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프란시스코 고야

자기 자식 잡아먹는 신 사투르누스

가장 참혹한 그림으로 꼽히는 작품

전쟁 탓? 인류 실망? 제작 미스터리

‘검은 그림들’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프란시스코 고야,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일부 확대), 1820~1823, 혼합 재료, 146x83cm, 프라도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프란시스코 고야,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일부 확대), 1820~1823, 혼합 재료, 146x83cm, 프라도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신들의 이름은 그리스식을 따르되, ‘사투르누스’는 그림 이름에 맞춰 로마식으로 표기했습니다.

※고야의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의 경우 보는 이에 따라 다소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는 만큼, 작품의 일부만 소개합니다. 넓은 마음으로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보는 순간 ‘섬찟’

사투르누스의 만행

프란시스코 고야,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일부), 1820~1823, 혼합 재료, 146x83cm, 프라도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프란시스코 고야,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일부), 1820~1823, 혼합 재료, 146x83cm, 프라도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아기를 내놓으시오.

농경의 신 사투르누스가 재촉했다.

“나는 그 아이를 삼켜야 하오. 그것이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오.”

다산과 풍요의 여신 레아. 사투르누스의 아내였던 그녀는 막 아이를 낳았다. 이런 가운데, 남편이란 작자가 가장 먼저 한다는 말이 그 따위였다. “꼭 그래야만 해요?” 레아가 물었다. “예언을 벌써 잊었소?” 그 타박에도, 사투르누스는 손짓과 함께 이렇게 되물을 뿐이었다.

프란시스코 고야,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일부), 1820~1823, 혼합 재료, 146x83cm, 프라도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프란시스코 고야,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일부), 1820~1823, 혼합 재료, 146x83cm, 프라도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사투르누스는 모든 신의 왕이었다.

이는 아버지이자 하늘의 신, 우라노스를 몰아내고 힘겹게 얻은 칭호였다. 앞으로는 그의 시대가 영원히 펼쳐지리라고 믿었다. “너도 네 자식에게 똑같이 당할 것이다.” 어머니,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저주하기 전까지는.

가이아의 분노를 산 건 사투르누스의 잘못 때문이었다. 가이아는 몇 번이고 “내 자식이자 네 형제, 퀴클롭스와 헤카톤케이레스를 도와야 한다”고 했지만, 사투르누스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실제로 마주한 두 존재는 반갑기보다는… 두려웠다.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퀴클롭스의 재능, 50개의 머리와 100개의 팔을 가진 헤카톤케이레스의 압도적 힘은 분명 위협적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아버지가 이들을 왜 타르타로스(나락·명계의 맨 밑바닥)에 가뒀는지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사투르누스 또한 아버지와 똑같이 했다. 계속 그곳에 감금했다. “너도 결국은 네 아버지와 똑같구나.” 가이아가 이러한 말과 함께 증오 섞인 예언을 가한 이유였다.

프란시스코 고야,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일부), 1820~1823, 혼합 재료, 146x83cm, 프라도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프란시스코 고야,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일부), 1820~1823, 혼합 재료, 146x83cm, 프라도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 그리고 제우스.

사투르누스는 레아가 아기를 낳는 족족 포대기를 빼앗았다. 망설임도 없이 꿀꺽 삼켰다. 내가 직접 봤고, 내가 직접 먹었으며, 당장 내 뱃속에 다 있다…. “자식을 줄줄이 여섯이나 잡아먹은 괴물”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앞으로도 이렇게만 한다면 후환은 없을 터였다.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1819~1823년 무렵 말년작,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는 보는 순간 섬찟한 감정을 안긴다.

백발노인은 흰자가 크게 보일 만큼 눈에 힘을 준다. 입을 벌린 채 먹는 건… 본인보다 훨씬 작은 생명체다. 두 팔로 허리를 쥐고, 무릎은 땅에 댄 채 허겁지겁 물어뜯는다. 이미 신체 일부는 없다. 피가 흐르는 일부 또한 그렇게 될 운명이다. 이는 사투르누스 이야기를 다룬 가장 참혹한 작품으로 꼽히기도 한다.

