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아트센터 발트 앙상블 협연

모차르트·쇼팽 협주곡 연주

조성진, ‘사계절의 사랑’ 노래한 ‘피아노 앞의 지휘자’ [고승희의 리와인드]
조성진과 발트 앙상블 [성남문화재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사계절의 사랑이야기였다. 아름답고 아득한 첫사랑의 기억이었다.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 봄날의 따뜻한 설렘, 여름날의 싱그러운 만남, 무르익은 가을만큼 깊어진 갈등, 계절의 끝에 마주하는 시련. 열아홉 살 쇼팽의 첫사랑을 향한 기억이 애틋하게 되살아났다. 피아노 앞에서 계절이 남긴 사랑을 연주하던 피아니스트는 싱긋 웃기도 하고, 슬픔을 감춘 채 실연을 감내하기도 했다.

25일 경기 성남아트센터에서 열린 조성진과 발트앙상블의 공연을 찾은 50대 관객 이지숙 씨는 공연의 마지막곡으로 연주한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공연을 마치고 이 씨는 “너무나 애절하고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조성진, ‘사계절의 사랑’ 노래한 ‘피아노 앞의 지휘자’ [고승희의 리와인드]
조성진과 발트 앙상블 [성남문화재단 제공]

K-클래식 열풍의 주역 조성진이 오랜만에 국내 팬들과 만났다. 베를린 필하모닉, 뉴욕 필하모닉 등 국내외 유수 악단들에 활동하고 있는 젊은 연주자들의 음악 하나로 뭉친 발트 앙상블과 함께다. 불과 1분 만에 전석 매진된 공연이다.

이날 공연에서 조성진은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들려줬다. 연주자가 한 공연에서 협주곡 두 개를 연주하는 것에는 엄청난 집중력과 스태미너가 요구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성진은 모든 곡을 ‘첫 곡’인 것처럼 수월했고, 이 곡이 마지막인 것처럼 뜨거운 격정이 공존했다.

조성진, ‘사계절의 사랑’ 노래한 ‘피아노 앞의 지휘자’ [고승희의 리와인드]
조성진과 발트 앙상블 [성남문화재단 제공]

1부에서 들려준 곡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9번. 즐거운 시작이었다. 허리를 곧추 세우고 앉은 조성진은 산뜻한 걸음으로 건반 위를 옮겨갔다. 현악기와 주고 받는 같은 선율이 명랑했다. 지나치게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모차르트였다. 이 곡은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주고 받아 당시로선 파격적 형식의 협주곡으로 여겨졌다. 조성진과 발트앙상블의 대화는 다정했다. 조성진은 피아노 앞에 앉아 몸을 돌려 앙상블을 바라보고, 눈짓으로 신호하며 호흡을 맞췄다.

2악장은 모차르트가 쓴 최초의 단조 악장이다. 맑은 소리 뒤로 감춰진 슬픔이 고개를 내밀었다. 조성진은 2021년 1월 모차르트가 열일곱 살 작곡한 94초 분량의 미발표곡을 세계 최초로 연주할 당시 도이치 그라모폰의 소개 영상에서 “오페라처럼 이야기를 품은 듯한 느낌이 모차르트의 매력”이라고 했다. 2악장이 그런 곡이었다. 미뉴에트를 연상케 하는 3악장으로 접어들면 조성진의 모차르트는 단정하면서도 풍성한 색채를 만들었다. 화려하지 않은 발트 앙상블의 연주는 조성진의 연주를 더욱 빛냈다.

조성진, ‘사계절의 사랑’ 노래한 ‘피아노 앞의 지휘자’ [고승희의 리와인드]
조성진과 발트 앙상블 [성남문화재단 제공]

2부에 연주한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쇼팽 인생의 ‘최초의 대작’으로 꼽히는 곡이다. 잘 조화를 이룬 현악 파트로 시작되는 연주는 ‘초(CHO)팽’(쇼팽+조성진을 합친 말)의 귀환을 알렸다. 명료하면서도 풍성하고, 화려하지만 소박한 조성진의 쇼팽은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모차르트를 연주할 때와는 자세부터 달라졌다. 화려한 손놀림도 허리를 곧게 펴고 쉬운 곡을 연주하듯 미소를 짓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어깨가 움츠러들 때마다 복잡다단한 음표들이 건반 위로 떨어졌고, 그것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손가락은 서서히 파동을 일으켜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지휘자가 없던 무대에서 조성진은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 무대의 ‘마에스트로’였다. 발트 앙상블과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이어가면서도, 악기 파트마다 시선을 맞추며 소통하고 교감했다. 조성진은 자신이 그린 큰 그림을 피아노라는 악기로 지휘했고, 현악 앙상블은 그 그림을 빛나게 하며 퍼즐처럼 제자리로 맞춰 들어갔다. 조성진의 쇼팽은 나날이 무르익어 확신의 깊이를 더했다. 누구라도 설득 당할 무대였다.

조성진, ‘사계절의 사랑’ 노래한 ‘피아노 앞의 지휘자’ [고승희의 리와인드]
조성진과 발트 앙상블 [성남문화재단 제공]

연주를 마치고 조성진은 발트 앙상블 단원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눴다. 앙코르 곡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 2악장. 앙코르까지 끝낸 뒤에도 몇 번의 커튼콜이 이어졌다. 박수는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조성진은 발트앙상블의 악장인 이지혜(독일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제2바이올린 악장)에게 ‘이제 들어가자’고 신호하기까지 했다. 악장의 마음은 달랐다. 이지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관객들의 마음을 대신 전했고, 그러자 조성진은 바이올린을 빼앗아 퇴장하며 연주하는 흉내까지 냈다. 나날이 상승한 조성진의 잔망 레벨에 객석에선 기어이 함성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