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현지시간) 크림대교를 찾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지난 3월에 열린 크림반도 합병 8주년 행사에서 입었던 것과 같은 1600만원짜리 로로피아나 자켓을 입고 있다. [TASS]

[헤럴드경제=김유진 기자] 대단한 로고나 디자인도 없다. 한번 봐도 기억하기 어렵다. 로고를 강조한 다른 럭셔리 브랜드와 달리 “라벨이 보이지 않는다”는 카피로 한국 시장에 진출했다. 무난한 디자인의 외투 값은 무려 100만원 단위도 아닌 1000만원부터 시작한다.

블라디미르 푸틴부터,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과 이명박 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실력자들이 유독 좋아하는 브랜드지만, 대중에겐 여전히 생소한 브랜드가 있다. ‘아는 사람만 안다’는 울트라 하이엔드 럭셔리 ‘로로피아나’(Loro piana)다.

100년 된 이탈리아 명품이라는데…대중은 모른다

3931만원에 판매되는 비쿠냐 원단의 할란 코트. 1787만원에 판매 중인 시어링 크레덴스 코트. [로로피아나 홈페이지]

로로피아나는 1924년 피에트로 로로피아나가 창립한 뒤 6대째 가업을 이어온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다. 초기에는 패션 브랜드라기 보다 원단 제작사로 이름을 날렸다. 캐시미어와 비쿠냐 등 귀한 소재로 원사를 짜고, 원단으로 만들어 극소수 하이엔드 브랜드에 납품한다. 동시에 고급 캐시미어 원단 등을 사용한 니트와 코트류를 직접 만들어 소비자에게 판매하기도 한다.

카프라 히르커스 아기 염소. 로로피아나 베이비 캐시미어의 원섬유가 이 아기 염소의 속털이다. [영화 ‘캐시미어-비밀의 기원’ 스틸 컷]

국내에선 이명박 전 대통령을 비롯해 유력 남성들이 입는 명품 정장 원단으로 유명세를 탔다. 1992년 한국에 진출하면서 공략한 곳도 남성복 업체와 맞춤 양복점이었다. IMF 이전까지만 해도 한 해 100억 원 넘는 최고급 원단을 국내 남성복 업체와 양복점에 공급하며 1980년대 한국 남성들의 럭셔리 수요에 부응하던 브랜드이기도 하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복권된 이명박 전 대통령(왼쪽 사진) 역시 로로 피아나 제품을 알린 일등공신이다. 이 전 대통령은 서울 시장으로 재직하던 2008년 7월 부산시청에서 열린 부산 발전전략토론회에 참석해 로로피아나 양복을 입은 모습이 노출됐다. 로로피아나 양복은 15년 전에도 한 벌에 300만원을 호가하는 고가의 아이템이었다. 이 대통령 양복의 오른쪽에는 양복점 이름으로 추정되는 영문 ‘ZENITH’도 새겨져 있다. 오른쪽 사진은 로로피아나의 라벨 디자인. [청와대사진기자단]

최근엔 로로피아나 완제품 품목이 눈길을 끈다. 로로피아나는 보온성이 좋고 가벼운 캐시미어로 유명한 만큼, 니트와 외투 등 겨울 의류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 국내 패션업계도 로로피아나 원단을 사용해 일부 의류를 제작, 프리미엄 라인으로 판매하고 있다. 코오롱에서 로로피아나 프리미어 라인으로 선보인 안타티카 롱패딩은 130만원으로, 안타티카 라인 가운데 가장 비싼 제품군이다.

코오롱이 로로피아나 원단을 사용해 내놓은 프리미어 롱패딩. 가격은 130만원에 책정됐다. [코오롱스포츠 홈피 캡처]

국내 브랜드에서 로로피아나 원단만 사용해도 100만 원을 훌쩍 넘는다면, 로로피아나가 완제품은 대체 얼마일까. 원단 채취부터 의류 디자인과 가공·생산까지 모두 직접 수행한 로로피아나 완제품 가격은 100만원 단위가 아닌 1000만원대가 훌쩍 넘는다. 비싼 가격 탓에 주 소비층은 소득 수준이 높은 중장년층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로로피아나의 겨울 외투는 기본이 1000만원대부터 시작한다. 1430만원에 판매 중인 여성용 시어링 슬레이터 재킷(왼쪽). 1576만원에 판매 중인 남성용 스노우 원더파카(오른쪽). [로로피아나 홈페이지]

여성용 터틀넥과 가디건 등 니트류는 기본 디자인이 100만원대로 시작해 700만원대까지 판매되고 있다.

