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유진 기자] #. 직장인 A(가명·37) 씨는 첫 아이 100일에 수백만원을 '태웠다'. 맞벌이 부부가 심사숙고 해서 예약한 강남권 스튜디오 촬영비는 200만원. 해외직구 사이트에서 명품 브랜드의 아기용 배냇저고리도 50만원대에 구입했다. 저고리 전체를 덮은 명품 로고가 부담스럽지만, 아기가 입으니 밉지 않고 귀엽다. “간직했다가 우리 딸 아기 낳으면 주자”는 아내 말을 들으니 나름 의미도 있는 것 같다. 둘째 계획이 없는 그들에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내 아이의 100일’, 우리 사회에 흔해지는 풍경이다.
700만원 코트·80만원 보디수트·105만원 책가방…불티나게 팔린다
아동용 명품,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다만 이들이 겨냥한 ‘아동’의 연령대가 계속 낮아지고 있는 건 최근의 일이다.
신호탄은 루이비통이 쏘아올렸다. 루이비통이 지난 3일 전 세계 일부 매장에서 베이비 컬렉션을 동시에 출시하며 ‘VIB’(Very Important Baby) 업계 경쟁에 불을 붙였다. 루이비통이 이달 공개한 베이비 컬렉션은 명품 브랜드 최초로 ‘3개월~12개월’ 아기를 위한 패션잡화를 집중적으로 선보이며 눈길을 끌었다.
기존 아동용 명품이 만 5세에서 13세 아이들을 위한 제품군 생산에 주력했다면, 이젠 100일만 갓 지나도 입을 수 있는 명품 옷이 쏟아진다.
최근 넷플릭스 화제작인 ‘더 글로리’ 속 박연진(배우 임지연 분)의 딸 하예솔도 신생아 시절 배냇저고리부터 구찌로 입는다. 작고 소중한 사이즈의 보디수트의 가격은 한화로 약 80만원(550유로)에 달한다. 초등학교 1학년으로 성장한 예솔이가 하굣길에 매고 나온 ‘란도셀(일본 책가방 브랜드)’ 스타일 책가방 가격도 30만원으로 고가다.
드라마 밖으로 눈길을 돌리면 눈이 휘둥그레지는 아동용 명품이 즐비하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부르넬로 쿠치넬리' 키즈가 판매하는 '양가죽 바이커 재킷'은 742만원에 책정됐으며,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 손녀가 입어 유명세를 탄 '몽클레르 키즈' 라인 패딩 가격은 200~300만원을 훌쩍 넘긴다. 이밖에 버버리칠드런의 백팩은 105만원, 베르사체 키즈 샌들 가격은 40만원 상당이다.
10년만에 달라진 세상…부모·조모·이모·고모 "우리 애는 날 때부터 명품"
어느새 익숙해진 아동용 명품, 언제부터 흥하기 시작했을까.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들이 국내 아동용 명품 시장에서 경쟁 구도를 형성한 건 비교적 최근이다. 버버리 등 브랜드가 일찌감치 1988년부터 키즈 라인을 생산했하고 있었지만, 본격적인 국내 론칭은 2010년대 들어서다. 구찌나 펜디 등이 한발 앞서 2010년대 초반에 국내 시장을 겨냥했고, 2010년대 후반기엔 지방시, 몽클레르, 겐조 등이 들어왔다.
‘더글로리’ 속 예솔이가 입은 아동용 구찌 옷은 비교적 일찍 국내에 상륙했다. 구찌는 2011년 롯데백화점 본점에 홍콩에 이어 두번째 키즈 단독 매장을 오픈한 적이 있다. 극중 구찌 보디수트가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손녀에게 주는 선물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백화점 명품관에서 구입할 수 있었던 구찌가 등장하는 건 어느 정도 자연스럽다.
상대적으로 역사가 긴 명품 브랜드인 버버리 등이 1980년대부터 키즈 라인을 생산했지만 영유아 보다는 5세 이상 아동을 위한 제품에 주력했다.
‘아이 있는 집=돈 있는 집’…공식 됐다
명품 키즈 브랜드의 고성장은 아동복 시장도 급성장시켰다.
한국섬유산업연합회에 따르면 국내 아동복 시장 규모는 2020년 9120억원에서 2022년 1조2016억원으로 31.75% 성장했다. 같은 기간 국내 전체 패션 시장이 40조3228억원에서 45조7789억원으로 13.53% 확대되는데 그친 것과 대조적이다.
