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부소니 콩쿠르 1, 2위
진화하는 두 연주자의 음악세계
박, 철저한 분석으로 직조한 음악
김, 자기 감성으로 설득력 있는 연주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피아노 앞에서 비로소 자유로웠다. 콩쿠르의 무게를 내려놓은 두 명의 피아니스트는 매일 조금씩, 꾸준히 진화했다. 이들은 관객들에게 새로운 예술가의 ‘등장’과 ‘성장’을 마주하게 했다. 2021년 제 63회 페루초 부소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나란히 1, 2위에 오른 두 한국인 피아니스트 박재홍(24), 김도현(29)이다.
클래식 음악계 전문가들은 “두 사람이 같은 콩쿠르에서 만난 것은 어쩌면 비극”이라고 말한다. 콩쿠르라는 제도와 그 안에서의 순위 경쟁 때문이다. 이를 걷어내면 이 둘은 각각 한 사람의 음악가로 오롯이 존재한다. 콩쿠르 이후 지난 2년을 보내며 두 사람은 각자가 추구하는 ‘음악의 길’로 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말과 행동에 그 사람이 드러나듯, 연주엔 음악가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다. 박재홍 김도현이 그렇다.
자기 감성으로 설득력 있는 ‘음악 세계’ 만든 김도현
고난도 테크닉을 구사해야 하는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 허명현 음악평론가는 ‘밤의 가스파르’는 “물의 생생한 움직임을 재현하기 위해 극한의 테크닉을 보여주면서도 라벨의 상상력을 펼쳐내는 것이 관건인 곡”이라고 말했다.
김도현의 ‘밤의 가스파르’가 표현하는 ‘물의 요정’(1악장 온딘)은 음울의 물 위를 거닐며 시작됐다. 무수히 많은 음표들이 쏟아질 때마다 요정은 건반 위로 정확히 착지해 첨벙첨벙 물을 튀겼다. 1악장은 2, 3악장으로 나아가는 ‘빌드업’에 불과했다. 그는 스토리텔링 능력이 탁월했다. 악보가 한 장 한 장 넘어갈수록 ‘물의 요정’은 괴물의 본색을 드러내며 악몽 같은 물보라(3악장 스카르보(요괴, 교활한 요정))를 일으켰다. 아찔했다. 악보에 갇혔던 ‘물의 요정’이 튀어나와 활보하자, 무대는 물에 잠겼다.
피아니스트 김도현은 마포문화재단의 ‘올해의 M아티스트’로 선정, 지난 13일 리사이틀을 가졌다. ‘M 아티스트’로 선보이는 첫 무대였다.
‘재창조에의 열정’을 주제로 한 연주회 프로그램은 김도현이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힘으로 구성했다. 프로그램을 직접 만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지만, 이 안엔 김도현이 추구하는 음악의 지향점과 하고 싶은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겼다.
프로그램의 1부는 어렵지 않았다. 클래식 애호가가 아니라도 익히 들어봤을 슈베르트의 가곡이 흘렀다. 리스트가 편곡한 버전이다. “청중들의 입장에서 보다 와닿는 대중적인 작품”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연주하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김도현의 방향성이 투영됐다.
아름다운 선율의 ‘리타나이(위령기도)’로 마음의 안식과 위로를 준 뒤엔, 휘몰아치는 격정(‘물 위에서 노래함’)이 불어닥쳤다. 김도현은 그의 스승인 세르게이 바바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기술적인 부분에서 바바얀이 강조한 것 중 하나는 ‘노 본스(No Bones)’. “온 몸에 힘을 다 빼고 심장에서의 감정을 손끝으로 가져간다는 상상”(김도현)을 하면서 건반을 누른다. 그의 연주에서 손은, 그저 거들 뿐이다. 건반 위로 내려앉는 손가락의 터치가 깃털처럼 가벼우면서도 단단한 밀도가 채워졌다.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마왕’, ‘송어’는 전혀 다른 얼굴로 관객과 만났다. 다이내믹하고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만든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은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었다. 한 곡 안에 너무도 많은 감정이 담겼다. 모든 음표에 대한 사랑을 담아 한 겹 한 겹 쌓아올리는 소리로 단조로운 피아노는 오케스트라를 듣는 것처럼 풍성한 음향을 만들었다.
