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젠하워 대통령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미국 골프 대중화의 최고 공헌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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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저트클래식 수요일 프로암에서는 아이젠하워와 밥호프를 기리는 시상식이 열린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남화영 기자] 올해 60주년을 맞은 미국프로골프(PGA)투어 데저트클래식에는 매년 재미난 이벤트가 빠짐없이 열린다. 대회를 하루 앞둔 수요일이면 대회장인 캘리포니아 라퀸타의 PGA웨스트 파머 코스에서 ‘아이젠하워밥호프레거시 프로암’을 개최한다. 아마추어나 셀러브러티도 출전하는 프로암 형식을 띄는 이 대회는 인기 코미디언 밥 호프가 1960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인맥이 두터웠던 골프광 호프는 골프 대회 팜스프링스데저트골프클래식을 만들면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인근 란초미라지에 아이젠하워메디컬센터가 설립된 것을 계기로 대표할 유명인사로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를 프로암 행사에 초청했고 마침내 성사됐다. 임기 마지막 해를 보내던 아이젠하워는 프로암에 대통령으로는 처음 출전한 뒤로는 퇴임 이후로도 자주 나왔다. 나중에는 퇴임한 38대 미국 대통령 제럴드 포드 대통령도 초청되었다. 미국 사회에서 대통령이 골프의 후원자가 되는 역사는 이런 계기로 만들어졌고 골프는 대중에 편하게 흡수되었다. 1965년부터는 아예 대회 명칭도 주최자의 이름을 딴 밥호프데저트클래식이 됐다. 하지만 대통령과 코미디언이 세상을 떠나자 대회는 조금씩 힘이 빠졌다. 2012년에 대회 메인 스폰서가 자금 사정을 겪자 퇴임한 빌 클린턴 42대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클린턴재단을 통해 휴매너챌린지로 대회 명칭을 바꿔 지난해까지 7년간을 이어갔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뿌린 전통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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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는 2차대전 중에도 전장에서 골프를 즐겼다.

대통령 재임 8년간 8백 라운드 1953년1월20일부터 1961년1월20일까지 8년간 미국 대통령직에 있었던 아이젠하워는 대표적인 골프광이다. 미국 역사를 통틀어 골프 실력은 현직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뛰어날지 모르나 골프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아이젠하워를 따를 수 없을 것이다. 애칭 ‘아이크’로 불리는 아이젠하워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야구와 미식축구를 했고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해서는 미식축구 선수로 뛰었다. 키 180cm, 몸무게 88kg이던 그는 거친 태클과 공격 스타일 때문에 ‘캔자스 사이클론’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하지만 경기 중에 무릎 부상을 당한 이후 더 이상 선수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골프를 시작한 건 군인으로 복무하던 35세의 늦은 나이였다. 축구 선수 출신의 타고난 운동 소질에 열정이 더해지면서 1년 뒤에는 80타대를 치는 보기 플레이어가 된다. 전쟁중에도 그의 골프 열정은 변함이 없었다. 세계 2차 대전 중에 유럽 연합군 사령관으로 영국 런던에 주둔해 있었지만, 전시에도 불구하고 런던 남쪽 근교의 골프장을 종종 찾았다고 한다. 심지어 독일군의 폭격이 심해질 때면 그 와중에 코스에 엉뚱한 해저드가 생기지 않았는지 오지랖 넓은 걱정을 할 정도였다.

휴매너 챌린지 빌 하스
빌 클린턴 대통령이 휴매너챌린지에서 우승한 빌 하스에게 밥호프 트로피를 시상하고 있다.

5성 장군 아이젠하워는 2차대전이 끝나고 컬럼비아 대학 총장과 나토군 총사령관을 거쳐 1952년에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다. 자신이 당선됐음을 알고 가장 먼저 한 일이란 메이저 골프대회인 마스터스가 열리는 조지아주의 오거스타내셔널로 날아가 골프를 치면서 영광을 음미한 것이었다. 이후 8년간 재임하면서 오거스타내셔널에서만 211번을 포함해 총 800여번 골프 라운드를 즐겼다. 한 해 라운드 100번 꼴이었다. 오거스타내셔널 17번 홀에는 ‘아이젠하워의 나무’를 포함해 수많은 기념물을 남겼다(그 참나무는 수년 전 허리케인으로 밑둥이 잘리면서 베어졌다).대통령 재임 기간에도 골프 사랑은 유별났다. 백악관 뒤뜰을 숏 게임장으로 이용했고 오벌(Oval)룸이라 불리는 집무실 마룻바닥을 골프화 징 자국으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비서에게 편지를 받아쓰게 할 때도 종종 8번 아이언으로 스윙 연습을 했다. 대통령에 재선된 지 얼마 안 돼 열린 기자회견에서 ‘골프를 왜 그렇게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골프와 낚시, 사냥 이 세 가지를 좋아합니다. 야외로 나갈 수 있게 해주지요. 그다지 격렬한 운동도 아닙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도 즐기니까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일단 한 번 나가면 서너 시간동안 공이나 새, 송어, 자연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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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저트클래식이 열리는 PGA웨스트 코스.

