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역사편. 나폴레옹 2세
나폴레옹 1세의 ‘로마왕’ 후계자
모든 행운 바구니 담은 듯했지만
父몰락 후 타국에서 ‘새장’ 생활
이름 바뀌고 아버지도 부정 당해
옛 영광 찾지 못한 채 허무 요절
“내 탄생, 내 죽음…그것이 전부”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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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왕’의 탄생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황제가 아기를 트로피처럼 들어올렸다.
연단 밑에서는 모두가 같은 구호를 외쳤다. “황실의 아기, 로마왕 전하 만세!”라고. 태어나자마자 ‘로마왕’으로 불린 핏덩이의 이름은 나폴레옹 프랑수아 샤를 조제프 보나파르트. 훗날 나폴레옹 2세로도 불릴, 프랑스 제1제국의 유일한 적통 후계자였다. 그렇다면 그를 들고 자랑하듯 선 아버지는? 명성으로도, 악명으로도 널리 알려진 나폴레옹 1세였다. 1811년 6월9일. 이날 나폴레옹 2세를 위한 세례식이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열리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측근들은 물론, 귀족과 대중까지 빼곡하게 모인 순간이었다.
사실, 아기 나폴레옹 2세를 나폴레옹 1세가 보란듯 들어올린 건 이번 행사의 틀을 깬 행위였다. 세례식날만큼은 부모든, 황제든 상관없이 점잖게 식순부터 보는 게 관례였다. 그러나 나폴레옹 1세가 누구인가. 7년 전 본인의 대관식에서도 교황이 든 왕관을 낚아채 직접 머리에 쓴 자이지 않은가. 그는 그때도 관례와 전통 따위 가볍게 무시했다. 이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을 이번에도 드러낸 격이었다.
세례식은 아름답고 인상적이었다.
황제는 (…) 대중에게 보이기 위해 (아이를)두 번 높이 들어올렸으며 (…)
황제의 얼굴과 태도에서는 큰 만족감이 보였다.
이는 당시 프랑스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 카를 필리프 추 슈바르첸베르크 후작의 기록이다.
그런가 하면, 나폴레옹 1세가 오랜 의식을 깨면서까지 관례를 깬 데는 정치적 이유도 있었다.
다들 모였으니 똑똑히 보라. 너희들이 나 다음으로 섬겨야 할 군주를 기억하라. 이런 선언을 위한 무언의 의사소통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아버지 나폴레옹 1세의 사랑과 후광을 가득 안은 아기, 나폴레옹 2세.
가까운 미래, 그는 무엇이든 손에 쥘 수 있을 듯했다.
외모도 벌써부터 사랑스러웠다. 기록에 따르면 “금색의 굵은 곱슬머리는 푸른 눈동자와 절묘하게 어울렸고”, “볼은 통통하고 피부에는 티없는 분홍빛이 감돌았으며”, “등허리는 다부지고 땅땅했다.” 조건마저 좋았다. 황제이자 전쟁의 대가인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 마리 루이즈는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2세)의 딸이었다. 즉 친가에서는 재능과 야망, 외가로부터는 중부유럽 패권을 쥔 합스부르크가(家)의 피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아울러 무엇보다도, 나폴레옹 1세가 그를 자신처럼 키우려는 의지가 강했다. 그는 아들 나폴레옹 2세를 띄워 기어코 ‘보나파르트 시대’를 이어갈 생각이었다. 나폴레옹 1세는 세례식에서도 그랬듯 기회만 되면 나폴레옹 2세의 존재감을 보이려고 했다. 프랑스 화가 오라스 베르네가 그의 남다른 집착을 묘사했다. <보로디노 전투 전야, 제라르가 그린 로마왕(나폴레옹 2세)의 초상화를 참모 장교들에게 보여주는 나폴레옹 1세>가 그것이다. 이는 나폴레옹 1세가 곧 전투를 앞두고도 병력을 불러 나폴레옹 2세의 초상화를 자랑하는 장면이다. 나폴레옹 1세의 눈빛은 진지하다. 얼핏 보이는 건 벌거벗은 금발 아기의 모습이지만, 참모와 장교 모두 목을 빼고서라도 금빛 액자에 눈을 둘 수밖에 없다. 나폴레옹 1세는 여기서도 선언하는 듯보인다. 이 아이가 너희들이 따라야 할 미래의 지휘관이라고. 그러니 나를 대하듯 복종하고 충성하길 바란다는 식으로.
