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무한 생성 시대…“질문·안목이 경쟁력”

지드래곤 홍채·AI 결합해 우주로…데이터 가드닝 실험

“韓 강점은 속도·실행력…부족한 것은 축적과 기다림”

이진준 한국과학기술원(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본인 제공]
이진준 한국과학기술원(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본인 제공]

[헤럴드경제=부애리 기자] 이진준 한국과학기술원(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는 “인공지능(AI)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산수이자 새로운 자연이 됐다”라며 “디자이너는 그 새로운 자연을 정복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꾸는 사람이 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헤럴드경제와 인터뷰에서 “누구나 몇 초 만에 높은 수준의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면 희소해지는 것은 ‘무엇을 만들 것인가’를 묻는 능력과 ‘무엇이 좋은가’를 알아보는 눈”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AI는 답을 만드는 데 탁월하지만 물을 가치가 있는 질문은 여전히 인간의 삶에서 나온다”라며 “천 장의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보다 그중 한 장이 왜 의미 있는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귀해지는 시대”라고 덧붙였다.

“이미지 자체는 더 이상 종착점 아냐”

이 교수는 AI 시대의 디자인이 시각적 결과물을 만드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생성형 AI를 통해 이미지가 무한히 만들어지는 시대에는 이미지 자체가 더 이상 디자인의 ‘종착점’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비욘드 비주얼(Beyond Visual)’은 시각 너머의 총체적 경험을 설계하는 일”이라며 “소리, 촉감, 몸의 움직임, 공간의 온도, 시간의 흐름, 그리고 그 사이의 여백까지가 디자인의 재료”라고 말했다.

경영학을 공부한 뒤 방송사 PD와 건축회사 임원을 거쳐 미술가가 된 이 교수의 이력도 ‘경계’를 넘나드는 과정이었다. 이 교수는 이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소리와 빛, 공간, 시간, 몸을 함께 설계하는 ‘총체적 경험(Total Experience)’에 주목하고 있다.

이 교수와 가수 지드래곤의 협업 작품 ‘굿모닝, 미스터 지드래곤(Good Morning, MR.G-Dragon)’ 사진. [이 교수 제공]
이 교수와 가수 지드래곤의 협업 작품 ‘굿모닝, 미스터 지드래곤(Good Morning, MR.G-Dragon)’ 사진. [이 교수 제공]

“AI 시대, 채굴자 아닌 정원사가 돼야”

이 교수의 작업 철학을 관통하는 또 다른 키워드는 ‘정원’이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 ‘데이터 가드닝(Data Gardening)’과 ‘가드네틱스(Gardenetics)’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기술을 ‘조종’하고 ‘제어’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기보다 정원처럼 가꿔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는 “정원사는 식물을 통제하지 않는다. 흙을 고르고 물을 주고 조건을 만든 뒤 기다린다”라며 “예측하지 못한 것이 자라나는 것을 오히려 반긴다”라고 말했다.

데이터도 마찬가지다. 데이터를 자원처럼 채굴해 필요한 것을 뽑아내는 데서 그치는 대신 어떤 데이터를 심고 저장할지, 어떻게 보존하고 다시 불러내 변화시킬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AI를 정답을 뽑아내는 기계로만 쓰면 우리는 채굴자가 된다”라며 “AI와 함께 무언가를 기르듯 작업하면 우리는 정원사가 된다. AI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제어가 아니라 더 좋은 정원사의 감각”이라고 강조했다.

기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 교수의 고민은 실제 작업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이 교수는 최근 가수 지드래곤과 함께한 ‘굿모닝 미스터 지드래곤’ 프로젝트에서 인간의 신체 데이터와 AI, 우주를 연결했다.

이 교수는 지드래곤의 홍채 이미지를 생성형 AI로 증강해 13m 우주 안테나에 투사했다. 여기에 에밀레종의 종소리 데이터를 사운드로 결합하고 지드래곤의 목소리와 노래 ‘홈 스위트 홈’을 실제 우주로 송출했다.

이 교수는 영국 옥스퍼드대 박사과정 당시 논문 ‘빈 정원(Empty Garden)’을 책 대신 10m 길이의 한지 두루마리 형태로 제작하기도 했다. 독자가 직접 두루마리를 펼치며 읽도록 만든 이 논문의 에디션 가운데 하나는 올해 3월 한국 현대 작가의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영국 애슈몰린박물관에 영구 소장됐다.

이 교수의 10m 길이 논문 ‘빈 정원(Empty Garden)’ 모습. [이 교수 제공]
이 교수의 10m 길이 논문 ‘빈 정원(Empty Garden)’ 모습. [이 교수 제공]

“AI 시대, 韓 강점은 속도…부족한 건 기다림”

이 교수는 한국이 AI와 예술·디자인을 결합하는 데 가진 경쟁력으로 ‘속도와 실행력’을 꼽았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 인프라와 새로운 것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대중의 감수성도 강점이라고 봤다.

이 교수는 “과학기술 중심 기관인 카이스트가 미술 전공 박사를 전임교수로 임용하고, 예술가와 과학자가 한 캠퍼스에서 위성 안테나에 작품을 투사하는 일은 다른 나라에서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라며 “융합을 ‘실험’이 아니라 ‘실행’으로 옮기는 힘이 한국의 강점”이라고 말했다.

반면 부족한 것으로는 ‘축적과 기다림’을 꼽았다. 옥스퍼드와 도쿄에서 그가 주목한 것은 기술 자체의 차이보다 오랜 시간 쌓여온 비평과 이론, 당장 성과가 나오지 않는 실험도 기다려주는 문화였다.

그는 “씨앗을 심자마자 수확량을 묻는 정원에서는 큰 나무가 자라지 못한다”라며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더 빠른 속도가 아니라 느린 것을 허용하는 제도와 안목”이라고 강조했다.


boo@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