고야는 잔인한 이야기에 심취하는 악취미를 갖고 있었는가.

피와 절단 따위를 거듭 생각해야 하는 강박 내지 트라우마가 있었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기에 이런 구상을 할 수 있었을지. 이것은 고야가 왜 이처럼 충격적인 결과물을 낼 수밖에 없었는지를 추적하는 글이다.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다

아기자기한 그림의 ‘반전’

프란시스코 고야, 양산, 1777, 캔버스에 유채, 104x152cm, 프라도 미술관[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프란시스코 고야, 양산, 1777, 캔버스에 유채, 104x152cm, 프라도 미술관[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놀라운 건, 고야가 처음부터 이같은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외려 같은 이가 그린 게 맞는지 의심이 갈 만큼 밝은 작품을 내놓은 시기가 있었다는 점이다. 가령 <양산>이 그렇다. 당시 유행했던 화려한 복장의 사내가 프랑스식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에게 양산을 씌워주는 장면이다. 1777년, 고야가 보다 젊은 시절에 그린 이 그림에는 산뜻한 노란색과 푸른색, 초록색이 어우러져 있다. 느낄 수 있는 건 설렘과 경쾌함 뿐이다.

프란시스코 고야, 짚 인형, 1791~1792, 캔버스에 유채, 267x160cm, 프라도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프란시스코 고야, 짚 인형, 1791~1792, 캔버스에 유채, 267x160cm, 프라도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고야는 1746년 스페인 아라곤의 푸엔데토도스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금 도금업자였다. 어머니는 귀족 출신이었다. 집안 자체는 하위 중산층이었다. 고야는 열네 살 무렵부터 그림을 배웠다. 이름을 댈 만한 첫 선생은 호세 루산이었다. 그의 특기는 역사화와 종교화였다. 그 밑에서 4년간 주로 한 일은 판화 모사였다. 이후 훗날 본인의 표현대로 “나만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곁을 떠났다.

시라고사를 거쳐 마드리드로 온 고야가 새로운 스승으로 삼은 이는 안톤 라파엘 멩스였다. 그는 데생의 대가였다. 그러나 서로 합이 맞지는 않았는지, 관계가 썩 좋지 못했다.

그 시절 고야의 숙원이 있었다. 산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게 그것이었다. 고야는 야심이 있고, 이에 호응하는 정열도 품은 성향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두 요소에 나름의 실력까지 갖추고도 바람을 이루지 못했다. 1763년과 1766년 등 두 번이나 문턱을 넘봤으나 돌아오는 건 불합격 통보였다.

고야는 멈추지 않았다.

모은 돈을 쏟아 이번에는 로마로 갔다. 옛 장인의 손길이 그득한 그곳에서 다시 공부했다. 궁정 화가로 이름을 날린 프란시스코 바예우에게 가르침도 받았다. 수확은 있었다. 바예우는 장식화에 일가견이 있었다. 특히나 색채 선정에 과감했다. 그것을 모조리 빨아들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여동생 호세파와 결혼도 할 수 있었다. 낙방이 돌아보니 전화위복으로 다가온 사례였다.

수석 궁정 화가로 출세

실력·미래 확신 감정 물씬

프란시스코 고야, 가을, 1786, 캔버스에 유채, 34x24.2cm, 클라크 미술관[Clark Art Institut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프란시스코 고야, 가을, 1786, 캔버스에 유채, 34x24.2cm, 클라크 미술관[Clark Art Institut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고야는 일자리도 얻었다.