꼬마 로마왕은 이미 모든 행운을 한 바구니에 담은 듯보였다.
그는 자신의 탄생과 죽음 사이를 환희와 영광으로 잔뜩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 그랬는데….
사랑과 관심의 시절들
보시오. 제국의 후계자이자 로마왕이오!
그날의 세례식이 있기 근 3개월 전인 1811년 3월20일, 오전 9시20분. 나폴레옹 1세는 세상 빛을 본 나폴레옹 2세를 보자마자 고관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때부터도 기쁨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들뜬 모습을 보인 것이다.
파리 튈르리궁에서 출생한 이 아기는 키 50.8㎝에 체중은 4㎏ 정도였다. 파리 시내에 축포가 터졌다. 21발은 여아의 탄생을 뜻했다. 그렇기에 22발째에 이어 포성이 연달아 울리는 순간, 나폴레옹 지지층을 중심으로 “드디어 황태자가 태어나셨다!”는 환호성이 또 나왔다.
세례식과 전투 직전 진지에서의 장면이 예고했듯, 나폴레옹 2세의 유년 시절은 사랑과 관심으로 가득했다.
나폴레옹 1세는 아들에게 거듭 입을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두툼한 보고서를 읽을 때도 가슴에는 아들을 안고있기 일쑤였다. 낮은 눈높이에 맞춰 바닥을 함께 기는가 하면, 때로는 다소 엉뚱한(일부러 넘어뜨리고, 식사 중 얼굴에 음식물을 묻히는 식의) 장난도 쳤다. 위엄있는 황제 또는 전장의 지휘관으로 있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들이었다. “(…) 마치 또 한 명의 어린아이처럼 같이 놀았다.” 이는 나폴레옹 1세와 가까이 있던 클로드-프랑수아 드 메네발 남작의 기록이었다. 튈르리궁에 꾸며진 나폴레옹 2세의 방 안 장식품은 대개 녹색이었다. 이 또한 제국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나폴레옹 2세는 이곳에서 작은 깃발, 그리고 아기용 북과 트럼펫 등을 갖고 놀았다. 그래도 피는 속이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낀 장난감은 붉은 벨벳 안장이 있는 대형 말이었다. 양 또는 염소 두 마리가 끄는 작은 마차에 올라 행진하듯 산책로를 달리는 일도 좋아했다. 조금 더 큰 후에는 근위대 군복을 맞춰입고선 ‘아빠처럼’ 행동하는 일 또한 즐겼다.
나폴레옹 2세는 두뇌도 괜찮아보였다.
걸음마는 생후 18개월쯤으로 비교적 늦게 뗐지만, 읽고 쓰고 외우는 일 등에는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다. 사랑받고 자란 아이가 으레 그렇듯, 나폴레옹 2세는 어릴 적부터 쾌활한 어투와 활기찬 행동거지도 보였다. 웃음소리는 크고, 말을 이어할 때는 손짓을 크게 하는 버릇도 있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정확히는, 딱 여기까지만 좋았다. 아무도 쉽게 상상하지 못했다. 그토록 단단해보이던 나폴레옹 1세 체제가 그렇게 빨리, 이처럼 단번에 무너지리라곤.
몰락하는 ‘보나파르트 시대’
나폴레옹 1세의 급격한 몰락 원인으로는 지금도 여러 사건이 꼽힌다.
