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주경기장 콘서트
세대 초월한 3만 5000명 운집
55주년 역사 담아낸 명곡 향연
노래·연주·연출의 삼박자 완성
가로 125m· 세로 27m 전광판
중앙제어 방식의 무료 응원봉
통일감 살린 세련된 연출 미학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가왕의 시간’은 누군가에겐 추억이고, 누군가에겐 ‘일생’이다. 데뷔 55주년을 맞은 2023년, 잠실주경기장에서의 여덟 번째 단독 콘서트에서 내리 세 곡을 연속으로 부른 뒤 꺼낸 첫 마디도 그랬다.
“여러분과 평생을 함께 했어요. 제 나이가 몇인 줄 아시죠? 오십 다섯이에요. 아직 괜찮습니다.”
‘재미없기로 소문난’ (‘찰나’ 가사 중) 가왕식 농담에 세대를 초월한 팬들은 동그란 응원봉을 흔들며 아낌없는 환호를 보냈다. 손에 쥐고 놓치 않는 같은 빛깔의 응원봉이 가왕을 향한 한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부터 2023년 최신곡인 ‘필링 오브 유’(Feeling of you)까지…. 지난 13일 서울 송파구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에서 막을 올린 ‘2023 조용필 & 위대한 탄생 콘서트’엔 가왕의 55년사가 유유히 흘렀다.
명불허전 ‘공연 장인’…55년사 아우른 25곡의 향연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가왕(歌王)’으로 불릴 수 있는 뮤지션.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청년의 음악’을 하고 있는 조용필(73)의 무대가 막을 올렸다.
88서울올림픽 전야제를 통해 잠실 주경기장 무대에 선 이후로 올해로 여덟 번째다. 2003년 35주년 공연을 시작으로 지난 20년간 총 일곱 번의 단독 공연은 모두 전석 매진 신화를 작성했다. 매순간 경이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진행형 전설’의 무대는 역시나 명불허전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공연 마스터’다운 순간들이 이어졌다. 불과 5개월 전인 지난해 12월 ‘K-팝 성지’로 불리는 케이스포 돔(옛 체조경기장)에서 총 4만 명의 관객과 만난 공연과도 완전히 달라진 무대 연출과 세트리스트의 향연이었다.
이날의 첫 곡은 최근 5년 사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선곡이었다. ‘오늘의 공연’이 ‘미지의 세계’로의 초대라도 되는 것처럼 쉴새없이 터지는 불꽃과 레이저로 공연의 서막은 열렸다. 스팽글 정장을 입고 무대에 등장한 조용필은 “오늘 저하고 같이 노래하고 춤 추고 마음껏 즐기자”며 본격적인 출발을 알렸다.
공연은 노래, 연주(사운드), 연출의 삼박자가 완벽한 합을 이뤘다. 두 시간을 꽉 채운 25곡의 세트리스트는 팬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았다. 공연에선 데뷔 55주년을 맞아 발매한 신곡부터 시대를 초월한 불후의 명곡들이 이어졌다.
“하도 안 부르니 항의가 온다”며 선곡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50주년 콘서트 이후 5년 만에 다시 불렀고, 1980년 솔로 1집 수록곡인 ‘창밖의 여자’를 비롯해 “TV에선 한 번도 부른 적 없지만” 콘서트의 단골 레퍼토리로 자리잡은 ‘잊혀진 사랑’, 대중음악 최초의 ‘응원 구호’인 ‘꺅’ 소리의 비명이 등장하는 ‘비련’도 선곡했다. “지난해 콘서트에선 부르지 못한 곡이 많다”며 들려준 ‘친구여’ 역시 50주년 콘서트 이후 다시 부르는 곡이었다. 세대를 초월한 히트곡인 ‘모나리자’, ‘단발머리’, ‘꿈’, ‘여행을 떠나요’가 이어질 땐 3만 5000명의 세대를 초월한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서 떼창과 함성으로 응답했다. 특히 ‘여행을 떠나요’ 기타 솔로 직전 가왕이 위대한탄생의 리더인 최희선을 호명, “희선아”라며 바통을 넘기는 장면은 이날 공연의 ‘킬링 포인트’였다.
조용필 팬클럽 위대한탄생의 윤석수 회장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음악으로 시대와 트렌드를 이끌면서도, 위로와 희망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이 가왕 음악의 가장 큰 힘이다”라고 말했다.
명장면도 연출됐다. 음정, 박자 한 번 놓친 적 없는 가왕은 아직은 찬바람이 몰아치는 오월의 주경기장 무대에서 콧물과 싸웠다. 앙코르 곡인 ‘바운스’ 무대에선 콧물을 훔치다 첫 소절을 놓쳤다. 멋쩍은 듯 환하게 웃는 가왕의 모습까지 또 하나의 역사로 기록됐다. 초대가수도 없이 스물 다섯곡을 소화하면서도 가왕은 흔들림이 없었다. 앙코르 무대까지 마치곤 “더 하고 싶다”며 아쉬움을 비쳤다. 음악과 함께인 가왕은 여전히 청춘이었다.
