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버리(Burberry)의 새로운 앰버서더 전지현(왼쪽). 버버리 타탄체크(오른쪽).[버버리 홈페이지]

[헤럴드경제=김유진 기자] 선선한 가을 출근길. 엇비슷한 트렌치 코트 입은 사람들이 한 무더기 쏟아져 나온다. 개성 어필용은 아니지만 직장 전쟁터로 가는 길에 전투복을 입는 거라 생각하면 이만한 맞춤옷도 없다.

대일밴드, 호치케스, 미원, 레고…. 특정 브랜드가 물건의 ‘대명사’가 되는 경우가 있다. 어떤 쓰임을 가진 상품을 최초로 선보여 그 기억이 대중들에 오래 각인되고, 그 브랜드가 대를 이어 명맥을 이어갈 때 드물게 벌어지는 일이다.

국내에서 그런 ‘경지’에 오른 명품 브랜드로는 사실상 ‘버버리’(Burberry)가 유일하다. 버버리의 일본식 발음 ‘바바리’는 트렌치 코트를 부르는 어르신들의 또 다른 명칭이 됐다. 입말로 완벽하게 굳어진 ‘바바리맨’이란 단어는 또 어떤가.

일교차가 심한 가을, 옷장에서 트렌치 코트를 꺼내며 전투용 의복으로 시작한 일명 ‘바바리’ 이야기를 따라가봤다.

‘바바리’에 주렁주렁 달린 ‘이것’…“그냥 장식 아니었어?”

버버리에 주렁주렁 달린 ‘이것’…수류탄 걸이였다고?[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버버리 트렌치 코트는 여성용도 한쪽 가슴팍에 천을 덧댄 건 플랩(gun flap)이 달려있다(왼쪽 사진). 장총 개머리판에 원단이 마모돼 찢어지기 쉬운 부위를 두 겹으로 만들었다. 벨트 뒤에 달린 금속 재질의 D링(오른쪽 사진)은 군인들이 수류탄 등을 매달 수 있도록 고안됐다. 보다 자세한 각 명칭별 용도는 기사 본문 참조.[버버리 홈페이지]

일명 ‘바바리’로 불리는 트렌치(Trench·참호) 코트는 영국의 전투복으로 개발됐다. 엄밀히 말하면, ‘타이로켄(Tielocken)’이라는 코트가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전투복으로 변형되면서 ‘트렌치 코트’가 완성됐다.

영국의 버버리사(社)는 트렌치 코트의 등장 전까지 타이로켄 코트 제작에 주력했다. 이는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영국 육군 장교를 위한 코트를 제작해달라는 전쟁청의 의뢰로 만든 것이었다.

버버리에 주렁주렁 달린 ‘이것’…수류탄 걸이였다고?[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왼쪽은 버버리 트렌치 코트의 전신인 타이로켄 코트 광고. 단추 대신 허리띠로 옷을 고정했다. 어깨 견장, 소매 스트랩 등 트렌치 코트의 디테일이 추가되기 이전의 형태다. 디테일이 추가된 트렌치 코트(오른쪽)과 비교하면 타이로켄 코트의 단순함을 알 수 있다. 우측 사진 속 트렌치 코트 차림 사내는 영화 ‘카사블랑카’(1942) 속 험프리 보가트. [게티이미지]

타이로켄 코트는 '더블 브레스티드(Double-breasted·상의 좌우 앞·판을 겹쳐 잠금)' 여밈이라는 점에서 트렌치 코트와 같지만, 단추가 아닌 허리띠로 고정하는 형태의 레인코트였다.

문제는 허리를 띠로 묶는 디자인의 치렁치렁한 코트가 흙바닥에서 뒹구는 군인들에겐 그다지 편한 옷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버버리에 주렁주렁 달린 ‘이것’…수류탄 걸이였다고?[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타이로켄 코트 자료 이미지(왼쪽), 20세기 버버리 타이로켄 광고(오른쪽).[패션전문자료사전] [버버리]

이에 버버리는 전장(戰場)에서의 실용성을 고려해 단추와 어깨 견장, D링, 건 플랩 등 디테일을 추가하는 재작업에 나선다. 단순한 레인코트 형태였던 타이로켄이 비로소 50만 영국군이 ‘참호(Trench)’에서 입는 전투복으로 변신한 순간이다.

