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유진 기자] 한 사람의 생애가 영화가 되기 위해선 몇 가지 드라마적 요소가 필요하다. 꿈, 사랑, 도전, 좌절, 승리, 영광, 그리고 죽음 같은 것들.
그렇다면, 스피드광(狂) 엔초 페라리(Enzo Anselmo Ferrari, 1898~1988)가 살다 간 아흔 해의 생애는 그 자체로 이미 영화다. 영화 ‘대부’ 속 마피아를 연상시키는 선글라스로 시선을 가린 채 막말을 일삼고, 보라색 잉크를 채운 만년필로만 서명하던 괴팍한 남자. 포드와 람보르기니 창업주의 분노를 유발해 스포츠카 업계의 부흥에 불을 지핀 사나이. 그를 따라 슈퍼카의 제왕 ‘페라리’(Ferrari)의 스키드 마크(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았을 때 노면에 생기는 타이어 흔적)를 뒤쫓아보자.
트럭 몰던 이탈리아 소년가장…‘스쿠데리아 페라리’ 전설을 쓰다
“스티브 잡스만큼 엄격하고 나폴레옹처럼 무자비하다. 마키아벨리보다 본능적으로 교묘하고, 희랍 비극 같다가도, 유머를 잃지 않는 셰익스피어의 오페라 같다. 그의 이야기엔 사랑, 죽음, 야망, 자동차 경주, 인생을 바친 헌신, 배반, 혁신, 피, 땀, 눈물이 있다”. (영국 GQ 제이슨 바로우)
1898년 이탈리아 북부 모데나에서 한 소년이 태어났다. 10살이 된 이 소년은 1908년 볼로냐에서 본 자동차 경주(Circuito di Bologna)에 매혹돼 일평생을 자동차에 바치기로 결심한다.
그는 13살에 운전을 시작했고, 15살엔 스포츠 신문에 축구 기사를 기고해 이름을 날렸다. 열아홉의 나이에 독감으로 아버지와 형을 잃고 소년가장으로 내몰렸다. 1차 세계대전(1914~1918)이 터지자 10대 소년 포병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스포츠카 대신 트럭 운전대를 잡았다.
행운의 여신은 소년의 편이었다. 이탈리아 최고의 레이서로 꼽히는 펠리체 나자로(Felice Nazzaro)와 경기장에서 조우한 뒤, 그 인연을 발판 삼아 스포츠카 메이커인 밀라노의 CMN(Costruzioni Meccaniche Nazionali)으로 직장을 옮긴다. 그리고 트럭으로 쌓아온 운전 실력을 뽐내며 마침내 레이싱에 데뷔한다. 처음부터 선두를 달리는 선수는 아니었다. 첫 출전한 50km 산길 레이싱에선 이도저도 아닌 종합 11위에 그쳤다.
레이서로 데뷔한 그는 1929년 마구간을 뜻하는 ‘스쿠데리아 페라리’라는 자신만의 레이싱팀을 창단한다. 스쿠데리아 페라리는 1947년 창립 첫 해부터 최초의 모델인 페라리125S로 로마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 총 거리가 1000마일(16km)을 넘는 밀레 밀리아 레이스, 1949년 프랑스의 르망에서 열리는 르망 24시 등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이탈리아 명문 피아트를 꺾고 1인자로 등극했다.
포드·람보르기니 분노 자극한 막말…스포츠카 경쟁에 불 지핀 페라리
“포드? 미국인은 스포츠카를 만들 수 없다.”
페라리는 괴팍하기로 유명했다. 미국의 자존심인 포드사(社)를 뭉개버린 독설은 유명한 일화다.
1960년 포드 회장으로 취임한 포드 창업주 헨리 포드의 손자 '포드 2세'는 고성능차 브랜드를 손에 넣기 위해 페라리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포드 측은 페라리의 경영권에 간섭하지 않고 모터스포츠 부분의 모든 결정을 엔초 페라리가 내릴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을 내세우며 인수에 나섰다.
그러나 포드 측이 페라리에 홍보용 스폰서 마킹을 달고 레이싱에 임하라며 개입해 판이 깨졌다. 당시 엔초는 포드 측에 ‘미국인 주제에 무슨 슈퍼카를 만들겠다고 거들먹거리냐’는 막말을 남긴다.