미국 골프 대중화의 최고 공헌자 1961년 대통령 직에서 퇴임한 아이젠하워는 펜실베이니아의 게티즈버그 농장으로 귀향해 거리낌없이 골프 생활을 이어갔다. 어느 날 누군가 ‘대통령에서 물러난 후에 뭐가 가장 변했냐’고 묻자 한 답변이 걸작이다. “이제는 사람들이 나더러 짧은 퍼트까지 다 넣으라고 하더군.” 아이젠하워가 77세이던 1968년 팜스프링스의 세븐레이크스CC에서 라운드를 하고 있었다. 파3, 104야드인 13번 홀에서 9번 아이언으로 쏜 샷이 곧장 날아 그린에 안착하더니 볼은 홀컵으로 쏙 들어갔다. 생애 한 번도 하기 어렵다는 홀인원을 달성한 것이다. 아마 그건 자신의 대통령 당선보다 더 기쁜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몇 달 후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홀인원을 포함해 이룰 것들을 다 이룬 몇 달 뒤에 세상을 떠난다. 1주일 뒤 1969년 마스터즈가 오거스타내셔널에서 다시 열렸다. 클로퍼드 로버츠 오거스타 회장은 특별히 아이젠하워를 위한 조사(弔辭)를 대회 시작 전에 낭독했다. “…고인이 생전 슬라이스와 퍼팅의 문제점을 고치지는 못했지만, 코스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스윙을 할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무엇보다도 항상 즐겁게 골프를 즐겼습니다. …(중략) 골프가 인기 스포츠로 자리잡기까지 그보다 더 공헌을 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아이젠하워로 인해 미국에서 골프는 대중적인 레저로 자리잡게됐다. 재산이 많고적음을 떠나 휴식을 원할 때 편하게 여가를 즐기는 수단으로 골프가 미국인에게 각인된 것이다. 그의 취임 당시 미국의 골프 코스는 5045개, 골프 인구는 320만명이었지만, 8년 뒤 퇴임할 때는 골프 인구가 두 배 늘었다. 타이거 우즈의 아버지 얼 우즈가 군인이면서 골프를 할 수 있었고 두 돌 지난 타이거에게 골프를 가르칠 수 있었던 것 역시 아이젠하워의 골프 사랑에서 연유한다. 왼손잡이 골퍼의 우상인 필 미켈슨이 공군인 아버지에게서 골프를 배운 것도 아이젠하워가 골프를 누구나 틈틈이 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든 데서 기인한다. 타이거와 미켈슨을 키워냈으니 이 정도라면 아이젠하워가 미국 골프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아닌가.

외연을 확대하는 색다른 대회 이 대회는 갤러리로도 출전할 수 있지만 유명인사와 스타들이 초청되는 프로암 형식의 대회라는 게 특징이다. 3개 코스에서 동시에 치러지는 데 배우 모건 프리먼, 가수 마이클 볼턴 등 스포츠 스타나 유명인사가 초청되며 일반인도 출전할 수 있다. 프로와 함께 겨루려면 자격이 필요하다. 아마추어는 핸디캡 18이하에 참가비 2만9천 달러(3390만원)를 내면 가능하다. 여기서 나온 수익금은 소외 계층에 기부한다. 첫날 티박스에 오르면 선수와 함께 이름도 불러준다. 선수 체험을 하는 기회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연습라운드도 가능하다. 스코어가 좋으면 일요일에는 옆 코스에서 아마추어 간의 결승전에도 출전하게 된다. 필 미켈슨과 세계 골프랭킹 1위 저스틴 로즈 등이 출전하는 PGA투어 데저트클래식의 5일간 전부를 볼 수 있는 입장료는 고작 75달러에 불과하다. 이걸로 한주간의 대회 모두를 관람할 수 있다. 금요일과 토요일밤에는 음악 콘서트도 열린다. 많은 사람이 골프를 즐길 수 있게 한 미국 골프 대중화의 아버지 아이젠하워, 밥 호프 등의 골프 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난해 국내에서도 처음으로 남자프로 코리안투어에서 셀러브러티프로암 대회가 열려 박찬호, 이승엽, 이본, 김성수 등의 스포츠스타와 탤런트들이 프로선수가 함께 경기했다. 이런 대회가 늘어나고 확대될수록 골프 대중화의 물결은 빨라질 것이다. 올해는 이 같은 시도가 더 늘어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