그중 하나로는 보로디노 전투에서 일군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이겼지만 상처뿐인 승리)’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앞서 나온 오라스 베르네의 그림, 나폴레옹 1세가 군 간부에게 나폴레옹 2세 초상화를 보여주는 장면 직후 벌어진 일이었다. 1812년 9월의 그날. 나폴레옹 1세의 프랑스군은 그가 ‘세계 지배의 마지막 걸림돌로 여긴’ 러시아군과 보로디노에서 맞서 분명 이겼다. 이제 모스크바가 코 앞이었다. 그러나 프랑스군도 이 전장에서 3만5000여명(많게는 6만명)가량 병력을 잃었다. 이는 4만~5만명가량의 병력 손실을 본 러시아군 못지않은 규모였다. 프랑스군은 이 전투 후 모스크바 땅을 밟긴 했다. 다만, 단지 그뿐이었다. 뒷심이 부족했다. 뒷심을 낼 여력도 없었다. 러시아군은 항복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혹한은 층층이 쌓였다. 결국 나폴레옹 1세는 마지못해 퇴각 명령을 내린다. ‘전쟁의 신’이 승부수로 건 러시아 원정은 실패로 끝맺었다.
영국과 러시아, 프로이센 등을 주축으로 한 대(對)프랑스 동맹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지금이 프랑스군을 몰아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여겼다.
프랑스군도 이들에 맞서 최후의 저항을 벌였지만, 기울어진 흐름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과는 패배였다. 1814년 4월. 퇴위한 나폴레옹 1세는 엘바섬으로의 유배를 통보받아야 했다.
그사이 나폴레옹 2세는?
나폴레옹 1세의 아내 마리 루이즈는 애초 아들 나폴레옹 2세와 함께 파리에서 버틸 생각이었다. 이제 황태자 나폴레옹 2세가 황위에 오르고, 본인은 섭정을 맡을 흐름으로 봤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나폴레옹 1세는 엘바섬 유배 직전 나폴레옹 2세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조건으로 물러서고자 했다. 다만, 이는 그만의 바람이자 환상이었다.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연했다. 당장 대프랑스 동맹군이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나폴레옹이란 이름 자체가 트라우마였다. 어떠한 흔적과 가능성도 남길 마음이 없었다. 동맹군은 나폴레옹 1세를 거듭 압박한다. 본인 아닌 후손의 권리까지 모두 포기하겠다는 취지의 서약을 쓰게끔 한다. 나폴레옹 1세는 유배지로 떠나기 전 거기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나폴레옹 2세도 더는 프랑스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겨우 피어나려고 한 나폴레옹 2세라는 명칭조차 한순간 손짓에 연기로 흩어졌을 뿐. 이제는 버티다간 외려 정치적 공격만 받고, 최악 상황에선 암살의 위험까지 염두에 둬야 했다. 그는 어머니 마리 루이즈와 함께 궁을 비웠다. 떠난 곳은 오스트리아 빈이었다. 마리 루이즈의 아버지, 나폴레옹 2세의 입장에선 외할아버지가 되는 프란츠 1세 황제가 있는 땅이었다. 애석하게도, 믿을 구석은 여기뿐이었다. 이제 나폴레옹 2세는 영영 아버지 나폴레옹 1세를 보지 못한다. 조국 프랑스를 다시 찾아가지도 못한다. 그랬다. 그의 모든 것이 딱 여기까지였다. 나폴레옹 2세의 나이는 겨우 세 살이었다.
‘나폴레옹’ 아닌, ‘프란츠’로
나폴레옹 2세의 집은 이제 빈의 쇤부른 궁전이었다.
