보였습니다. 삿포로는 ‘삿포로 클래식 생맥주’를 판매했죠. 모두 삿포로 맥주 축제에서만 만날 수 있는 희귀한 맥주라는 점이 일맥상통합니다. 그런데도 가격은 500㎖ 한 잔 기준으로 500~700엔(약 4500~6300원)이었습니다. “맥주의 깊고 진한 맛을 느끼고 감동하도록, 그래서 우리의 팬이 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삿포로 맥주 축제에 참가한 일본 산토리 관계자의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었습니다.
‘맥주에 진심’이라는 점은 또 다른 태도에서도 보여집니다. 생맥주가 필스너와 바이젠이라고 불리는 전용 유리잔에 각각 담겼다는 점입니다. 유리잔을 일일이 수거하고 세척해야 하는 번거로움보다 생맥주를 청량하고 깔끔하게 즐기는 것을 우선순위로 두고 기획됐다고 분석되는 이유입니다. 이는 플라스틱 컵에 맥주를 판매하는 한국의 맥주 축제와 크게 대비되는 대목이었습니다.
음미할 만한 맛을 지닌 맥주는 유리잔에 따라 마셔야 합니다. 이산화탄소를 일부러 날려 보내고, 까칠한 느낌을 완화시킨 뒤에 마셔야, 맥주의 색깔과 거품을 더 잘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 산토리 관계자도 “모든 주류는 명품 전용 유리잔으로 제공됐다”며 “플라스틱 컵보다 유리잔이 고양감을 불러 일으키고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바야흐로 가슴이 설레야 지갑을 여는 ‘팬덤 경제’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에 발맞춰 국내 지역 축제를 전 세계적으로 알리기 위해서는 각 지자체가 내세울 수 있는 ‘진짜 강점’이 무엇인지 먼저 깊게 고민해 봐야 합니다. 별다른 차별점 없이 도시 곳곳에서 우후죽순 열리는 국내 맥주 축제로는 우리만의 강점을 찾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들떠서 두근거려야 축제를 찾습니다. “우리 지역의 맥주 축제는 일본 삿포로 맥주 축제, 중국 칭다오 국제 맥주 축제, 독일 옥토버페스트에 버금가는 행사가 될 것입니다.” 고위 공무원들의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