미국인의 자존심을 짓밟힌 포드는 절치부심한다. 이를 갈고 ‘포드 GT’를 개발한 것. 르망 24시에서 페라리를 꺾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대성공. 포드는 르망 24시에서 1966년, 1967년 워크스 팀(Works team)으로 종합 우승에 이름을 올리며 엔진과 섀시를 동시에 제작하는 컨스트럭터 사이에서 왕좌를 차지했다.
“트랙터나 만드는 람보르기니? 페라리는 평생 못 몰거야.”
슈퍼카 ‘람보르기니’의 창업주 페루치오 람보르기니 역시 엔초에게 수모를 당했다. 당시 트랙터 등 농업기계로 명성이 높았던 페루치오는 클러치가 오작동하는 페라리 250GT 모델의 오너였다.
람보르기니 창업주답게 비범했던 페루치오는 페라리 250GT를 직접 분해한다. 람보르기니에서 생산하던 트랙터의 클러치와 페라리가 사용하던 클러치가 같은 제품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그는, 오작동의 문제점을 알려주기 위해 친히 페라리 본사를 찾는다.
문제는 엔초의 고약한 성격이었다. 나름의 신비주의를 위해 자신을 만나러 온 사람들을 몇 시간씩 기다리게 하는 게 엔초의 철칙이었다. 엔초가 선한 의도로 찾아온 페루치오를 실망시키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트랙터나 만드는 모양인데, 페라리를 제대로 몰려면 평생도 부족할거야”라는 악담에 페루치오는 회의실을 박차고 나갔다.
페루치오는 다음 해인 1962년에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스포츠카 람보르기니(Lamborghini)를 설립한다. “완벽한 자동차를 만든다”는 람보르기니의 사명엔 ‘고장으로 골머리를 앓게 한 페라리와는 다른’ 차를 만들겠다는 복수심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외도와 막말 일삼는 엔초의 빛과 그림자…요절한 첫 아이와 성장하는 회사
누군가의 일기장을 읽고 나면 그 사람을 완전히 미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던가. 괴팍한 스피드광의 면모 뒤에는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고통이 자리잡고 있었다.
엔초 페라리는 아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아이가 생기면 위험한 레이스를 그만두겠다고 맹세한 준비된 ‘아들 바보’였다. 그는 한국 나이로 서른 다섯, 늦은 나이에 얻은 귀하고 귀한 첫 아들의 이름을 1916년 독감으로 숨진 아버지와 형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아버지와 형이 그랬듯이, 알프레도는 1956년 어느 날 스물 다섯의 나이로 요절한다. 첫 아들을 앗아간 근육병증의 이름은 근육퇴행위축. 골격근이 약해지고 근육 세포와 조직이 괴사해 점차 운동 능력을 잃는 병이다. 열 두 살께 일어서는 게 어려워지다 20대 중반에 죽음에 이른다.
병마와 싸우던 알프레도는 생의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우듯 엔진 개발에 몰두했다. 알프레도는 1955년말 아버지와 함께 F2를 위한 1.5리터 DOHC V6 엔진을 개발하기 시작했지만, 완성작을 보지 못한 채 1956년 눈을 감았다.
엔초 페라리는 알프레도의 죽음 이후 생산된 페라리 V6 차량에 아들의 별명인 ‘디노’라는 이름을 붙여 추모했다. 그는 훗날 첫째 아들의 “강인함, 지성, 집중력(Intensity, intelligence, and attentiveness)”(출처 Enzo Ferrari: The Man)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족의 불행 속에서도 페라리는 1950년대 사업 부흥기를 맞이했다. 1951년에는 F1 그랑프리에서 첫 우승을 했고, 1953년엔 2년 연속 월드 챔피언이라는 타이틀도 따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사업 다각화에 나섰던 페라리는 1980년대에 이르러 슈퍼카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288 GTO를 출시하며 대전환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페라리를 긴장케한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하며 또 한번 위기를 맞는다.
‘말 vs 말’ 포르쉐 959에 왕좌 뺏긴 페라리…이 갈고 만든 F40
포드와 람보르기니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엔초. 그런 그의 자존심을 구기게 한 강력한 라이벌이 있었으니, 페라리와 마찬가지로 엠블럼에 말 로고를 사용하는 포르쉐였다. 엔초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자동차’ 타이틀을 포르쉐959에 빼앗긴 뒤, 이를 탈환하기 위해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로 13개월 간 비밀 프로젝트를 전두지휘 한다. 그 결과 1987년 출시한 모델이 F40이다.