그곳은 황금빛 노란색이 가득 칠해진 화려한 건축물이었다. 외할아버지 프란츠 1세는 나폴레옹 2세를 진정성 있게 보듬었다. 원래 손주 사랑은 자식만큼이나 깊고 진한 법이다. 황제가 직접 베푸는 호의와 부족할 게 없는 시설. 그러나 나폴레옹 2세는 이런 환경에서도 곧 우울한 모습을 보인다. 당시 오스트리아 실세로 떠오른 인물,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영향이 컸다.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 2세를 엘바섬에 갇힌 늑대와 피가 같은 새끼 늑대로만 봤다. 언젠가는 나폴레옹 2세가 아닌 ‘제2의 나폴레옹’이 될 수 있으리라고도 여겼다. 가만히 두면 겨우 억누른 프랑스의 새로운 구심점이 될 수도 있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선 싹부터 밟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나폴레옹 2세를 끈질기게 구속했다.
가령 나폴레옹 2세에게 앞으로는 독일어로만 말하게끔 유도했다. 독일어로 된 책만 읽을 수 있도록 환경도 조성했다. 프랑스어로 말하는 일, 프랑스어로 쓰인 책을 읽는 일은 모두 탐탁지 않게 봤다. 나폴레옹 2세는 그곳에서 ‘프란츠’라고 불렸는데, 메테르니히는 그가 ‘나폴레옹’ 아닌 오직 그 이름에만 반응하도록 다그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한편 나폴레옹 1세에 대한 모든 소식과 정보는 틀어막고자 했다. 나폴레옹 1세에 대해선 대포로 유럽땅을 위협한 용병대장 정도로만 알게끔 말을 흘리기도 했다는 설도 있다.
네 살에게는 잔혹한 세계
1815년, 2월26일. 그사이 나폴레옹 1세는 엘바섬을 탈출한다.
3월20일. 파리로 입성해 다시 황제의 관을 쓴다. 6월18일. 영국과 프로이센 등 대프랑스 연합군은 돌아온 나폴레옹 1세에 맞서 워털루 전투를 벌인다. 그 결과, 대프랑스 연합군이 정말 ‘간신히’ 승리한다. 6월22일. 나폴레옹은 재차 퇴위와 양위(讓位)를 선언하고 물러선다. 하지만, 프랑스 임시정부는 나폴레옹 2세를 차기 황제로 불러들이려는 실질적 조치를 하지 않는다.
나폴레옹 2세는, 자기 아버지가 벌인 격동의 백일천하를 잘 몰랐거나 아주 어렴풋이 알았을 것이다. 지금도 효력 여부에 대해 논란 여지가 상당하지만, 본인이 재차 자기 아버지의 입에서 황제로 거론된 일마저도 잘 몰랐을 터였다. 심지어 나폴레옹 1세가 복위 시점에서 아내와 자식을 다시 불러들이려고 했다는 점 또한. 한때 나폴레옹 1세에게 매달리다시피 했던 아내, 마리 루이즈는 그 통보를 자기 선에서 이미 차단한 상태였다. 왜? 정치적 사정과 왕가의 압력도 있었지만, 그 사이 다른 남자가 생긴 점 또한 큰 이유로 작용했다. 자신의 감시 겸 호위를 맡은 나이페르크 백작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 또한 메테르니히가 짠 일종의 미인계 작전이었을 가능성이 학계 일각에서는 거론된다. 물론 확정된 사실은 아니다.
어쨌건 나폴레옹 2세는 이로 인해 아버지를 보지 못하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멀어지고, 그사이 돌아갈 곳 또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이때 나이는 아직도 고작 네 살이었다.
고작 네 살이라지만, 그 네 살이 볼 수 있는 세계는 생각보다도 훨씬 깊고 넓은 법이다.
나폴레옹 2세는 본인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지를 차츰 알아차렸다. 늘 자신에게 웃어주는 외할아버지 프란츠 1세조차 눈만 마주치면 복잡한 표정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실제로 그랬다.