왕립 공장에서 만들 태피스트리의 밑그림을 그리는 작업이었다. 고야는 금세 유명해졌다. 소재 선정부터 선을 긋고 색을 칠하는 일. 모두 그보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스스로는 어디까지 인정하고 싶을지 알 수 없지만, 그간 거쳐 간 모든 인물과 경험이 도움을 줬다. 고야는 5년간 40점 이상의 밑그림을 만들었다. 상당수는 왕궁의 벽면 장식에 쓰였다. 후원자는 나날이 늘었다. 실세 귀족의 관심도 끌었다.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프란시스코 고야, 산 이시드로의 초원, 1788, 캔버스에 유채, 41.9x90.8cm, 프라도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프란시스코 고야, 산 이시드로의 초원, 1788, 캔버스에 유채, 41.9x90.8cm, 프라도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이 무렵 고야는 <산 이시드로의 초원>을 그렸다. 마드리드의 수호성인 산 이시드로를 기리는 축제 풍경이었다. 아기자기한 로코코풍 분위기가 깃든 작품이다. 고야는 탁 트인 평야, 가득한 인물과 근사한 의상으로 그림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참신한 색감 선정, 풍경화와 풍습화를 한 화폭 속 자연스럽게 녹이는 시도도 인상적이었다. 본인의 들뜸과 설렘, 아울러 실력과 미래에 대한 확신도 옮겨심은 듯했다.

프란시스코 고야,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 1800~1801, 캔버스에 유채, 280x336cm, 프라도 미술관 [Museo Nacional del Prado,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프란시스코 고야,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 1800~1801, 캔버스에 유채, 280x336cm, 프라도 미술관 [Museo Nacional del Prado,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그런 마음을 가질 만했다.

이 그림을 그리기 2년 전인 1786년, 고야는 꿈에 그리던 카를로스 3세의 궁정 화가로 이름을 올렸다. 카를로스 4세 통치기인 1799년에는 수석 궁정 화가로 위상을 더 높였다. 그는 출세했다. 꽤 돌고 돌긴 했지만, 끝내는 큰 열매를 맺었다. 원래, 마냥 순탄하게 성공한 이보다 두어 번 실패를 겪은 후 성공한 사람이 더 자신감을 갖는 법이다. 앞으로는 국왕과 왕비, 실세 귀족의 초상화를 그리며 돈과 명성을 쌓아 올릴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나폴레옹軍의 침공

화염과 파괴가 이어지고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2일, 1814, 캔버스에 유채, 268.5x347.5cm, 프라도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2일, 1814, 캔버스에 유채, 268.5x347.5cm, 프라도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180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프랑스군이 스페인을 침공한다.

나폴레옹은 당시 스페인의 혼란상을 이용할 마음이었다. 그 무렵 스페인의 국왕은 페르난도 7세였다. 아버지이자 직전 군주였던 카를로스 4세는? 그의 반대파가 모인 봉기를 등에 업고 몰아내버렸다. 나폴레옹은 이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스페인을 집어삼킬 요량이었다. 명분은 왕실의 분란 중재였다. 실제로 내세운 건 압도적 군사력이었다.

나폴레옹은 그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의 새로운 국왕, 호세 1세로 옹립했다. 페르난도 7세는 알아서 왕위를 포기하게끔 강요했다. 스페인 국민은 나폴레옹의 독단적 결정에 분노했다. 이들 입장에선 프랑스가 외국인을 왕으로 앉힌 셈이었다. 국민은 또 한 번 들고 일어섰다. 이번에는 반(反)프랑스의 깃발 아래 저항 운동을 했다. 그해 5월2일, 국민은 마드리드 왕궁 광장과 정원 일대로 모였다. 카를로스 4세의 막내 아들, 돈 프란시스코 파울로 왕자의 프랑스 압송을 막기 위해서였다. 프랑스군은 이러한 민중의 행보를… 군대와 전투 치르듯 무력으로 탄압했다. 총을 쏘고 대포까지 쐈다. 서로가 서로를 베고 꿰뚫었다. 끝내, 프랑스군의 승리였다. 다음 날인 5월 3일, 전날 시위에 나선 수백명이 총살당했다.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3일, 1814, 캔버스에 유채, 268x347cm, 프라도 미술관[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3일, 1814, 캔버스에 유채, 268x347cm, 프라도 미술관[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그러나, 봉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스페인 곳곳에서 횃불이 올랐다.

