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주재 고베아 주교 편지에 사실 담겨

밀고자 얘기 듣고 거처 찾아가 직접 도와

윤유일 등 하루만에 고문사 ‘의도적 살해’

정조, 남인 내분 탓 정국 혼란 원치 않아

이승훈의 ‘만천유고’는 20세기에 만든 가짜

방대한 사료 연구 천주교 오류 답습 밝혀

[북적book적]정민 교수, “‘체포령 주문모 신부’ 다산 정약용이 도피시켜”
한국 초기 천주교 신자들은 명례방(지금의 명동)에 있는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집회를 가졌다. 그림은 김태 화가의 '명례방 집회'(1984년 작).

1794년 12월 윤유일, 지황 등의 도움으로 조선으로 밀입국한 주문모 신부는 한양에 숨어지내며 천주교도들에게 세례를 주고 부활절에는 미사까지 집전했다.

사학으로 규정된 데다 밀입국자로서 조선 정부의 감시망을 피해 조심스런 행보를 이어갔으나 천주교도 한영익의 밀고로 주문모 신부의 거처가 들통나게 된다. 정조는 급히 체포령을 내리지만 그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극비리 전격적으로 급습했지만 그의 행적은 묘연했다. 최인길, 지황, 윤유일은 주문모의 행방을 묻는 고문에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고, 셋은 이튿날 사망하게 된다. 1795년(정조 19) 발생한 을묘박해다.

[북적book적]정민 교수, “‘체포령 주문모 신부’ 다산 정약용이 도피시켜”

고전의 발굴과 해석에 탁월한 고전학자 정민 교수는 역저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김영사)에서 1795년 주문모 실포 사건 당시 신부를 탈출시킨 이가 바로 다산 정약용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편다.

정민 교수는 이와 관련, 두 가지 기록을 교차 검토한다. 하나는 다산이 회갑을 맞아 쓴 ‘자찬묘지명’이다. 여기에는 “4월에 소주 사람 주문모가 변복하고 몰래 들어와 북산 아래에 숨어서 서교를 널리 폈다. 진사 한영익이 이를 알고 이석에게 고하였는데, 나 또한 이를 들었다.”는 글이 들어 있다.

그런데 다산은 그 얘기를 들었다고 했지, 거처가 들통났다는 사실을 주문모 신부에게 전했다고 하진 않았다. 비밀은 다산도 예상치 못한 데서 밝혀진다. 1797년 8월15일 북경의 고베아 주교가 1796년 주문모 신부의 사목 보고를 받고 나서, 사천의 대리 감목 디디에 주교에게 보낸 장문의 라틴어 편지 속에 그 사실이 드러난다.

“밀고하는 자리에 어떤 무관 한 사람이 같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한때 천주교 신자였다가 배교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사실을 듣고는 곧장 신부님이 머물고 계시다고 알려준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신부님에게 한시라도 빨리 그 집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나서 자기가 신부님을 다른 곳으로 모시고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한영익이 찾아간 이석은 다산의 큰 형 정약현의 처남이였고 당시 다산은 배교 상태에서 오위 무직(武職)으로 규장각에서 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엉뚱한 데서 퍼즐이 맞춰진 것이다.

정민 교수는 주문모 신부 문제로 붙들려온 세 사람이 열두 시간도 채 못돼 고문 끝에 죽은 걸 의도적 살해로 본다. 중국인 신부의 국내 잠입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죽여서 입막음한 것이란 해석이다. 당시는 1791년 윤지충, 권상연이 제사를 거부하고 부모의 신주를 불태운 진산사건 이후 정국이 잠잠해진 터로 이 문제로 다시 격랑 속에 빠져드는 걸 정조도, 재상 체제공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남인 내부의 갈등이 자리잡고 있다.

서학은 남인 내부를 갈라 놓았다. 남인 성호학파의 원로 안정복은 서학을 신봉하는 후학들을 비판하고 서학의 핵심교리를 논박했다. 하지만 성호학파의 중진인 권철신, 이기양 등은 서학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서학을 믿는 신서파와 배격하는 공서파로 갈라져 물어뜯는 싸움은 노론에겐 꽃놀이패였다.

정치적 문제까지 겹쳤다. 정조는 80년 만에 남인 출신으로 재상에 오른 체제공을 중심으로 노론이 장악한 정국에 변화를 주고자 했다. 그러나 남인은 체제공의 친위세력인 채당과 반체제공 전선인 홍당으로 또 다시 갈라졌다. 채당에는 신서파가 많았고 공서파는 끊임없이 서학문제를 공격했다. 홍당은 노론과 손을 잡았다. 남인 내부의 분열로 정조의 정국 새판짜기가 어그러진 것이다.

이 분열의 씨앗은 사실 성호 이익에서 비롯됐다. 서학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적극적으로 긍정하지도 않은 채 강한 여운을 남긴 태도가 훗날 제자들을 갈라서게 만들었다. 정 교수는 성호 일문 중에 서학에 빠졌던 이들이 많음을 들어 성호 이익이 사안의 중대성 때문에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서학에 강하게 끌렸을 것으로 본다.

서학과의 접촉은 조선의 긍정적 변화를 끌어내는 동력이 되지 못하고 위정척사의 명분 아래 세도정치에 날개만 달아준 셈이 됐다고 정 교수는 평가한다.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의 유일한 문집으로 알려진 ‘만천유고'가 가짜 책이라는 사실도 밝혀 놓았다.

‘만천유고’는 초기 천주교회의 주요 자료로 70여 년간 성전으로 대접 받아왔다. 정 교수에 따르면 ‘만천유고’에는 이승훈의 글이 한 편도 없다. 한 예로 ‘만천유고’의 2부에 해당하는 ‘만천시고’에는 이승훈이 세상을 뜬 지 15년 후에 태어난 양헌수의 한시와 거의 동일한 한시가 실려있다.인물의 이름만 바꾼 한시를 베껴서 그대로 수록한 것이다. ‘만천유고’가 남의 글을 거칠게 모아 20세기 초반에 짜집기된 가짜 책이라는 주장이다.

남대문과 중구 일대의 약국들이 당시 서학을 전파하는 주요 기점이었다는 사실, 명례방 사건으로 귀양가 유배지에서 죽은 김범우의 유배지 논란, 16세에 장원 급제해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차세대 리더 황사영 등 새로 밝혀낸 이야기와 초기 신앙공동체의 절박한 모습들이 눈길을 끈다.

1770년대 중반 서학의 태동기부터 1801년 신유박해까지 초기 천주교회의 역사를 집대성한 책은 특히 새롭게 발굴한 문헌과 방대한 사료 연구를 통해 그동안 학계에 답습돼온 오류를 바로 잡고 새로운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학계와 교계의 논란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정민 지음/김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