프란츠 1세는 나폴레옹 2세의 크고 매서운 눈을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역시나 그놈, 나폴레옹 1세가 떠오르는 탓이었다. 프란츠 1세는 나폴레옹 1세를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말만 사위일 뿐, 사실은 원수와 다를 바 없었다. 앞서 그에게 마리 루이즈를 시집 보낸 일부터도 일방적 요구에 따른 사실상 굴복의 결과였다. 이보다 더 앞서서는 그의 군대가 나폴레옹 1세의 프랑스군과 맞서 궤멸에 가까운 참패를 맞은 적도 있었다. 1818년, 나폴레옹 2세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라이히슈타트 공작 작위를 받았다. 이 또한 출신에 어울리는 예우로 볼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외려 신분 억제책이었다. 나폴레옹 1세의 색채, 나아가 프랑스 황태자의 성분을 희석하기 위한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나폴레옹 2세와 함께 파리에서 온 프랑스인 수행원은 하나 둘 잘리고 있었다.
“아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울었다”
(…) 나는 조용한 저녁 시간을 택했다.
아버지를 보거나 알아본 적도 없는 어린아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봤다.
이것은 1821년, 당시 나폴레옹 2세를 가르친 가정교사가 그에게 나폴레옹 1세의 부고를 전한 직후 쓴 글이다.
열 살이었던 나폴레옹 2세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활화산 터지듯 울었다. 더는 울 수 없을 때까지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울었다. 실제로도 나폴레옹 2세에게 나폴레옹 1세의 얼굴을 완전히 기억하지는 못했다. 그때는 너무 어렸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아름다운 과거이자, 존경할 수 있는 현재이자, 언젠가는 함께 나아갈지 모를 미래의 상징처럼 여기고 있었다. 메테르니히가 그렇게나 나폴레옹 2세의 눈과 귀를 가리려고 했지만, 지난 수년간 어떻게든 아버지의 정보를 캐낸 것이었다. 특히 나폴레옹 1세와 세인트헬레나섬을 동행했던 라스 카스 백작이 쓴 《세인트헬레나 회상록》을 구해 읽곤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나폴레옹 1세의 삶과 여정, 철학 등이 담긴 기록물이었다. 천재면서 악마, 특출한 전략가이자 잔혹한 침략자, 무엇보다도, 압도적 승률을 올렸던 전쟁의 대가.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나폴레옹 2세는 그런 자기 아버지를 거울로 삼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죽어버렸다. 쓸쓸히, 허무하게.
나폴레옹 2세는 이제 기댈 곳도, 기대할 구석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스스로 힘을 더 키워야한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 마리 루이즈는 문제의 그 백작과 아예 살림을 차리는 모습이었다.
만약 조제핀 황후(나폴레옹 1세의 첫 번째 아내)가 내 어머니였다면 말이야.
우리 아버지는 세인트헬레나(나폴레옹 1세의 2차 유배지)에 묻힐 일도 없었고, 나도 빈에 있지 않았을 거야.
우리 어머니는 (…) 너무 연약하다고 봐.
그 여자는 내 아버지의 아내가 될 자격이 없었어.
나폴레옹 2세는 언젠가 이런 말까지 할 만큼, 이제는 어머니도 믿지 않는 상황이었다.
“나의 탄생과 나의 죽음, 그것이 전부다”
결과적으로 나폴레옹 2세는 나폴레옹 1세처럼 될 수 없었다.
강해져야 한다는 강박, 아버지를 닮아야 한다는 집착은 그를 더더욱 구석으로 내몰았다. 나폴레옹 2세는 1823년 오스트리아군 생도로 나섰다.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그는 강도 높은 교육과 훈련에 임했다. 특히나 수학에도 재능을 보였는데, 이는 나폴레옹 1세의 어릴 적과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몸도 커졌다. 키가 1년에 2인치, 3인치, 심지어는 4인치(10.16㎝)씩 커지기도 했다고 한다. 몸과 펜을 놀리지 않을 때는 책을 봤다. 아버지의 행적이 담긴 글부터, 아버지에 이어 우상으로 여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기록까지 꼼꼼하게 읽었다. 나폴레옹 2세는 점점 더 나폴레옹 1세의 이목구비를 닮고 있었다. 외모로만 보면 자기 아버지보다도 나았다. 열일곱 무렵, 키는 어느덧 180㎝에 이르렀다. 왕족다운 위엄, 나아가 추락한 왕족 특유의 우수와 사색이 깃드는 분위기도 있었다. 그러니까, 생김새와 기운 모두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이는… 나폴레옹 1세의 악몽을 잊지 못한 그의 적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기 충분했다. 프란츠 1세와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 2세에게 이름을 알릴 만한 굵직한 임무를 맡기지 않았다.
