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주리 기자] 약 2050억원을 들여 구입한 초호화 저택을 불과 4개월 만에 철거하는 일이 미국 부유층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 건축된 지 10년도 지나지 않은 고급 주택까지 허물어 새로운 집을 짓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이른바 ‘초고가 저택 철거’가 미국 부동산 시장의 새로운 현상으로 떠올랐다.
이들이 수천억원을 지불하는 대상은 저택보다 건물이 들어선 땅이다. 바닷가와 산 정상 등 희소성이 높은 입지의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 멀쩡한 건물까지 철거하는 것이다. 일부 부동산 중개업체는 아예 기존 건물을 허문 모습을 인공지능(AI)으로 구현해 매물을 홍보하고 있다.
지난 21일(현지시간)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를 중심으로 고급 저택을 매입한 뒤 철거하는 억만장자들이 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토지 공급이 제한적인 미국의 다른 부촌으로도 확산하는 추세다.
베르사유궁 본뜬 저택도 철거…6년 된 집 허물고 땅값 2650억원
대표적인 사례는 화장품 기업 에스티로더 가문의 억만장자 윌리엄 로더다.
그는 2023년 3월 팜비치에 있는 해안가 저택을 1억5500만달러(약 2050억원)에 매입했다. 미국의 유명 보수 성향 라디오 진행자였던 고(故) 러시 림보가 소유했던 부동산으로, 당시 팜비치 지역 최고 거래가를 기록했다.
1990년대 초 건설된 저택의 본채 면적은 약 2230㎡에 달했다. 프랑스 베르사유궁을 본뜬 대형 응접실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빌트모어 저택의 도서관을 재현한 서재가 마련돼 있었다. 천장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천사 장식도 설치돼 있었다.
그러나 로더는 저택을 구입한 지 4개월 만인 그해 7월 건물을 철거했다.
당시 주택은 건축된 지 약 30년이 지난 상태였지만, 로더가 주목한 것은 건물의 역사나 화려한 내부 시설이 아니었다. 대서양과 맞닿은 넓은 부지와 희소성이 높은 입지였다.
로더가 초호화 저택을 철거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그는 앞서 팜비치의 다른 해안가 부지에서도 주택 두 채를 철거했다. 이 가운데 한 채는 건축된 지 불과 6년밖에 지나지 않은 건물이었다.
로더는 해당 부지에 자신의 저택을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이후 림보의 부동산을 확보하면서 계획을 변경했다. 기존 건물을 철거해 확보한 약 3에이커 규모의 해안가 부지는 지난해 약 2억달러(약 2650억원)에 매각됐다.
건물을 없앤 땅 자체가 천문학적인 가격에 거래된 것이다.
미국 고급 주택 시장에서 이처럼 기존 건물보다 토지의 가치가 높게 평가되는 현상은 최근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부동산 감정평가사 조너선 밀러는 WSJ에 토지 가격이 상승할수록 전체 부동산 가치에서 건물을 새로 짓는 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작아진다고 설명했다.
특히 해안가 부촌은 신규 주택을 지을 수 있는 부지가 극히 제한적이다. 아무리 많은 돈을 들이더라도 원하는 위치에 새로운 땅을 만들어낼 수 없는 만큼 기존 주택을 통째로 매입해 철거하는 방식이 선택되고 있다.
멀쩡한 2120억원 저택도 철거 예정…AI로 빈 땅 홍보하는 중개업계
초고가 주택 철거 열풍은 최근에도 이어지고 있다.
WSJ는 지난 23일 부동산 개발업자 토드 마이클 글레이저와 데이비드 에델스타인이 팜비치의 해안가 저택을 약 1억6000만달러(약 2120억원)에 매입하기로 계약했다고 보도했다.
해당 부동산은 부동산 개발업자 고(故) 머리 굿맨 부부가 소유했던 약 2에이커 규모의 저택이다. 1980년대에 건설된 분홍색 건물로, 본채와 별채에 침실 12개를 갖췄다.
지난해 11월 약 1억8500만달러(약 2450억원)에 매물로 나왔으며 현재도 관리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개발업자들은 기존 저택을 철거하고 부지를 분할해 새로운 주택 두 채를 건설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다만 이번 거래는 부지를 두 개의 별도 세금 필지로 분할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어 아직 최종 완료되지는 않았다.