부유층 부모를 둔 자녀는 가장 강력한 잠재 소비자이기도 하다. 한국경제연구원이 2010년부터 2019년 9년간 출산가구의 소득계층을 분석한 결과, 아이 있는 집 가운데 소득 상위층의 비중이 대폭 확대됐다. 출산 가구 가운데 소득 상위층에 속하는 비중은 2010년 46.3%에서 2019년 54.5%로 늘었다. 반대로 출산율 하락폭은 소득하위층에서 가장 컸다. ‘아이 있는 집=돈 있는 집’이라는 공식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빨라지는 생애 첫 명품 소비 시기 역시 베이비 명품 시장에 주목하게 하는 이유다. 컨설팅업체 베인앤드컴퍼니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Z세대의 첫 명품 구매 시기가 밀레니얼 세대보다 3~5년 가까이 빠른 약 15세라고 분석했다. 소득 없는 미성년자들이 무슨 돈으로 명품을 샀을까? 10대 명품 소비의 뒤편엔 부유층 부모들의 구매력이 자리잡고 있다. 보고서는 ‘알파’ 세대(현재 13살 이하)의 명품 소비 비중이 커지는 2030년엔 명품 소비층 3명 중 1명을 Z세대 이하 연령에서 차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스몰 럭셔리+'디깅' 마케팅…태초 기억, '잠재적 고객' 끈
당장 베이비 명품의 주 소비자인 3040 세대의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경제적 안정을 이룬 뒤 느지막이 첫 아이를 본 부모들 가운데 여력만 된다면 자식에겐 아낌없이 쓰겠다는 이들이 늘었다. 성인용 명품에 비해 아동용 럭셔리 제품의 가격대가 낮고 세일이 잦은 점도 이들의 소비 장벽을 낮추는 요인 중 하나다.
업계는 베이비 명품 시장이 이른바 ‘스몰 럭셔리’(작은 돈으로 누리는 사치)와 ‘디깅(Digging·좋아하는 분야는 아낌없이 투자하는 소비행태)’ 마케팅의 교집합이라고 말한다. 허리띠를 졸라맨 가계부에서도 마지막까지 남겨두는 보루가 아이 관련 지출인 만큼, 아이를 위해선 가격을 따지지 않고 사주고픈 마음을 파고들어(디깅) 또다른 의미의 스몰 럭셔리 시장을 키워간다는 의미다.
앞다퉈 아동용 명품을 쏟아내는 럭셔리 브랜드들의 행보는 미래 충성고객이 될 어린 소비자들에게 브랜드를 각인시키고 이들을 선점하기 위한 투자다.
“신생아를 위한 제품이 루이비통과 고객 사이의 끈끈한 정서적 연결고리가 될 겁니다. 어린 시절 경험한 상징적인 순간 하나하나가 평생의 기억이 되기 때문이죠”. 태초의 기억부터 함께 하겠다며 베이비 컬렉션을 내놓은 루이비통의 포부가 영리해 보이는 이유다.
해외 로열패밀리의 선택은?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 값비싼 가격표로만 보여줄 수 있는 걸까?
역설적으로 해외 내로라 하는 로열 패밀리들은 ‘대놓고 명품’인 아기 용품은 오히려 고사하는 추세다. 영국 왕실의 왕자와 공주들이 착용해 이목을 끈 아이템 중 상당수가 평범한 아이들도 쉽사리 입고 두를 수 있는 가격대에 포진해있다.
2018년 영국 윌리엄 왕세자와 캐서린 미들턴의 장녀인 샬롯 공주는 유치원 등굣길에 캐드키드슨 백팩을 선보였다. 1993년 영국 런던에서 시작한 캐드키드슨은 다양한 문양을 가진 방수 원단을 활용해 가방, 우비 등 잡화류를 생산하고 있다. 이 브랜드의 아동용 백팩 가격은 6만원 안팎이다.
샬롯 공주의 오빠인 조지 왕자가 갓 태어난 동생을 처음 보는 자리에서 착용한 셔츠와 반바지 세트 역시 115달러(약 15만원)로 비교적 합리적 가격대다. 영국 아동복 브랜드 ‘레이첼 라일리’(RACHEL RILEY)는 다른 럭셔리 브랜드처럼 비싼 옷을 팔진 않지만 왕실의 후광을 입고 다른 의미의 프리미엄 브랜드 반열에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