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유진 기자] “나이키, 아식스, 컨버스까지 다 신었는데…북산고엔 어째서 아디다스를 신은 선수가 없을까?”
슬램덩크 극장판 열풍에 이끌려 천왕들의 농구화 모델명을 찾아보다 불쑥 떠오른 의문이다. 1980년대 미국 NBA 시장을 제패하며 글로벌 정상을 차지한 나이키의 전설 같은 역사에 그 답이 있다.
‘디펜딩 챔피언’ 독일 아디다스는 어쩌다 혜성처럼 등장한 미국 나이키에 왕좌를 내주게 됐을까. 슬램덩크 속 북산과 산왕처럼 스포츠웨어 업계의 숙명의 라이벌로 자리잡은 나이키와 아디다스 이야기를 따라가보자.
히틀러의 ‘베를린 올림픽’ 등에 업은 아디다스…'유럽 패권' 핵부상
브랜드 런칭 초기부터 탄탄대로를 걸은 건 아디다스였다. 아디다스는 1920년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아돌프 다슬러와 루돌프 다슬러 형제가 20㎡ 안팎의 좁디좁은 어머니 세탁실에 차린 수제 공장에서 탄생했다.
이들 형제가 잡은 일생일대의 기회는 다름 아닌,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국민들에게 스포츠를 장려하는 히틀러 정권 분위기 속에 성장을 거듭해 온 아디다스는 올림픽을 발판 삼아 전 세계 소비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나이키의 ‘스타 마케팅’ 역시 아디다스가 먼저였다. 아디다스는 베를린 올림픽 당시 남녀 100m 메달리스트가 된 독일의 아더 요나트, 미국의 빌 헬미나를 후원해 세계인에 눈도장을 찍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이후 런던 올림픽이 열린 1948년엔 아디다스의 상징인 ‘삼선’(三線) 디자인과 브랜드 상표 등록까지 마치며 승승장구했다. 아디다스의 전성 시대를 위협하는 나이키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이키 만든 건 8할이 농구왕?…1980년대 중반 ‘조던 시리즈’ 완판 행진
아디다스가 점령한 1970년대 미국 스포츠 시장. 나이키의 초창기 존재감은 미미했다. 1964년 출범한 나이키는 초기엔 일본 신발 오니츠카 타이거 러닝화를 수입해 판매하며 스포츠 용품 시장에 입문했다. 그러다 1972년이 돼서야 신발 생산자로 거듭난다.
후발주자 나이키의 운명을 바꾼 건 NBA 농구스타 마이클 조던과의 만남이었다. 마이클 조던은 1984년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농구 스타에서 프로로 전향하며 아디다스와 후원 계약을 맺길 바랐지만, 독일 경영진의 생각은 달랐다. 198cm의 마이클 조던보다 20cm가 크고 센터 포지션을 맡은 카림 압둘 자바를 후원하기로 한 것.
마이클 조던을 후원하지 않기로 한 결정은 훗날 아디다스 역사에 두고두고 뼈아픈 후회로 남는다. 1970~80년대 미국 스포츠 시장 주름잡던 아디다스의 위상은 ‘조던 시리즈’ 출시 이후 급격히 추락한다.
1990년대 사로잡은 슬램덩크…나이키 전성기를 만나다
나이키가 마이클 조던의 이름을 따 1985년 첫 선을 보인 ‘조던 시리즈’는 초대박이 난다. 마이클 조던은 1990년대 두차례 리그 3연패 달성하며 커리어 하이를 기록한다.
1990년 주간 소년 점프 42호로 연재를 시작한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농구 만화 ‘슬램덩크’ 속 북산고등학교 농구팀 역시 ‘나이키’ 에어 조던을 가장 많이 신었다. 일명 북산의 색인 빨강색과 검정색이 활용된 모델들이 주를 이룬다.
당장 원작 주인공인 ‘농구 천재’ 강백호가 에어 조던 6 ‘인프라레드’, 에어 조던 1 하이 ‘블랙/레드’를 신었다. 여주인공 채소연을 사이에 두고 경쟁 구도를 형성한 농구 엘리트 서태웅의 농구화는 에어 조던 5 ‘파이어 레드’다.
나이키 외엔 그보다 앞서 농구화 시장을 주름 잡았던 컨버스가 눈에 띈다. 극장판 ‘더 퍼스트 슬램덩크’ 서사의 주인공인 송태섭은 컨버스 엑셀레이터 미드, 북산고 농구팀 주장 채치수는 컨버스 프로 컨퀘스트 하이를 신었다.