주먹을 쥔 스페인 국민은 프랑스의 적 영국, 포르투갈과 손잡은 채 기꺼이 게릴라군 역할을 수행했다. 프랑스군이 숨을 돌리는 숲과 들을 거듭 기습했다. 이들의 보급로를 끊고 태우기를 반복했다. 양측은 엎치락뒤치락했다. 격분한 나폴레옹이 직접 군대를 몰고 온 적도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런 나폴레옹이 너무 욕심을 부린 것이었다. 승리의 여신이 미소 지은 쪽은 반프랑스 동맹이었다. 1814년까지 벌어진 전쟁, 이는 이베리아반도 전쟁으로도 불린다. 나폴레옹 몰락의 시발점으로 꼽히기도 한다.

‘고대하던 왕’,

과거로 외려 역행하다

프란시스코 고야, 왕실 예복을 입은 페르난도 7세의 초상, 1814~1815, 캔버스에 유채, 208x142.5cm, 프라도 미술관[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프란시스코 고야, 왕실 예복을 입은 페르난도 7세의 초상, 1814~1815, 캔버스에 유채, 208x142.5cm, 프라도 미술관[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나폴레옹의 압박에 물러섰던 페르난도 7세가 스페인의 국왕으로 돌아왔다.

일명 ‘고대하던 왕’(El Deseado)으로도 칭송받은 페르난도 7세가 해방국 스페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았다. 나이도 아직 스물아홉. 그는 젊음과 경험, 핍박의 서사까지 갖춘 군주였다. 정열과 절박함을 앞세워 나라를 개혁 국가로 이끌 기회를 잡은 지도자였다.

전부 다 허상이었다. 페르난도 7세는 암군이었다. 훗날 “토끼의 심장을 가진 호랑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무능력한 사람이었다. 그가 가장 열정적으로 임한 건 종교 재판이었다. 앞으로 나아가기에도 급한 시간, 외려 뒤로 질주하는 행보였다. 짙은 먹구름이 걷히자 이번에는 지독한 먹구름이 드리웠다.

고야. 궁정 화가 고야는 이 모든 흐름을 직접 겪고,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처형과 학살의 소식을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그림은 본격적으로 ‘그로테스크’해졌다.

①사투르누스 :

프랑스군? 지금의 왕실?

프란시스코 고야, 마녀의 안식일, 1821~1823, 캔버스에 유채 및 벽화, 140x438cm, 프라도 미술관 [artchive.com,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프란시스코 고야, 마녀의 안식일, 1821~1823, 캔버스에 유채 및 벽화, 140x438cm, 프라도 미술관 [artchive.com,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막 태어난 자기 자식을 꿀떡꿀떡 삼켜대는 사투르누스는 결국 당하고 만다. 여섯 번째, 마지막으로 뱃속에 집어넣었다고 여긴 자식 제우스에게.

사실, 그때 사투르누스가 입에 집어넣은 건 포대기로 싼 돌이었다. 그의 만행을 보다 못한 아내 레아가 벌인 일이었다. 제우스는 사투르누스의 눈을 피해 힘껏 자랐다. 어느덧 장성해졌다. 고대하던 보복에 나섰다. 제우스와 사투르누스는 긴 시간 싸웠다. 제우스는 이 과정에서 사투르누스를 속이는 데 성공했다. 지금껏 삼킨 제우스의 형제를 도로 토하게 만든 것이다. 돌덩이에 이어 포세이돈부터 헤스티아까지 역순으로. 제우스가 이들과 힘을 모아 사투르누스의 목을 꽉 누른다. 그를 타르타로스에 가둬버린다. 사투르누스의 다음 행보를 말하는 전승도 일부 있지만, 예로부터 그는 잔혹한 지도자의 표본으로 통하곤 했다.

고야는 프랑스와 나폴레옹 일당을 이 사투르누스에 빗대 그렸을까.

조국 스페인을 집어삼키려던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식으로 보복을 꾀했을까. 탐욕이란 탐욕은 다 부리지만, 끝은 절대 좋지 않으리라는 저주성 메시지도 담은 건 아닐지.

