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정태일 기자]“짝인 거 같기도 하고, 홀. 내가 또 이겼네”(오일남)
“하나 남았어요. 아직 하나 남았어요”(성기훈)
넷플릭스 콘텐츠 ‘오징어게임’ 속 장면 하나. 생존자들은 둘이 짝을 이뤄 구슬 게임을 통해 상대방의 구슬을 모두 빼앗아야 한다. 자신의 구슬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결국 탈락해 죽음을 맞는다. 극 중 성기훈(이정재)은 마지막 구슬만 남겨둔 상황에 진행요원이 권총에 손을 대자 ‘아직 하나 남았다’고 간절하게 애원했다. 극중 조상우(박해수)도 마지막 구슬을 지키지 못할 위기에 상대인 알리 압둘(아누팜 트리파티)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로 호소했다.
전 세계적 흥행 돌풍을 이어가고 있는 오징어게임은 빚더미에 쌓인 사람들이 게임을 통해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경우 거액의 상금을 차지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게임에서 이기는 것은 곧 생존을 의미, 사실상 끝까지 목숨을 지키는 것이 핵심이다.
목숨을 사수해야 하는 게임 속 참가자들은 항상 불안하고 조급하다. 아무리 졸려도 두발 뻗고 편하게 잠도 못 잔다. 방심했다가는 경쟁자들로부터 봉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중한 것을 지켜야 한다면 누구나 오징어게임 속 참가자처럼 절박할 수밖에 없다. 특히 무언가를 빼앗는 것보다 지켜야 하는 경우 우리 뇌는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는 신경 과학적으로도 입증됐다.
기초과학연구원(IBS)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경쟁에서 목표물을 얻기보다 지키는 행동에서 뇌가 더욱 격렬해진다는 원리를 발견했다고 12일 밝혔다.
연구진은 경쟁 시 행동과 뇌 활동의 연결고리를 찾고자 공복상태의 생쥐 두 마리에 먹이 경쟁 실험을 진행했다. 직사각형 상자 내 두 마리 생쥐가 동시에 들어가면, 맞은편에 먹이를 제공해 경쟁을 유도했다. 내측 전전두엽 분석 결과, 먹이를 빼앗거나 지킬 때 뇌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을 확인했다. 내측 전전두엽이 경쟁 중 목표물 뺏기 혹은 지키기 행동과 직접 연관되는 것이다. 내측 전전두엽(medial pre-frontal cortex)은 대뇌 전두엽의 안쪽 부분에 위치해 인지, 사고 및 사회적 행동과 관련이 있다.
특히 뇌 활동은 상대의 먹이를 빼앗은 후 이를 지키는 행동으로 전환할 때 더욱 격렬해졌다. 경쟁 시 목표물을 쟁취하는 것보다 지키는 행동이 더 힘들고 중요하다는 의미다. 오징어게임에서도 상대방의 구슬을 빼앗으려 할 때보다 자신의 마지막 1개의 구슬을 지키려고 했을 때 뇌가 더욱 활발히 가동된 것으로 뇌 과학자들은 풀이했다.
조일주 KIST 뇌과학연구소 단장은 “오징어게임에서 극이 진행될수록 상금을 획득하기보다는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뇌가 더 활발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이에 각종 게임에서 위기 순간 참가자들이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도 이런 뇌의 활동과 연관이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공동 연구진은 시스템 간 신호 간섭 등 기존의 한계를 극복한 ‘초소형 무선 뇌 신호 측정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는 블루투스 무선통신과 신호분석 칩을 적용해 여러 생쥐의 뇌 활동을 무선으로 실시간 동시 측정 및 분석할 수 있다.
조일주 KIST 뇌과학연구소 단장은 “행동에 따른 뇌 신호 변화 관찰에 유용한 도구를 개발했다”며 “이에 약물 전달, 빛 자극 등 다양한 기능을 추가하여 뇌 작동 원리 규명 및 뇌 질환 정복에 기여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연구진은 이를 통해 후속으로 자폐증, 조현병 등 사회성 관련 연구를 지속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