아쉽게도 아디다스를 신은 북산 캐릭터는 코트 위엔 없다. ‘흰머리 호랑이’으로 불리는 안한수 농구부 감독만 아디다스 프로 모델을 신었다. 1970년대까지는 NBA 선수 중 상당수가 아디다스 농구화를 신었던 점을 고려하면, 나이 지긋한 안 감독이 아직까지 아디다스를 애용하는 이유도 어림짐작 할만하다.
한편 나이키의 성공을 목도한 아디다스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몇 해 전 헬기 추락사고로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NBA 스타 코비 브라이언트와 계약도 해봤고, NBA 유니폼 후원 공세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 농구화 소매시장 90%를 장악한 나이키는 이미 범접할 수 없는 고지를 점한 뒤였다. 사실상 슬램덩크가 1996년 27호로 연재를 마칠 때까지 농구화 시장은 나이키와 리복의 양강 구도가 뚜렷했다.
세계 패권국으로 거듭난 미국 시장을 제패한 로컬 브랜드 나이키의 전성시대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2000년대 들어 벌어진 격차로 인해 나이키의 2021년 매출은 55조5767억원으로, 아디다스(28조 6902억원)의 두 배 수준까지 올라섰다.
NBA ‘농구화 강자’ 넘겨준 아디다스…스포츠웨어 패권도 유럽서 미국으로
무너진 아디다스의 자존심은 ‘아디다스의 심장’으로 불리는 축구 종목이 지키고 있다. 아디다스는 레알 마드리드를 비롯한 ‘엘리트 클럽’ 유니폼 시장을 장악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바이에른 뮌헨, 유벤투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아스날 등이 아디다스를 입고 뛴다. 아디다스의 전 세계 매출 1위 매장도 레알 마드리드 홈 구장에 세운 전용 스토어일 정도로 축구팀 마케팅은 톡톡한 효과를 봤다.
다만 축구 시장에서도 나이키의 아성은 아디다스를 맹렬히 추격 중이다. 지난해 카타르 월드컵 본선 진출 32개국 중 13개국 대표팀이 나이키 유니폼을 입었다. 아디다스 유니폼을 입고 뛴 국가는 7개 뿐이다. 월드컵 공식후원사로 나선 아디다스에겐 씁쓸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아디다스의 쓰린 속을 달래 준 건 리오넬 메시(파리 생제르맹)가 속한 아르헨티나 대표팀이다. 아디다스를 입은 아르헨티나는 나이키 유니폼을 입은 프랑스를 꺾고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나이키 vs 아디다스, 명동서 붙었다…승리는 어디?
글로벌 1위를 나이키에 내준 아디다스지만, 패션에 민감한 국내 소비자들의 아디다스 사랑은 유별나다. 글로벌 시장에서 매출로는 두 배 가까운 체급 차이가 나지만, 국내 시장 점유율은 단 1.2%포인트 차이다. 심지어 아디다스가 앞선다. 아디다스는 10년 전인 2012년에는 나이키를 제치고 국내 스포츠 시장 점유율 1위로 올라선 이후 최근까지 왕좌를 지키고 있다.
아디다스의 국내 선전에는 ‘패션’에 민감한 국내 소비자의 취향이 반영돼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블랙핑크 멤버 제니가 착용해 품귀현상을 빚었던 삼바부터 포럼 로우, 가젤, 슈퍼스타 등은 스포츠웨어가 아닌 일상복에 쉽게 어우러져 사랑을 받았다.
숙명의 라이벌 나이키와 아디다스는 올봄 서울 한복판 명동에서 격돌한다. 아디다스가 지난달 18일 ‘나이키 서울’에서 불과 도보 5분 거리인 엠플라자에 지상 2층 전체 면적 2501㎡(약 757평) 크기의 ‘아디다스 BFS’(브랜드 플래그십 서울)을 오픈했기 때문이다. 이는 2021년 8월 먼저 문을 연 2300㎡(약 700평) 크기의 ‘나이키 서울’을 압도하는 규모다.
아시아 패션 트렌드를 선도하는 한국, 아시아 관광객의 발길을 사로잡은 명동에서 승기를 잡게 될 브랜드는 어느 쪽이 될까. 두 브랜드의 자존심 걸린 대결이 한국 소비자의 손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