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오, 에오에…(중략) 구름 한 점 없이 예쁜 날, 꽃향기만 남기고 갔단다.” (블랙핑크 지수 솔로곡 ‘꽃’ 중)
몽환적인 보컬이 사라진 자리에 복잡한 음표가 내려앉는다. 생소하고 이질적인 현대음악 같기도 하고, ‘절대 반지’를 찾아 떠나는 판타지 영화 같기도 하다.
2분 55초 짜리 K-팝이 10분을 훌쩍 넘긴 ‘오르간 대곡’으로 다시 태어났다. 블랙핑크 지수의 첫 솔로 앨범의 타이틀곡 ‘꽃(FLOWER)’이다. “모든 곡은 오르간으로 연주할 수 있다”던 오르가니스트 올리비에 라트리의 말이 다시 한 번 증명됐다.
지난 16일 저녁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선 6년 만에 내한한 올리비에 라트리의 리사이틀이 열렸다.
올리비에 라트리의 리사이틀은 관객과 호흡하는 이벤트가 많다. 공연 시작 전 홀 앞에서 즉흥연주로 듣고 싶은 ‘신청곡’을 받는다. 제목을 적거나 악보를 미리 붙여두는 식이다. 6년 전 한국 공연에선 ‘국민 메신저’ 카카오톡 알림음과 ‘애국가’의 즉흥 연주로 떼창을 연출했다.
관객들이 붙인 포스트잇과 악보 앞에서 한참을 고민한 라트리는 그의 모국어인 불어로 적힌 ‘꽃’과 ‘어버이 은혜’를 골라 오르간으로 향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곡의 매시업이 시작됐다. 지수의 ‘꽃’과 ‘어머님 은혜’ 주제에 의한 즉흥곡(Improvisation on the theme of ‘Flower (JISOO)’ & ‘Mother of Grace’)이다.
시험 삼아 시작한 첫 연주. 맑고 청량한 소리로 연주한 첫 부분은 ‘꽃’의 도입부였다. 핑거 스냅을 떠올리게 하는 소리에 몽환적인 지수의 보컬이 시작되는 부분이다. 사랑스러운 멜로디 라인으로 몸풀기를 한 뒤 본격적인 즉흥 연주가 시작됐다.
사실 ‘꽃’은 K-팝 댄스곡 치고는 독특한 사운드의 베이스에 미니멀한 편곡이 어우러진 곡이다. 이 노래의 핵심은 지수의 중저음 보컬이기도 하다. 특히나 서정적인 가사와 ‘꽃향기를 남기고 갔단다’라고 마무리하는 중독성 강한 훅(Hook) 파트가 ‘관건’이었던 곡. 이미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노래이기도 하다.지난 3월 31일 공개된 이 곡의 뮤직비디오는 이미 유뷰트에서 2억뷰를 넘었고, 세계 최대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 스포티파이에선 1억회를 달성했다.
‘어버이 은혜’와 매시업해 다시 태어난 오르간 버전의 ‘꽃’은 완전히 신세계였다. 노래는 ‘신비로운 모험극’으로 다시 태어났다. 다재다능한 소리를 내는 오르간 버전의 ‘꽃’은 짧은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처럼 박진감이 넘쳤다.
라트리는 원곡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다른 색깔로 해석했다. 한 음 한 음에 복합적인 감정이 더해졌다. 모험을 떠날 때의 두려움, 한 치 앞을 앞 수 없는 불길함, 그러면서도 새로운 세상에 당도할 것만 같은, 하지만 길고 험난한 여정으로 인한 ‘고단한 희망’이 쌓였다. 모험이 위험해질수록 ‘꽃’ 향기는 옅어졌다. 지수의 ‘꽃’이 이토록 위험천만한 노래였나 싶을 때 다시 익숙한 첫 음을 반복해 꽃향기를 되살린다. 5분에 가까운 모험이 이어진 뒤, ‘어버이 은혜’의 익숙한 멜로디가 툭 튀어나온다. 모험에 위험만 있을 순 없는 법. 고생 끝에 찾은 동굴 속 신비의 오아시스 같은 기묘한 분위기였다. 꽃향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생각할 무렵 ‘꽃’의 주제음이 다시 등장했다. 라트리도 “꽃향기만 남기고” 떠났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걸그룹’이라는 수사를 안고 다니는 블랙핑크는 프랑스에서도 엄청난 팬덤을 자랑한다. 올초엔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영부인 브리지트 마크롱 여사가 이끄는 자선 단체의 콘서트에서 피날레를 장식, 현지를 발칵 뒤집었다. 지난해 12월 파리에서 연 단독 공연도 성황리에 마무리돼 오는 7월엔 현지 최대 규모 공연장인 스타드 드 프랑스(Stade De France)에서 앙코르 공연을 갖는다. ‘프랑스 블링크(블랙핑크 팬덤)’에겐 프랑스 출신으로 노트르담 대성당에 역대 최연소로 임명된 전속 오르가니스트이자 세계적인 연주자가 라트리가 지수의 ‘꽃’을 연주한 이 장면이 무척 특별한 순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날 공연에서도 즉흥연주를 마치자 객석에선 뜨거운 함성과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공연을 마친 라트리는 롯데콘서트홀 관계자를 통해 “유명한 K-팝인지 모르고 곡을 뽑았다”며 연주 소감으로는 “잇 워즈 오케이(It was Okay)”라고 쿨하게 답하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