급박했던 개발 과정에도 불구하고 F40은 사양 부문에서 포르쉐 959를 뛰어넘었다. 288GTO의 엔진을 대대적으로 수정해 3.0L V8 엔진에 트윈터보를 장착했고, 최대 출력 478마력, 최대 토크 58.8kg.m로 최고 속도 324km/h를 기록했다.
F40은 엔초의 유작이 됐다. 인간 페라리의 여정은 F40 출시 다음 해인 1988년 끝이 난다. 마지막 순간까지 숨 가쁜 경주였다. 그의 시작은 미미했지만 끝은 창대했다.
“나 죽으면…페라리 태운 채 남편 옆에 묻어줘” 남달랐던 스포츠카 오너들
페라리가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들어서다. 1975년 현대차 포니 1세대가 출시되면서 자동차 산업에 관심이 커지던 시기였다. 당시 국내 언론에는 범상치 않은 페라리 오너들 사연이 적잖이 등장했다.
어떤 이에게 페라리는 무덤까지 가져가고 싶은 차였다. 1977년 3월 21자 동아일보 〈乘用車(승용차)에 앉혀 異色埋葬(이색매장)〉기사에는 이른 나이에 요절한 미망인 산드라 웨스트(37)의 사연이 실렸다. 그는 자신이 죽게 되면 야회복 레이스 가운을 입혀 자신이 타던 페라리 자동차에 안치해 매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1988년 6월 6일 경향신문 〈최신형 승용차 탄 교황〉 기사에는 빨간색 페라리 몬디알 컨버터블에 탑승한 당시 로마 교황의 사진이 실렸다.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5일 간의 일정으로 이탈리아 북부 에밀리 아로마뉴 지방을 방문해 페라리 자동차 회사가 있는 피오르노시에서 최신형 페라리 승용차를 탄 상징적인 모습으로 등장했다. 교황과 스포츠카라는 어울리지 않는 이 조합은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두 가지 자부심을 사진 한 컷에 녹여냈다.
1997년 ‘페라리 F355 1대=압구정 40평 아파트’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팔린 페라리는 1997년이 돼서야 등장했다. 1997년 3월 28일자 한겨레 신문의 〈불황 비웃는 2억 대 스포츠카〉 제하 기사는 페라리 두 대가 국내에서 처음 팔려나간 ‘사건’을 보도했다. 외국에서 알음알음 중고로 들여오던 페라리를 제외하면, 정식 판매는 이때가 처음이다.
당시 한대 값이 2억2000만원이었던 페라리 F355베를리네타 모델이 같은 해 2월에 먼저 팔렸고, 3월엔 2억3650만원인 F355GTS를 계약한 구매자가 나타났다. 이때 팔린 페라리 1대 가격은 말 그대로 ‘집 한 채’ 값이었다. 그것도 압구정 노른자 땅 위에 지어진 40평대 아파트 값. 1990년 압구정 한양 1차 아파트의 40평대 매매가는 3억원을 넘지 않았다.
“결혼보다 페라리”…1990대 압구정 오렌지족의 드림카
그러나 페라리는 한국에 본격 수입되기 이전부터 1990년대 청춘들의 드림카로 자리 잡았다. 현 SPOTV 야구 해설위원인 김재현 전 선수의 과거 인터뷰에서는 그 당시 젊은이들에게 페라리의 위상이 어땠는지 엿볼 수 있다.
1996년 5월 13일 경향신문에 실린 〈무스를 바르고 ‘넌 할 수 있어’를 부르며 사업가를 꿈꾼다〉 라는 제목의 인터뷰 기사는 “김재현의 부모는 결혼 후 애를 낳지 않겠다는 아들의 선언에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 애초부터 김재현은 결혼엔 관심이 없다. 연봉이나 자꾸 올라 멋진 스포츠카 페라리를 모는 것이 더 급하다”고 서술했다. 김 해설위원은 여윳돈 1000만원이 생기면 무엇을 하겠냐는 기자의 질문에 “돈을 더 모아 스포츠카 ‘페라리’를 사겠다”고 답하기도 했다.
“SUV와 같은 문장에 쓰이지 않았으면 한다”던 페라리 ‘고집’ 꺾었다
오랫동안 '드림카'로 군림해 온 페라리는 2022년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고집스럽게 지켜온 스포츠카의 '원형'에서 한발 물러나 '4도어 4인승' 스포츠카로 진화를 거듭했다.