프란시스코 고야, 종교재판, 1808~1812, 목판에 유채, 46x73cm, 산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 [Google Cultural Institut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프란시스코 고야, 종교재판, 1808~1812, 목판에 유채, 46x73cm, 산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 [Google Cultural Institut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또 한편으로, 고야가 복위한 스페인 왕 페르난도 7세와 그의 측근들을 사투르누스에 포개 그렸을 수 있다. 관심을 쏟는 일이 기껏해야 말도 안 되는 종교 재판뿐인 이들을 저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투르누스는 국가, 뜯어먹히는 이는 백성이다. 고야는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를 그릴 때와 같은 시기에 <마녀의 안식일>도 작업했다. 두 그림은 같은 공간 같은 층에서 볼 수 있었다. 숫염소 형상의 존재가 겁먹은 마녀들 앞에 우뚝 솟은 장면이다. 일부 미술사가는 두 작품을 엮기도 한다. 미신으로 채운 종교 재판, 그 결과 빚어지는 마녀사냥을 저격하기 위한 연작 격이라는 해석이 나오기도 한다.

②‘같은 실수 반복’

인류에 대한 회의감?

프란시스코 고야, 곤봉 결투, 1820~1823, 캔버스에 유채 및 벽화, 125x261cm, 프라도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프란시스코 고야, 곤봉 결투, 1820~1823, 캔버스에 유채 및 벽화, 125x261cm, 프라도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그런가 하면, 고야는 인류에 대한 회의감을 갖고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를 그렸을 수 있다.

고야는 한때 계몽주의에 기대를 걸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감정이 이성보다 앞서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는 취지의 연설을 한 적도 있었다. 고야는 원래 프랑스도 완전히 나쁘게 보지만은 않았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나라였지만, 이에 앞서 계몽주의자 볼테르와 장-자크 루소의 나라이기도 했다. 그런 프랑스가 들어와 여전히 미신과 인습을 놓지 못한 조국을 개조해주리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당시 스페인에서는 프랑스를 마냥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는 기류가 있었다. 상당수는 박쥐 처신이었지만, 이 기회로 프랑스 혁명의 이념이 조국에 뿌리 내리기를 기대하는 자들 또한 분명 있었다.

고야는 전쟁 기간에도 궁정 화가로의 일을 계속 했다.

프라도 미술관에 따르면 고야는 일명 ‘침입자 왕’인 호세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프랑스 출신의 새로운 장관과 관리 중 일부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다(이 때문에 고야는 지금도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게 이상을 품고 진심을 다했건만, 계몽의 나라가 한다는 짓이 학살이었다. 이들은 마을을 분풀이하듯 초토화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민을 벽에 세우곤 망설임 없이 총알을 박았다. 도운답시고 온 일부 영국군도 약탈을 자행했고, 조국의 게릴라군 또한 몇몇 집단에서는 분열의 모습을 보였다. 말 그대로 무간지옥이었다.

프란시스코 고야, 아스모데아, 1820~1823, 캔버스에 유채 및 벽화, 127x263cm, 프라도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프란시스코 고야, 아스모데아, 1820~1823, 캔버스에 유채 및 벽화, 127x263cm, 프라도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계몽은 신기루였다. 고삐 풀린 인간은 욕망을 따라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지난 역사를 알고도 같은 실수를 되풀이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존재. 나아가, 아버지를 몰아낸 자기 또한 똑같이 자식에게 쫓겨나는 행태. 고야는 인류를 보고 이러한 사투르누스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이런 분석에는 그 무렵 함께 그린 또 다른 그림인 <곤봉 결투>가 묶이기도 한다. 이것 말고는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양 죽일 듯이 곤봉만을 휘두르는 두 인간. 이들 또한 분명,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③단지 개인 사정

또는 개인 취향일 뿐일까

프란시스코 고야, 마녀의 안식일, 1797~1798, 캔버스에 유채, 43x30cm, 라사로 갈디아노 미술관 [Google Cultural Institut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프란시스코 고야, 마녀의 안식일, 1797~1798, 캔버스에 유채, 43x30cm, 라사로 갈디아노 미술관 [Google Cultural Institut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다만, 미술사학자 테레사 베가의 진단처럼 이 모든 건 덩치를 키운 과잉 분석일 수 있다.

고야가 단지 개인 사정 내지 취향으로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를 그렸을 가능성도 들여다볼 만하다.

