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인, 향리, 무반, 서북인 혼돈기에 신분상승

19세기말~일제기 관료제 개편 속 기회 얻어

사회적 지위가 출생에서 성취가능 대상으로

강한 지위의식 한국 근대성과 역동성의 뿌리

황 교수, 한국의 위계형성 과정 본격적 탐색

[북적book적]현 한국사회 특권층의 뿌리는 제2신분 집단
“20세기 초반에도 관료제는 계속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 관료제의 발전은 조선 시대와는 반대로 귀족 지배를 강화하는 대신 약화시켰다. 그러나 이 변화는 한편으로 전근대 질서에 대한 통념 속에서 은폐되어 있던 사람들인 조선왕조의 제2신분집단을 드러나게 하고 부상시키는 심오한 효과를 가져왔다.”(‘출생을 넘어서’에서)

중인, 향리, 서얼, 무반, 서북인 등은 신분제 사회 조선에서 제2신분 집단으로 불린다. 제1집단인 귀족(양반)과 평민 계급 사이에서 세습적·폐쇄적 층위를 차지하고 있던 이 계급은 특히 일제 식민지기 사회적 지위를 획득, 지금의 특권층을 형성하게 된다.

호주 국립대 황경문 교수의 저서 ‘출생을 넘어서’(너머북스)는 이들 제2신분 집단, 즉 2류 엘리트층이 19세기 말~20세기 초 혼돈기에 태생적으로 주어진 신분을 넘어 관료제의 고위층으로 올라간 과정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연구한 단행본이다. 한국 사회 위계 형성의 뿌리찾기다.

[북적book적]현 한국사회 특권층의 뿌리는 제2신분 집단

이들 제2 신분집단은 일종의 전문가 그룹으로, 귀족과 마찬가지로 교육도 받고 유교적 통치 이념에 정통해 국정운영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외국어와 법률, 의술, 회계를 담당한 중인과 지방의 말단 관리인 향리, 서북 지방(평안도) 출신 엘리트들, 무반, 서얼들은 기술과 능력을 갖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사회적 위계 속에서 종속적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1880~1890년대 문호개방과 함께 국가정책을 새롭게 추진할 개화전담기구인 통리기무아문 이 설치되고 갑오개혁 등으로 관료제가 대대적으로 개편되면서 제2 신분집단의 관직 접근이 활발하게 이뤄지게 된다. 이들은 갑오개혁 무렵에는 일부 정부 최고위 관직까지 오르게 된다.

이들은 식민지 초기인 1910년대에 이르면 도지사, 시, 도참여관 등 대부분의 조선인 고위직을 차지하게 된다.

윤치호, 박영철, 구영서, 현진건, 최남선, 나혜석, 주시경 등 근대기의 주요 인물들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안창호, 조만식, 이동혁, 이승만, 박은식, 이승훈, 이광수, 김소월, 김동인, 백인제와 같은 서북 출신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책은 17세기 중반부터 근대 시기까지 제2 신분집단이 관료제에서 극적인 신분 상승을 이뤄낸 다양한 수단과 수세기 걸친 사회 위계의 전복을 어떻게 이뤄냈는지 구체적인 사례 연구를 제시한다.

가령 울산 호장의 아들인 최현배, 기장군의 마지막 이방의 아들인 김두봉, 대구의 향리가문의 삼형제인 독립운동투사 이상정, 사학자 이상백, 시인 이상화 등에서 보듯 향리의 자식들은 정보와 부를 바탕으로 식민지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일본 유학 기회를 얻었으며, 시대의 새로운 기수로 나서게 된다.

황 교수는 제2신분이 조선후기를 거쳐 일제 식민지시기 엘리트 지위를 획득한 토대로 국가 관료제를 지목한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지위의 거대한 조정자 역할을 해온 관료제가 근대 초기에도 강력하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사회신분 차별을 강화해온 시스템이 이들의 신분 탈출 및 획득의 수단이 된 것이다.

제2신분 집단의 지위상승은 세습적이었던 사회적 지위를 성취 가능한 것으로 전환한 것이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

황 교수는 바로 이 사회 위계의 전환이 한국 근대성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자본주의, 산업화, 도시화를 근대성의 기준점으로 여기는 종래 연구와 궤를 달리한다. 타고난 것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의식, 습득될 수 있는 지위를 향한 강력한 믿음 같은 게 한국사회 변혁과 역동성의 근저를 이룬다는 저자의 시각은 새롭다.

근대 초기 가장 먼저 관료 조직의 상층부를 차지한 이들은 사회 여타 부문에서도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이 배경에는 신학문에 대한 열렬한 수용이 자리하고 있다. 소유한 부를 바탕으로 유학 등 신교육을 습득한 이들은 신학문의 가치와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고, 지식의 방향이 재조정되는 과정에서 유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특히 국가 개입, 상업활동과 민족적 집단 의식 등 한국 근대성의 중요한 주제들이 수 세기에 걸쳐 한국의 전근대적 조건으로부터 발현된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조선 후기를 봉건제 해체기로 보고 근대로 귀결했다는 역사서술과는 상반된다. 전근대적인 것과의 단절이 아니라 그 위에서 근대성을 획득했다는 것으로, 저자는 이런 제2 신분집단의 지위의식이야말로 한국만의 고유한 근대성의 특징으로 파악한다.

즉 이들은 자신을 옭아맸던 차별구조를 끊어내는 개혁을 추진하기 보다 오히려 스스로를 귀족으로 인식하려 했고, 사회적 명망을 달성하자 엘리트주의를 강화했다.

이들의 성취가 일제 식민지 체제에서 비민주적·반민족적 협력의 결과라는 점도 또 다른 근대성의 특징이자 한계이다. 한국의 근대는 이들과 일제의 합작이었다.

저자는 그러나 대부분의 관료들에게 한국 군주제와 조선 총독부 체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개인적 성취가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한다. 즉 이 시기 한국 관료들은 관직을 통해 인생의 성취를 이루는 수 세기간의 관행을 따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해방 후 미군정체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보다 더 강력한 무엇’,‘이들을 움직인 강력한 무기’야말로 관직을 통한 신분상승, 즉 사회적 지위의식으로 본다.

전통적인 가족체제나 국가 개입 같은 전근대적 유산은 80,90년대를 거치면서 사라진 반면 지위가 있어야 최상위로 올라설 수 있다는 지위의식은 더 굳어지고 있는 게 한국사회의 특징이라는 점은 이를 뒷받침한다.

저자의 연구와 주장은 한국의 근대성에 대한 논쟁에서 특별한 관점을 제공한다. 사람을 지위에 따라 평가하는 데 유달리 민감한 현 한국사회의 특성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저자의 지위의식 탐색을 통해 발견이 가능하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출생을 넘어서/황경문 지음, 백광열 옮김/너머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