외투로 눈길을 돌리면 여성복 라인 최고가 아이템의 가격은 4000만원에 육박한다. 비쿠냐 소재를 사용한 할란 코트는 한화 3931만원이다. 에르메스 트윌리처럼 로로피아나 ‘입문템’으로 꼽히는 여성용 스카프 역시 가격이 만만치 않다. ‘비교적’ 가격 접근성이 좋은 기본 디자인도 70만원대부터 시작한다.

값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로로피아나 코리아의 국내 시장 확장세는 뚜렷하다. 2017년 373억원대였던 매출은 2018년 452억원, 2019년 520억원, 2020년 600억원을 찍고 2021년 894억원을 기록했다.

고비사막부터 안데스 고원까지…6대째 캐시미어 찾아 삼만리

중국 아라샨 지역에서 염소를 기르는 목동. 축사에 가둬두는 방식이 아닌 자유롭게 방목하는 옛 양치기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영화 ‘캐시미어-비밀의 기원’ 스틸 컷]

한국 소비자들은 대체 왜 이름도 생소한 이탈리아 명품에 수백, 수천만원을 썼을까. 정답은 로로피아나만의 ‘소재’, 그 소재가 만든 품질에 있다.

로로피아나 일가에게 자연은 개척하고 탐구해 활용해야 할 미지의 세계였다. 이들 일가는 합성 소재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최상급 천연 소재를 찾기 위한 탐험을 마다하지 않았다. 일교차가 크고 겨울이 혹독할 수록, 극한에 적응한 염소들의 털은 최고의 캐시미어 원재료가 된다.

로로피아나의 캐시미어는 중국 북부 내몽고 고비사막 남서부에 있는 알라샨(Alashan) 지방에서 채취한다. 겨울과 여름이 혹독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로로피아나는 여름이 오고 강추위로부터 염소들을 보호하던 털이 털갈이로 빠져나갈 때를 기다렸다 최소한의 스트레스만 주는 방식으로 채취한다.

아기 염소에게 젖병을 물리는 중국 내몽고 고비사막 남서부 알라샨(Alashan) 지방의 여자 목동. [영화 ‘캐시미어-비밀의 기원’ 스틸 컷]

이가운데 카프라 히르커스 염소의 속털로 만든 베이비 캐시미어는 최상급 소재다. 알라샨 목동들이 5월이 돼 털갈이가 시작된 아기 염소들을 한 마리 씩 품에 안고 빗질해 베이비 캐시미어를 채취한다. 한 마리에서 나오는 속털은 30g 남짓. 성체 염소 한 마리에서 400g씩 나오는 속털과 비교하면 더욱 희소하다. 섬유의 직경이 13.5미크론으로 가늘어 다른 일반 캐시미어(직경 15미크론 안팎)와 비교해 더 가볍고 부드럽다.

‘신의 섬유’로 불리는 비쿠냐 털 역시 로로피아나의 고급 캐시미어 소재다. 비쿠냐는 남아메리카 고도 4000미터가 넘는 안데스 산맥 고지대에서 잡초나 풀을 먹고 서식하는 동물이다. 2년의 기다림 끝에 비쿠냐 한 마리에서 얻을 수 있는 섬유는 고작 200g. 7㎏의 속털이 필요한 오버코트 한 벌을 만들기 위해선 비쿠냐 35마리를 2년 동안 길러야 한다.

로로피아나 원단을 위해 투입되는 시간과 노동은 값비싼 제품 가격에 대한 알리바이다. ‘이만큼이나’ 비싸도 되는 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할지 모르나 ‘왜’ 비싸냐는 질문에 대한 해답으론 명쾌하다.

‘비건 패션’ 유행에 당혹…‘인자한 착취자’ 자처, 다큐까지 찍었다

중국 내몽고 고비사막 남서부 알라샨(Alashan) 지역에서 방목 사육되고 있는 염소 떼. [영화 ‘캐시미어-비밀의 기원’ 스틸 컷]

천연 소재에 대한 집착을 보여온 로로피아나에게 ‘비건 패션’은 난감한 유행이었다. 합성 소재가 아닌 동물로부터 얻은 천연 소재를 내세우는 로로피아나의 정체성은 누군가에겐 사랑스러운 동물들의 털을 뽑고 가죽을 벗기는 잔인하고 야만적인 요소로 비춰질 수 있어 위험했다.