이때 추가된 디테일의 용도를 알면 버버리 트렌치 코트를 보며 “이게 뭔데 달려있지” 싶었던 부분들이 이해가 된다.

버버리에 주렁주렁 달린 ‘이것’…수류탄 걸이였다고?[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남성용 트렌치 코트. 왼쪽 사진은 어깨 견장과 왼쪽 가슴팍에 달린 건플랩(gun flap), 옷깃에 부착된 스로트 래치(throat latch) 디테일을 보여준다. 오른쪽 사진엔 옷 뒷면에 달린 작은 케이프, 허리띠와 이에 부착한 금속 재질의 D링이 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추가됐던 디테일이 버버리 트렌치 코트가 일상복으로 자리 잡은 뒤에도 여전히 구현한 모습.[버버리 홈페이지]

어깨 견장에는 군인 계급표를 달 수 있고, 등허리를 지나는 허리춤에 달린 D링은 수류탄 등 군용 물품을 매달 수 있었다. 오른쪽 가슴에 덧대어진 건 플랩(gun flap)은 오른손 잡이 병사들의 코트가 장총 개머리판에 마모돼 찢어지지 않도록 도왔다.

옷깃 안쪽에 달린 스로트 래치(throat latch, 목 덮개)는 옷깃을 올린 채 고정하는 역할을 해 비바람을 막아줬다. 사용하지 않을 땐 앞쪽으로 늘어뜨려 연출할 수도 있다. 소매에 추가한 스트랩은 비오는 날 소매춤으로 빗물이 새어오지 않도록 단단히 조이는 역할을 했다. 뒷면의 주름 잡힌 작은 망토(cape)는 등허리를 따라 흐르는 경사각을 만들어 빗물이나 진흙이 쉽게 흘러내릴 수 있도록 디자인 된 것이다.

1960년대 한국 상륙한 트렌치…“키 작고 다리 굵은 한국 여성은 허리띠 묶어야” 기사도

버버리에 주렁주렁 달린 ‘이것’…수류탄 걸이였다고?[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트렌치 코트를 입은 할리우드·프랑스 배우들. 왼쪽부터 알랭 들롱, 메릴 스트립, 캐서린 드뇌브와 장 폴 벨몽도, 브래드 피트와 맷 데이먼. [게티이미지]

전후에도 트렌치 코트의 인기는 계속됐다. 일상의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잡은 트렌치는 1940년대부터 50년까지 버버리에게 전성기를 선물했다. 할리우드에서는 영화 ‘카사블랑카’(1942) 속 험프리 보가트를 필두로 오드리 햅번 등 여배우들까지 트렌치 패션을 선보이며 유행을 주도했다.

국내에는 이 유행이 비교적 늦게 상륙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폐허가 된 한반도에서 트렌치 코트의 유행은 사치였다.

국내에선 1960년대에 들어 확산하기 시작한 트렌치 코트를 당시 언론은 일본에서 부르던 발음 그대로 ‘바바리’(バーバリー)로 소개했다. 트렌치 코트가 한국에서만 그 별칭 ‘바바리’를 얻게 된 시초였다. 바바리가 트렌치 코트 류의 대명사의 지위를 얻게 되면서, 후일 코트 속 알몸을 열어보이는 노출증 남성을 일컫는 말도 코트맨이나 버버리맨이 아닌 ‘바바리맨’으로 굳어졌다.

버버리에 주렁주렁 달린 ‘이것’…수류탄 걸이였다고?[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바바리’를 소개한 1960년대 신문기사들. 1960년 9월 29일자 동아일보 기사.(왼쪽). 1966년 10월 6일자 매일경제 기사(오른쪽). 매일경제 기사는 “코트는 바바리·스프링·레인 등으로 나누어지나 우리나라에서는 거의가 구별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입고 다니지만 이중에서도 제일 많이 입는 것이 바바리 코트로서 아무 때나 입고 다닌다”고 소개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1960년 9월 29일자 동아일보에 올라온 「라그랑·스타일」의 소매 유행되는 「바바리·코트」 기사에는 당시 갓 싹을 틔운 트렌치 코트의 유행을 언급한 대목이 등장한다. 트렌치 코트라는 명칭 대신 ‘바바리 코트’라는 명칭을 쓰면서다.