고야는 어릴 적부터 꿈이 컸다. 야망이 있고, 출세욕도 가득했다. 하위 중산층에서 수석 궁정 화가가 될 만큼 열심히 살았다. 쉽지는 않았다. 고야는 태피스트리의 밑그림을 그릴 무렵부터 이미 시기와 험담 대상에 올랐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작품 의뢰도 부담이었다. 결국 1792년, 마흔여섯 살이 된 해에는 원인 모를 열병을 앓았다. 후유증으로 청력을 거의 다 잃어야 했다. 주문 제작으로 만든 누드화 때문에 종교 재판에 휘말리기도 했다.

페르난도 7세, 호세 1세, 다시 페르난도 7세….

국왕이 계속 바뀌며 그 또한 거듭 사상 검증대에 오르기도 해야 했다.

프란시스코 고야, 마녀들의 비행, 1798, 캔버스에 유채, 43.5x30.5cm, 프라도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프란시스코 고야, 마녀들의 비행, 1798, 캔버스에 유채, 43.5x30.5cm, 프라도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고야는 1819년 무렵, 마드리드 외곽의 농가를 작업실로 두고 은둔하다시피 살았다.

이 집은 ‘청각 장애인의 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옛 소유주도, 고야도 모두 청각 장애를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그 무렵 그는 중병에 걸려 또 겨우 살아났다. 그렇게 파도치듯 살았건만, 돌아보니 남은 건 나이만 칠십에 이른 아픈 몸뚱이뿐이었다. 시간은 젊음과 열정, 희망과 분노까지 모두 집어삼켰다. 농경의 신 사투르누스는 후대에 이르러 시간의 신으로 같이 엮이기도 했다. 이는 고야는 본인이 직접 겪고 당한 시간의 잔혹성을 표현하기 위해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를 그렸다는 의견을 뒷받침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젊은 시절 고야는 대체로 로코코풍 그림을 그렸지만, 한편으로는 어둡고 습한 작품을 남기는 일 또한 망설이지 않았다.

특히나 문제의 열병을 앓은 후부터는 잔혹함과 모호함, 미스터리와 같은 장르에 더더욱 심취하는 모습이었다. 고야의 화풍은 전쟁을 겪고 하루아침 사이 뒤집힌 게 아닌 것이다. 이 또한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 창작 이유를 거시적인 철학과 전쟁 아닌, 다소 미시적인 화가 개인사로 좁힐 수 있다는 가설에 힘을 보탠다.

④애초에,

사투르누스가 맞기는 한가?

프란시스코 고야, 아리에타 박사와 함께 있는 자화상, 1820, 캔버스에 유채, 114.6x76.5cm, 미니애폴리스 미술관 [Google Cultural Institut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프란시스코 고야, 아리에타 박사와 함께 있는 자화상, 1820, 캔버스에 유채, 114.6x76.5cm, 미니애폴리스 미술관 [Google Cultural Institut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고야는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를 ‘청각 장애인의 집’에서 그렸다. <마녀의 안식일>도, <곤봉 결투>도 그곳에서 작업했다. 세 점을 포함해 14점 이상의 그림을 그 집에서 만들었다. 하나같이 어둡고 암울한 주제를 다뤘다고 해 <검은 그림들(Black Paintings)>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림은 원래 모두 벽화였다. 1층과 2층 거실과 식당, 복도 등 회반죽 벽에 유화 물감으로 새긴 작품이었다.

고야는 애초 이 그림을 전시할 생각이 없었다. 관련해 어떤 글도 쓰지 않았으며, 누군가에게 이야기한 적도 거의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심지어 그는 본인이 그린 것에 제목도 짓지 않았다.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 등은 그의 사후 붙은 이름일 뿐이다. 고야가 그림 속 괴물을 사투르누스로 두고 그린 게 맞는지조차 백 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고 보면, 신화 속 사투르누스는 자식을 ‘삼킨다’. 갈가리 ‘찢어먹지는’ 않는다. 실제로 고야 학자 프레드 리히트는 사투르누스의 전통적 상징물(낫과 모래시계 등)이 없다는 이유 등으로 “(제목에는)매우 큰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