이같은 시류 속에 로로피아나는 자신들만의 철학을 미학적이고 우아한 방식으로 소명했다. 로로피아나가 뤼크 자케 감독을 영입해 제작에 나선 다큐멘터리 3부작이 그 역할을 제대로 했다.

뤼크 자케는 다큐멘터리 ‘펭귄 - 위대한 모험’으로 이름을 떨친 감독이다. 그는 로로피아나가 섬유를 채취하는 사막과 고원을 찾아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연과 공생하는지 보여줄 것으로 보인다. 3부작 가운데 첫 시리즈인 ‘캐시미어-비밀의 기원’이 내몽고에서 촬영을 마친 뒤 지난 2019년 10월 상하이에서 공개됐다.

베이비 캐시미어의 원섬유는 카프라 히르커스 아기 염소의 속털이다. [로로피아나 홈페이지]

자연과 공존하려는 로로피아나의 노력에도 세간의 평가는 다소 짜다. 천연 소재 대부분이 동물로부터 얻은 동물성 원료라는 점에서 비판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동물성 원료를 전면 보이콧 하지 않는 한 인간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생색은 ‘우리는 인자한 착취자’라는 변명일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지속가능한 윤리적 패션을 모토로 패션 브랜드를 평가하는 ‘굿온유’(Good-on-You)에서는 로로피아나의 윤리경영에 낙제점을 줬다. 환경 등급과 노동 등급에서 ‘충분하지 않음’(2점), 동물 등급에서는 그보다 낮은 ‘매우 나쁨’(1점) 평가를 받았다.

거론될 때마다 '블레임룩'…웃픈 유명세 '그사세' 브랜드

다큐 3부작 시리즈를 통해 글로벌한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한 로로피아나지만 국내에선 불미스런 사건과 연루되기도 했다. 부정 또는 비리와 관련한 ‘블레임룩’(blame look)으로 유명세를 타 로로피아나 측에서 당혹감을 표한 전례도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3월 모스크바 시내 루즈니키 경기장에서 열린 크름반도 병합 8주년 기념 콘서트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이 이날 행사에서 입은 겉옷은 이탈리아 하이엔드 브랜드인 ‘로로피아나’ 제품으로 약 150만루블(약 1600만원)로 알려졌다. [로이터연합]

그도 그럴 것이 가장 최근 로로피아나로 화제에 오른 인물은 ‘전쟁광’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다. 푸틴은 지난해 2월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루즈니키 경기장에서 열린 크림반도 합병 8주년 축하 콘서트에서 무대에 올라 5분간 연설하며 로로피아나 제품을 입었다.

당시 언론은 푸틴이 러시아 국민들이 2년치 월급을 고스란히 모아야만 살 수 있는 고가의 명품을 입었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러시아 국민들의 평균 연봉은 800만원 안팎으로, 월급으로 따지면 70만 원이 안 된다.

고(故) 유병언 세모그룹 회장. [헤럴드경제 DB]

2014년 한국사회를 강타한 세월호 사건의 책임자로 연루된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도 로로피아나를 입었다. 그가 2014년 7월 사체로 발견될 당시 입고 있었던 겉옷이 로로피아나 겨울용 외투로 알려졌다. 그는 수배 도중 전남 순천시 서면 학구리 매실밭에서 백골의 변사체로 발견됐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맥럭셔리'는 싫다

업계는 로로피아나의 성장세를 위버 럭셔리 열풍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위버 럭셔리(Uberluxury)는 ‘uber(최고의)’와 ‘luxury(사치품)’를 합성한 용어로, 여타 명품을 뛰어넘는 초고가 명품을 일컫는다. 원섬유부터 최상급으로 채취하는 로로피아나의 고집이 중국 공장에서 조립식으로 생산되는 양산형 명품과는 차별화 되는 지점이라는 것.

이같은 열풍의 다른 이름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있는 맥럭셔리(Mcluxury)를 향한 반감으로 풀이된다. 여기에는 누구나 입는 옷과 가방을 들면 ‘아무개’가 밖에 될 수 없다는 경계심, 그리고 철저하게 차별받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이 자리한다. 불황에도 끄떡없이 위버 럭셔리 시장이 살아남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