폭발적 밴드 사운드·가로 125m 거대한 영상
가왕의 여전한 가창력을 든든히 받쳐준 것은 폭발적인 밴드 사운드였다. 위대한 탄생은 주경기장에 최적화된 사운드로 디자인해 풍성한 음향을 들려줬다.
직전 공연과는 달라진 점도 있었다. 조용필과 위대한탄생의 리더인 최희선(기타)은 “멜로디 라인을 최대한 심플하고 깔끔하게 다듬었다”며 “한결 정리된 음악으로 담백하면서도 명료한 기타 연주를 들려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특히 ‘태양의 눈’에서의 기타 연주는 강렬한 록과 클래식을 접목한 기타 연주로 이전 공연과는 차별점을 뒀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에선 피크가 아닌 핑거 스타일의 연주로 “따뜻한 느낌을 살렸다”고 한다.
현재의 위대한탄생 멤버 중 최희선 이태윤 최태완은 1993년 합류,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윤석수 회장은 “팬들은 가왕과 그의 밴드인 위대한 탄생을 똑같이 생각하며, 같은 마음으로 좋아하고 지지한다”며 “조용필 형님께선 30년을 함께 하는 밴드의 역할과 그 중요함을 잊지 않아 매공연 세계적인 수준의 공연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30주년을 맞은 위대한탄생은 올해 기념 공연도 기획 중이다.
콘서트마다 새로운 트렌드와 미학을 만들어온 조용필의 공연은 이번에도 영상과 연출의 진수를 보여줬다. 가로 125m, 세로 27m의 거대한 아치형 LED 전광판 안엔 모든 노래마다 각기 다른 볼거리가 담았다. 노래의 장르와 가사, 분위기에 딱 맞아 떨어지며 개연성이 높아졌다는 점이 지난해 연말 공연과의 차이점이었다. 8K 초고화질의 대형 화면이 담아낸 영상들은 미디어 아트를 방불케 했다. ‘바람의 노래’에선 잎새 하나 남지 않은 겨울나무가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라는 가사와 함께 푸르른 오월의 잎을 피웠다. 광활한 아프리카 초원을 내달린 ‘세렝게티처럼’, 88서울올림픽 당시 영상을 브라운관 화면으로 담아낸 ‘서울 서울 서울’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화려했지만 다소 조악했던 케이스포돔에서의 공연과 비교하면 완성도는 한결 높아졌다.
가왕의 통 큰 결단…3만 5000개의 무료 응원봉
‘연출 미학’의 화룡점정은 K-팝 공연의 상징인 응원봉이었다. 이번 공연에선 응원봉을 자체 제작, 모든 관객에게 무료로 배포했다. K-팝 그룹들이 보통 3~5만원 정도에 판매하는 응원봉을 3만 5000명에게 ‘공짜’로 제공하는 것에 가요계에서도 적잖게 놀랐다. 한 대형기획사 관계자는 “최근의 응원봉은 콘솔에서의 중앙제어 방식 기술로 기본 원가와 자재비가 높다. 무료 배포는 기획사의 입장에서도 쉽지 않은 결정이다”라며 “공연의 완성도와 팬들을 위한 마음이 느껴지는 엄청난 결단이다”라며 놀라워했다.
응원봉 하나로 공연장은 통일감이 생겼다. 응원봉과 영상의 색깔이 짝을 맞추는 장면들은 압권이었다. ‘못 찾겠다 꾀꼬리’에선 영상과 응원봉이 블루와 핑크, 노란색으로 색깔을 맞췄고, 시시각각 노래마다 점멸하며 시각적 아름다움을 더했다.
팬들 사이에서도 응원봉에 대한 요구는 있었다. 앞서 케이스포돔이나 지방공연 등 1만 석 정도 규모의 공연에선 팬클럽 위대한탄생에서 막대기 형식의 야광봉을 만들어 무료로 배포하기도 있다. 윤석수 회장은 “K-팝 그룹처럼 우리도 공연에서 통일된 그림을 보고 싶어 기획사에 한 번 해보자는 이야기를 했다”며 “가격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지도 이야기가 오갔는데 아예 무료로 배포해 선물할 줄은 몰랐다. 팬들도 너무나 놀랐다”고 말했다.
응원봉의 제작과 무료 배포는 가왕의 결단이었다. 공연기획사 인사이트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55주년을 맞는 공연에서 팬들에게 전하는 특별한 이벤트로 응원봉을 준비했다”고 귀띔했다.
조용필은 오는 27일 대구 스타디움 콘서트로 올 상반기 공연 일정을 마무리한다. 소속사 YPC에 따르면 하반기에도 전국투어를 예정하고 있다. 올해 안엔 정규 앨범 20집도 발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