지난 10월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선보인 신형 모델 푸로산게(순종·thoroughbred)는 페라리로서는 변화의 상징적 이정표다. 푸로산게는 페라리 75년 역사상 최초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다. 절대 SUV 따위엔 한눈 팔지 않을 것 같던 페라리가 ‘크고 편안한 차’를 선호하는 소비자의 니즈에 부응했다.
푸로산게는 페라리 상징과도 같은 12기통 엔진(V12)을 장착해 페라리의 성능을 계승했다. 제로백 3.3초의 가속력에 최고 속도는 310km/h에 이른다. 눈길을 사로잡는 건 페라리 최초의 4도어 차량이란 점이다. 페라리는 푸로산게에 전형적인 SUV와는 완전히 다른 혁신적인 비율과 레이아웃을 채택했다. 프론트 도어와 리어도어는 서로를 바라보고 열리는 '코치도어'로 설계돼 디자인은 물론 뒷좌석의 승하차를 편하게 하는 기능적인 면도 살렸다. 또 2열 도어는 실내에 탑재된 버튼을 눌러 손으로 밀지 않아도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다.
푸로산게가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공개된 점도 흥미롭다. 그간 페라리는 아시아 권역에서 신차를 공개할 때 중국 아니면 일본을 프리미어 행사로 선정해왔다. 국가별 매출액(2021년 12월 기준) 비중을 보면 미국(21.8%), 영국(10.7%), 이탈리아 (9.6%)의 뒤를 이어 곧바로 중국 (7.3%), 일본(6.3%)이 톱5를 차지하고 있어서다.
그런 페라리가 이번엔 왜 한국을 선택했을까. 답은 고가의 해외 차량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국내 자동차 시장에 있다. 지난해 국내 자동차 시장에선 팔린 차 대수는 줄고, 팔린 차값은 오히려 뛰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의 ‘2021년 자동차 신규 등록 현황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수입차와 대형 SUV, 전기동력차 등 고가차 시장은 지난 2018년부터 2021년까지 연평균 6.7%(금액기준) 성장했다. 특히 페라리를 포함한 4억원 이상 초고가 수입차 브랜드 판매대수는 재작년 1234대에서 지난해 1542대로 25% 늘었다.
‘F1’ 고집하던 페라리, 고집 꺾은 보람 있을까?
콧대 높던 페라리가 SUV 시장에 뛰어들자 업계는 푸로산게가 포르쉐·람보르기니의 SUV처럼 성공을 거둘 수 있을 지 주목하고 있다.
앞서 독일의 포르쉐는 2002년 ‘카이엔’을 출시하며 적자 경영난에서 벗어났다. 출시 직후 자동차 애호가들 사이에선 못생겼다는 혹평까지 나왔던 카이엔이지만, 이후 출시된 ‘마칸’과 함께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람보르기니의 SUV 모델인 ‘우루스’ 역시 전체 매출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주력 모델로 부상, 2018년 출시 이후 ‘우루스 퍼포만테’, ‘우루스 S’ 등 잇단 후속 모델로 계보를 이어가는 중이다.
가보지 않은 길에 첫 시동을 켠 페라리도 대박 조짐을 보이고 있다. 푸로산게는 향후 2년간 물량이 모두 매진된 상태다. 한국에서는 VIP를 위한 100대 물량만이 풀렸고 이미 예약판매가 종료됐다. 페라리는 푸로산게의 폭발적인 인기에 생산물량을 더 늘릴 수도 있지만, 전체 생산량의 20%를 넘지 않는다는 내부 방침에 따라 페라리 브랜드 포지셔닝과 차량의 희소성을 지키기 위해 물량 조절에 나섰다.
다만, 이름값 못하는 내구성 이슈는 페라리의 아픈 손가락이다. 수없이 반복했던 ‘리콜 파티’를 이젠 멈춰야 할 때라는 것. 페라리는 올들어 브레이크 기능상 문제로 인해 2005년 이후 출시된 거의 모든 차량을 리콜했다. '푸로산게'가 리콜 이슈 없는 페라리의 SUV로 이름을 떨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는 대목이다.
업계는 페라리의 다음 행보도 주시하고 있다. 유종호 KB증권 연구원은 "페라리는 2023년부터 2026년까지 첫 전동화 모델을 포함한 15종의 신차를 출시할 계획"이라며 "높은 수요와 지속적 신차 출시로 페라리 실적이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