기사는 “이삼년 이래 우리나라에 바바리 코트가 대유행이다. 바바리 코트는 입어서 편하고 속옷이 덜 더러워질 뿐 아니라 스포티하고 서민적인 멋이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바바리 코트는 반드시 밴드를 매야 한다. 키가 작고 다리가 굵은 한국 여성은 더구나 통 두루마기처럼 입으면 더욱 키가 작아 보이기 때문이다”라는 촌철살인도 빼놓지 않았다.

안감에 쓰던 패턴이 가방·스카프로…버버리 상징된 ‘체크’ 무늬

버버리에 주렁주렁 달린 ‘이것’…수류탄 걸이였다고?[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버버리 체크 스커트. 2019년 한국갤럽이 전국 만 13세 이상 남녀 1700명을 대상으로 '가장 좋아하는 명품 브랜드'를 조사한 결과, 버버리는 4%로 5위에 이름을 올렸다. 1위부터 4위인 샤넬(17%), 구찌(16%), 루이비통(13%), 프라다(7%)와 비교하면 저조한 존재감이다. [버버리 홈페이지]

버버리 트렌치의 또 다른 특징은 안감으로 사용한 체크 패턴이다. 스코틀랜드의 전통 문양인 ‘타탄 체크’에서 유래한 버버리 체크는 1920년대 레인코트 안감으로 처음 사용된 뒤, 1960년대 이후 여행용 가방, 우산 커버, 캐시미어 스카프 등에 폭넓게 적용됐다.

버버리 고유의 체크무늬는 지난 1998년 국내 특허청에 상표등록을 마쳐 상표권을 반영구적으로 가지게 됐다. 국내에서 비화한 ‘버버리 소송전’의 서막이 열린 건 이때부터다.

버버리에 주렁주렁 달린 ‘이것’…수류탄 걸이였다고?[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닥스 총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뤽 구아다던(Luc Goidadin)이 취임 후 처음으로 선보인 ‘2022 봄여름 시즌 프레젠테이션’. [헤럴드경제DB]

버버리는 2013년 LG패션(현 LF)의 ‘닥스’가 판매한 체크셔츠를 문제 삼았다. 버버리가 LG패션을 상대로 낸 상표권 침해금지 등 청구 소송은 상표권을 가진 버버리가 사실상 판정승을 거둔 사례로 기록돼 있다. 당시 LG패션은 법원의 강제조정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버버리에 3000만원을 지급했다.

절치부심한 결과일까. 그로부터 8년 뒤인 지난 2021년 LF는 총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로 버버리 출신인 디자이너 뤽 구아다던(Luc Goidadin)을 영입한다. 브랜드 재정비 프로젝트를 버버리 출신에게 맡긴 것. 영국 본토에 브랜드 정체성을 두고 체크 패턴 신경전을 벌여온 두 브랜드가 향후 어떤 차별점을 가지고 시장을 공략할 지 관심이 쏠리는 대목이다.

브랜드 무덤 된 버버리 체크…교복에서도 퇴출 수순

버버리에 주렁주렁 달린 ‘이것’…수류탄 걸이였다고?[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영국 의류브랜드 '버버리'가 문제삼은 익산 원광정보예술고등학교 여학생 교복. [원창학원 홈페이지]

버버리는 대기업인 LG패션 외에도 국내에서 전방위적 소송전을 벌였다. 속옷 브랜드 쌍방울은 물론, 당시 애견용 의복 제작업체 등을 상대로도 소송을 걸며 특유의 체크 무늬를 사수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가장 최근에 불똥이 튄 곳은 국내 교복업체다. 버버리는 2019년에는 이들 업체가 제작한 교복에 버버리 체크와 유사한 패턴이 사용된 점을 문제 삼았다. 옷깃이나 소매 등 일부, 또는 여학생 교복 치마 전체가 버버리 체크와 유사한 경우 등 전국 260여개교 교복이 문제 소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국내 교복제작업체는 버버리와 유사한 체크패턴 원단을 2023년부터 퇴출하겠다고 선언하며 사태를 일단락 지었다. 내년 신입생부터는 버버리 체크가 없는 새로운 디자인의 교복을 제작하기로 했다.