다만, 나폴레옹 2세의 신체는 그의 신분만큼 몰락하고 있었다. 독일계 오스트리아인 주치의는 나폴레옹 2세가 허약해지고 있는 데 대해 “급격한 성장”을 원인으로 꼽았지만, 다른 이유도 여럿 있었을 것이다. 가령 화와 울분, 답답함과 압박감 등의 스트레스 같은. 나폴레옹 2세는 어느덧 어지럼증과 원인불명의 신경쇠약 증상도 겪고 있었다.
주치의는 이에 격렬한 운동을 피하기를 권했지만, 나폴레옹 2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급했다. 빨리 아버지를 따라잡아야 했다. 하루빨리 자기 손으로 옛 영광을 되찾아야 했다. 그런 마음일 뿐이었을 수도 있다. 1832년 4월. 나폴레옹 2세는 병약해진 몸을 이끌고 또 한 번 긴 시간 승마에 임했다. 이튿날 폐렴 진단을 받았는데, 몸은 회복될 기미 없이 나날이 나빠지기만 했다. 메테르니히는 죽어가는 나폴레옹 2세를 보고도 특유의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그를 이탈리아처럼 따뜻한 기후의 땅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을 불허했다.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를 ‘로마왕의 부활’ 신화를 염려했을 가능성이 있다. 나폴레옹 2세는 그렇게 죽었다. 그해 7월22일의 일이었다. 스물한 살, 숨진 곳은 쇤부른 궁전이었다. 결정적 사인은 결핵으로 알려져 있다.
외할아버지 프란츠 1세는 그의 사망을 전해듣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것이 다였다. 그의 죽음에 대해선.
(…)요람에서 그는 로마왕이라는 이름으로 경의를 받았다.
그는 뛰어난 지적 능력과 훌륭한 신체 조건을 타고 났다.
키가 크고 용모는 젊음의 매력으로 빛났으며 (…)
군사학 연구와 훈련에도 비범한 재능을 보였다. (…)
이는 나폴레옹 2세의 죽음 직후 만들어진 문장이라고 한다.
위의 말 모두 칭송뿐인 듯하지만, 이 모든 게 그의 죽음을 앞당기고 부추겼다는 게 아이러니할 뿐이다. 그는 자신의 탄생과 죽음 사이를 환희와 영광으로 채우지 못했다. 나폴레옹 2세는 숨지기 며칠 전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토록 젊고 쓸모없으며 이름도 없는 삶을 끝내야 하는가.
나의 탄생과 나의 죽음, 그것이 내 이야기의 전부다.
그는 ‘독수리’로도 불렸던 아버지에 빗대 ‘레글롱(L’Aiglon·아기 독수리)‘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리고, 지금도 아기 독수리로만 기억되고 있다. 그는 비상을 약속받은 아이였다. 그 아기 독수리는 끝내 날개를 펼치지 못했다.
참고자료
앤드루 로버츠 ,나폴레옹, 지식향연
에밀 루트비히, 나폴레옹, 비타민북
나폴레옹 전쟁, 그레고리 프리몬-반즈, 토드 피셔, 플래닛미디어
나폴레옹 2세, 나폴레옹재단
Castelot, Andre., Napoleon‘s Son, Hamish Hamilton
Oddie, E. M., Napoleon II: King of Rome, Sampson Low, Marston & Co.
yul@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