연주회의 대미를 장식한 곡은 라벨의 ‘라 발스’였다. 무대와 객석 사이에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그의 능수능란한 밀당에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중장거리 달리기와 100m 달리기를 오가다, 끝내 전력질주로 몰아쳤다. 모든 연주를 마치자 김도현의 머리카락은 흠뻑 젖었고, 얼굴 위로 땀 방울이 툭툭 흘러내렸다. 김도현은 악보 속에서 그려진 무수히 많은 음표들의 총체였다. 예측불가능한 우주였고, 어디로 휩쓸릴지 모르는 블랙홀이었다. 그의 무대는 언제나 그 누구도 아닌 김도현이다. 이날 마침내 관객은 전에 없던 새로운 음악가의 탄생을 목도했다. 피아노 앞에선 무엇도 김도현을 막을 수 없었다.
허명현 평론가는 “김도현은 어떻게 연주해야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며 “본인만의 감성이 확고하면서도 그것을 설득력있는 음악으로 풀어내는 재능이 있는 연주자”라고 했다.
꼼꼼한 분석으로 직조한 ‘우아한 음악’ 박재홍
베토벤 피아노 작품 중에서도 ‘난곡’으로 꼽히는 3대 후기 피아노 소나타는 피아니스트에게 고통스러운 곡일지도 모른다. 이 곡을 온전히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들려주는 과정에 이르는 길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50대의 베토벤이 쓴 세 곡은 젊은 피아니스트의 이지적인 해석과 함께 되살아났다. 정갈하고 단정하면서, 감정 낭비를 하지 않는 우아한 세계였다.
박재홍은 지난 1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2023 세종 체임버 시리즈를 통해 베토벤 후기 소나타로 관객과 만났다.
이날의 베토벤엔 박재홍이 음악을 대하는 자세와 관점이 고스란히 투영됐다. 지난해 가을 본지와의 인터뷰 당시 박재홍은 “원래는 아폴론적인 관점에서 곡을 해석했는데 점점 디오니지안이 돼가고 있다”고 했다. 어떤 곡 앞에서 큰 그림을 그리고, 중심을 잡아두는 기둥울 세운 뒤 그 안에서 본능을 일깨운다. 이 과정에서 박재홍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작곡가가 보이는 연주와 오리지널리티”다. 한 명의 작곡가와 하나의 악보를 온전히 탐색한 뒤, 그 위로 자기만의 색과 이야기를 더한다.
베토벤이 말년에 쓴 후기 소나타 세 곡(30번, 31번, 32번)은 인터미션도 없이 이어졌다. 박재홍의 베토벤은 깊은 고뇌의 산물이었다. 그는 악보를 통째로 집어삼킨 뒤, 음표 하나 하나를 선명히 내놓고, 그 위로 자신의 색을 칠해 나갔다. 음악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는 피아니스트의 모습도 그려졌다. 스스로 “가장 위대한 소나타라고 생각하는 작품”과 베토벤에 대한 예우였다.
연주는 때때로 1인칭이면서, 때로는 3인칭이었다. 어떤 때는 베토벤의 두 자아를 무대에서 풀어낸 것처럼 보였다. 악보를 완전히 체화한 그의 음악은 작곡가의 내면에 깊숙이 들어갔다가 이내 빠져나와 그를 바라보며 위로의 손을 내밀었다. 한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쓴 자서전 같은 음악은 놀랍도록 담대하고 섬세하게 그려졌다.
30번의 2악장에서 3악장으로 넘어갈 때의 완전한 몰입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위대한 음악가의 고단한 생과 깊은 감정을 가져오면서도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소리를 다듬었다. 31번에선 선명하고 담백하게 선율을 전달했다. 3악장에 이르러 깊이 남겨진 상처를 꺼내와 그것으로 고뇌하는 모습까지 그렸다. 32번에 이르면 지적인 피아니스트가 직조한 세계와 마주한다. 과장하지 않으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내고, 그 안에서 날개를 펴 자신의 본능을 담아냈다. 쉼없이 이어온 연주를 마친 뒤 들려준 앙코르까지 완벽했다. “앙코르까지 프로그램처럼 짜는 것을 좋아한다”는 그는 바흐(프렐류드 B단조, BWV 855a)와 브람스(Intermezzi, Op. 117 - No. 1 in E-Flat Major)를 선곡했다.
허명헌 평론가는 “박재홍은 피지컬 요소 때문에 대형 작품들을 아주 잘 소화하는 피아니스트로 알려져 있는데, 그런 음악은 물론 사실 어떤 피아니스트보다도 섬세한 음악을 하는 연주자”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