인근 마날라판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자동차용품업체 웨더테크 창업자 데이비드 맥닐은 지난해 기존 소유 부지 옆에 있는 미완공 대저택을 5550만달러(약 735억원)에 매입했다.
그는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인접한 토지와 합쳐 약 3.5에이커 규모의 해안가 부지를 확보했다. 해당 부지는 올해 4월 1억500만달러(약 1390억원)에 매각됐다.
맥닐은 지난 7월에도 자신의 거주지 옆에 있는 약 836㎡ 규모의 저택을 3600만달러(약 480억원)에 사들여 철거했다.
2004년께 건설된 이 주택 자리에는 운동시설과 녹지를 조성할 계획이다.
맥닐은 해당 주택이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시설이 낡았으며, 현대적인 수준으로 개보수하려면 약 1000만달러(약 132억원)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급 주택 시장의 변화에 맞춰 부동산 중개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일부 중개업체들은 기존 저택의 내부 시설이나 건축적 특징보다 철거 이후 토지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강조한다.
AI로 기존 건물이 사라진 모습을 구현하거나 새로운 저택이 들어선 가상 이미지를 제작해 구매자들에게 보여주는 방식이다.
오라클 창업자 래리 엘리슨도 1990년대 지어진 노스팜비치 저택을 약 1억6500만달러(약 2185억원)에 다시 매물로 내놓았다. 기존 건물의 상태는 양호하지만 새로운 구매자가 이를 철거하고 재건축할 가능성이 거론된다.
부동산 중개인 디나 골든테이어는 초고액 자산가들이 건축된 지 10년도 지나지 않은 저택의 디자인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원하는 위치에 땅을 확보한 뒤 주방과 욕실을 비롯한 실내 공간까지 취향에 맞춰 새롭게 구성하려는 수요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새집 짓는 탄소배출량, 美 250가구 연간 전력 수준…환경 논란도
초호화 주택을 철거하고 재건축하는 현상은 플로리다를 넘어 미국 다른 지역으로도 확산하고 있다.
부동산 플랫폼 레드핀에 따르면 텍사스주 휴스턴의 부촌인 벙커힐빌리지에서는 매물 가운데 15% 이상에 재건축이나 토지 가치와 관련된 표현이 등장했다.
버지니아주 피밋힐스에서도 이 같은 표현이 사용된 매물의 비중이 6.67%에 달했다.
억만장자가 아닌 일반 부유층에서도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원하는 형태의 주택을 새로 짓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플로리다주 데스틴 인근에서는 은퇴한 유통업계 임원들이 2020년 약 370만달러(약 49억원)에 해안가 부동산을 매입했다. 이후 기존 주택을 철거하고 5년에 걸쳐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완공된 주택은 약 1890만달러(약 250억원)에 매물로 나왔다. 희소성이 높은 해안가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기존 주택을 매입한 사례다.
그러나 멀쩡한 건물을 허물고 새로운 대저택을 짓는 방식에 대한 환경적 우려도 커지고 있다.
환경 컨설팅업체 WAP서스테이너빌리티는 약 929㎡ 규모의 주택을 철거하고 약 2787㎡ 규모의 새집을 건설할 경우 발생하는 탄소발자국이 미국 평균 가정 250곳에 1년간 전력을 공급할 때 발생하는 탄소배출량에 맞먹는다고 추산했다.
대형 주택 건설에는 콘크리트와 철강 등 상당한 양의 건축자재가 투입된다. 기존 건물을 철거하는 과정에서도 폐기물이 발생하고, 새 건물을 짓기 위한 자재 생산과 운송 과정에서 추가적인 탄소가 배출된다.
건설업계에서는 철거 현장에서 나오는 자재 상당 부분을 재활용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플로리다의 고급 주택 시공업자 로버트 버리지는 철거 현장에서 발생하는 자재 가운데 매립지로 보내지는 비중은 약 25%라고 밝혔다. 가전제품과 가구, 콘크리트, 금속 등은 기부하거나 재활용한다는 것이다.
미국 고급 부동산 시장에서는 기존 주택의 규모와 시설보다 토지의 위치와 활용 가능성이 거래가격을 좌우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특히 바닷가를 비롯한 희소성 높은 부지는 공급이 제한돼 있어 기존 건물의 상태와 관계없이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수천억원짜리 대저택을 구입해 철거하는 현상은 미국 초고액 자산가들의 부동산 투자에서 토지가 차지하는 가치가 얼마나 커졌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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