버버리로선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체크 패턴이지만, 현장에선 ‘이참에 앓던 이 뽑았다’며 퇴출을 반기는 반응도 나왔다. 블랙 앤 화이트를 선호하는 10대 학생들 사이에서 버버리 체크의 선호도가 높지 않은데다, 국내 중고교 교복이 체육복·생활복 스타일의 편안한 일상복으로 교체되는 수순이었기 때문이다.

‘뉴보테가’ 만두백·카세트백 잇는 유행템, 버버리에서도 나올까?

버버리에 주렁주렁 달린 ‘이것’…수류탄 걸이였다고?[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버버리 TB 모노그램. 버버리 창립자 토마스 버버리(Thomas Burberry)의 이니셜인 T와 B를 패턴화 했다. 2018년엔 영입한 지방시 출신인 리카르도 티시(Riccardo Tisci)는 부임한 지 5개월 만에 가장 먼저 하우스의 클래식한 로고와 모노그램 패턴을 확 바꿔버렸다. [연합]

국내 젊은 층에 고루한 ‘교복 체크’로 자리잡아 버린 버버리, 이젠 그 이미지 탈피에 성공할 수 있을까?

1900년대 중반 글로벌 전성기를 누린 버버리는 이후 본토에서 골머리를 앓게 된다. 영국에서 저질스러운 ‘차브(chav·교육수준이 낮은 젊은이 중심의 맹목적 유행 추종자)’ 문화의 상징으로 자리잡으며 이미지를 구긴 탓이다.

일례로 영국판 동네 일진 차브족은 버버리 체크무늬 야구모자를 줄기차게 착용했다. ‘그런 애들 브랜드’로 이미지가 고착화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버버리는 급기야 해당 모자 생산을 중단하기도 했다.

쇠락의 길을 걷던 버버리는 2000년대 들어 구찌와 지방시 디자이너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하며 쇄신을 거듭했다. 2001년엔 구찌 수석 디자이너였던 크리스토퍼 베일리(Christopher Bailey), 2018년엔 지방시 출신인 리카르도 티시(Riccardo Tisci)를 크리에이티브 최고 책임자(CCO) 자리에 앉혔다. 좋게 말하면 클래식 하고, 나쁘게 말하면 고루해진 브랜드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함이었다.

버버리에 주렁주렁 달린 ‘이것’…수류탄 걸이였다고?[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10월 3일 버버리가 리카르도 티시 후임으로 임명한 크리에이티브 최고 책임자(CCO, chief creative officer) 다니엘 리(상단). [게티이미지] . 보테카 베네타 클러치백(하단 왼쪽)과 카세트백(하단 오른쪽). [보테가 베네타]

특히 버버리가 지난 10월 3일 새롭게 영입한 크리에이티브 최고 책임자(CCO, chief creative officer)를 향한 세간의 기대감은 크다. 직전 보테가 베네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약했던 영국 디자이너 다니엘 리는 조형미 넘치는 ‘뉴보테가’ 스타일을 선보여 MZ 세대 사이에서도 메가 히트를 쳤다. 일명 ‘만두백’으로 불린 클러치백과 속이 패딩처럼 빵빵한 가죽을 교차한 디자인의 ‘카세트’ 백이 그의 안목으로 탄생한 작품이다.

업계는 다니엘 리가 지난해 11월 취임 3년 만에 보테카 베네타를 떠나 자리를 옮긴 데 주목하고 있다. 브랜드의 성공을 뒤로 하고 버버리로 뛰어든 만큼, 자신만만한 밑그림이 있었던 것 아니겠냐는 관측이다.

그의 손을 거쳐 달라질 버버리는 어떤 모습일까? 다니엘 리의 첫 버버리 컬렉션이 공개되는 2023년 2월 런던패션위크에 업계의 이목이 쏠리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