프란시스코 고야, 자기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1797년경, 종이에 붉은 분채 등, 20.2x14.7cm, 프라도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프란시스코 고야, 자기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1797년경, 종이에 붉은 분채 등, 20.2x14.7cm, 프라도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당시 고야의 친구이자 동료 화가였던 안토니오 브루가다가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라는 제목을 짓는 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브루가다는 고야가 죽은 직후 그가 남긴 작품 목록을 일부 정리했던 인물이다. 전승과 약간 비껴가는 면이 있고, 관련한 도상적 특징이 없는데도 사투르누스로 추측했던 이유? 고야가 젊을 적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사투르누스(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를 봤을 가능성 등을 감안했다고 한다. 루벤스의 그림에서도 사투르누스는 자식을 뜯어먹고 있다. 물론 고야의 결과물보다는 수위가 한참 낮기는 하다(여기서 직접적인 영감을 받았는지도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런가 하면, 고야는 일명 <검은 그림들> 시리즈를 그리기 전인 1797년에도 이른바 <자기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를 그린 적이 있었다. 다만, 이 또한 후기작과 나란히 두고 보면 수위가 그렇게 높지는 않다.

미스터리,

더 미스터리해지다

고야, 시간, 1810년경 [Google Arts & Cultur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고야, 시간, 1810년경 [Google Arts & Cultur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고야는 1828년 4월16일에 사망했다. 야심찼던 만큼 굴곡 많은 여정이었다. 당시 나이는 여든둘이었다.

고야가 죽고 약 50년이 흐른 1874년 무렵. 당시 ‘청각장애인의 집’ 소유주였던 프레데리크 에밀 데를랑제 남작 주도로 <검은 그림들>을 벽에서 떼어내 캔버스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고작해야 고야의 원작을 거칠게 복제한 것”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그림은 상당한 변형을 겪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미스터리한 그림 또한 더 미스터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고야가 진정 어떤 마음으로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를 그렸는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애초 예술은 모두를 위한 하나의 정답을 추구하는 학문이 아닌 만큼 문제 될 건 없다. 오직 나에게만 보이는 정답이 있을 수 있다. 그저 느끼고, 기억하고, 상상하고, 한 번씩 뒤돌아 곱씹어보는 것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예술은 그런 것이다. 그렇기에 더 매혹적인 것이다.

한편 고야는 마지막의 마지막도 그답게 섬찟했다. 때는 1919년, 고야의 유해를 마드리드 왕립 예배당으로 이장하는 시기였다. 그사이 고야의 두개골이 사라져 있었다. 스페인 영사는 이를 상부에 보고했다. 답신은 다음과 같았다.

머리가 있든 없든, 고야를 보내라.

참고 자료

Blackburn, Julia., Old Man Goya, London: Jonathan Cape

Buchholz, Elke Linda., Francisco de Goya, Cologne: Konemann

Junquera, Juan Jose., The Black Paintings of Goya, London: Scala Publishers

Symmons, Sarah., Goya: A Life in Letters, Pimlico

해골로 쌓은 피라미드…“상종 못할 짐승” 비난받은 화가의 속마음[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바실리 베레샤긴 편]

해골로 쌓은 피라미드…“상종 못할 짐승” 비난받은 화가의 속마음[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바실리 베레샤긴 편]

바실리 베레샤긴은 미화된 전쟁을 그리지 않고 그곳의 실체를 노골적으로 그렸다. 황태자 등 상류층의 비난도 받았지만, 이를 통해 전장의 참혹함을 전하고자 했다.
https://biz.heraldcorp.com/article/10921075
“늙고 못생겨서 싫어?”…노인의 막무가내 청혼, 째려보는 여인의 속마음[화담:畵談]

“늙고 못생겨서 싫어?”…노인의 막무가내 청혼, 째려보는 여인의 속마음[화담:畵談]

그림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림 속 이슈, 명화에 스민 사연, 예술에 서려 있는 인간의 고민과 욕망을 들여다봅니다. 한 점의 캔버스로 시작해, 액자 밖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https://biz.heraldcorp.com/article/10927543

yul@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