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디자인은 도움과 즐거움 주는 디자인”

AI 시대 필요 역량은 ‘판단력·끈기·카리스마’

“손으로 무언가 만들고 작은 안식년 갖길”

디자인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이제 디자인은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AI와 데이터, 인터랙션 기술이 일상과 창작의 방식을 바꾸는 시대, 디자인은 감정과 경험, 의미를 설계하는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헤럴드디자인라운지 2026은 ‘비욘드 비주얼(Beyond Visuals)’을 주제로 그래픽·타이포그래피부터 미디어아트·건축·콘텐츠까지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들과 함께 디자인의 다음 가능성을 탐색한다. 보이는 것을 넘어 인간의 감각과 삶, 기술과 사회를 연결하는 디자인은 무엇인지 질문한다.

스테판 사그마이스터.  [Stefan Sagmeisterby ⓒ Florian Ziegler 제공]
스테판 사그마이스터. [Stefan Sagmeisterby ⓒ Florian Ziegler 제공]

[헤럴드경제=김현경 기자] “아름다움이 곧 기능이다.”

미국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이 말한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금언은 모더니즘 디자인 업계를 오랫동안 지배해 왔다. 하지만 세계적인 디자이너 스테판 사그마이스터는 ‘아름다움’을 기능에 덧붙이는 장식으로 치부하는 시선에 반기를 든다. 아름다운 대상일수록 사람들이 더 소중히 다루고, 잘 관리하고, 더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아름다움 자체가 하나의 기능’이라고 말한다.

사그마이스터는 헤럴드경제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인간의 뇌는 나쁜 소식에 먼저 반응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사자를 발견하는 것은 생존과 직결됐지만, 바나나 하나를 놓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아름다움은 그런 본능적 반응을 잠시 멈출 수 있다. 아름다운 순간들로 가득한 도시는 삶 자체를 바꾼다”고 말했다.

그가 정의하는 좋은 디자인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동시에 즐거움을 주는 디자인’이다. 디자인을 사람들의 삶에서 중요한 것들을 보여주는 언어로 사용하기 때문에 광고나 홍보 작업은 하지 않고, 직접 주제를 선택한다.

디자인의 역할이 단순히 고객의 문제 해결을 넘어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사그마이스터는 “대부분의 고객이 가진 문제는 그렇게 해결하기 어렵지 않다”며 “로마에서 만난 유럽연합(EU) 법원 변호사가 민주주의의 종말을 보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날 밤 수치를 찾아보니 1823년에는 민주주의 국가가 단 한 곳뿐이었지만, 2023년에는 약 96개국에 이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람들에게 그 간극을 보여주는 것이 디자인이 할 일”이라고 말했다.

순식간에 이미지를 생성하는 인공지능(AI)에 대해선 디자이너의 일부 작업을 대체할 수 있지만 인간의 고유한 역할까지 모두 대신할 수는 없다고 내다봤다.

사그마이스터는 “AI는 제작 업무를 대체할 것이다. 제작은 실제로 디자인업계가 판매하는 것의 대부분”이라며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능숙하게 실행하는 것이 자신의 가치라면 걱정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그는 하지만 “만들 가치가 있는 것을 선택하는 일은 AI가 결코 대체할 수 없는 디자이너만의 역할”이라고 봤다. 기계는 어떤 간단한 질문에도 답할 수 있지만, 어떤 질문이 중요한지는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스테판 사그마이스터·월시 ‘Beautification Mural’. [copyright C and Sagmeister Inc 제공]
스테판 사그마이스터·월시 ‘Beautification Mural’. [copyright C and Sagmeister Inc 제공]

AI 시대의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역량으로는 판단력, 끈기, 카리스마 등을 꼽았다. AI가 만들어낸 수백 개의 결과물 중 좋은 하나를 골라내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때까지 오랫동안 붙잡고 있는 끈기가 경쟁력이 될 것이란 조언이다.

실제로 그는 몸에 글씨를 새기거나 과일을 사용하는 등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핸드메이드 작업을 선보여 왔다.

프랑스 파리 전시에선 실제 딸기 50개를 작품에 배치했다. 딸기는 전시 동안 썩어가고, 교체해야 했다. 작품이 썩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효율성을 극대화하도록 설계된 시스템에선 절대 제안할 수 없는 일이다. 이같은 고비용과 불편함에도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 자체가 작품의 핵심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모든 작업을 작업실에서 손으로 직접 한다. 그는 “언젠가는 로봇이 이러한 작품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200년 된 원본 회화를 만들어낼 수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이어 “화면 속에 있는 모든 것은 같은 크기와 온도로 다가온다”면서도 “반면 물리적인 것에는 결과가 있다. 관람객들은 그 차이를 즉시 알아챌 수 있다”고 말한다.

사그마이스터는 “인간은 다른 사람이 수고를 들였다는 증거를 원한다”며 “결과물이 무한하고 즉각적으로 만들어지는 시대일수록, ‘노력’은 희소한 가치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속도를 강조하는 시대에 ‘쉼’을 중시하는 그의 태도는 신선하게 다가온다. 7년마다 1년씩 안식년을 가지며 모든 상업적 작업을 중단하고, 창의성을 충전한다.

“지금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작업은 대부분 안식년을 보내는 동안 나왔다. 안식년은 단순히 휴가가 아니라, 작업이 탄생하는 시간”이라고 했다.

일상생활에서도 오전에는 이메일을 열어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요구가 아니라 자신의 작업을 위한 시간을 갖는다.

작업을 할 때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항상 대여섯 개 정도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한다. 한 작업에서 막히면 다른 작업으로 옮겨가고, 형편없는 버전도 많이 만들어 보면서 마음에 드는 것을 남긴다.

사그마이스터는 디자인의 사회적 역할에도 주목한다. 그는 “많은 나라에서 흡연율이 절반으로 줄어든 데에는 충격적인 사진을 보여주는 채찍과, 돈과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는 약속을 제시하는 당근이 모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며 “미디어는 끊임없이 채찍을 보여주지만, 당근을 보여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따라서 디자인의 역할 중 하나는 사람들이 실제로 살고 싶어 하는 미래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라고 했다.

스테판 사그마이스터가 디자인한 도서 ‘Live the Art’.  [copyright C and Sagmeister Inc 제공]
스테판 사그마이스터가 디자인한 도서 ‘Live the Art’. [copyright C and Sagmeister Inc 제공]

‘헤럴드디자인라운지 2026’의 기조연설자로 참여하는 그는 올해 주제인 ‘비욘드 비주얼(Beyond Visuals)’에 대해 ‘비주얼 아래에 있는 데이터’라고 정의했다.

“파리 전시는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그 뒤에 있는 숫자가 틀렸다면 그 아름다움은 거짓이 된다. 때문에 시각적인 것 너머에 있는 것은 그것이 진실인가 아닌가이다.”

사그마이스터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AI 도구를 사용하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각 언어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선 계속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만의 언어는 무언가를 직접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자신이 진정으로 흥미롭다고 느끼는 것들을 기록해 두라”며 “AI는 의견이 없기 때문에 당신이 질문하면 평균적인 답만 내놓을 뿐”이라고 말했다.

사그마이스터는 미래를 고민하는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존 스튜어트 밀은 모두가 희망을 이야기할 때 절망을 말하는 사람이 오히려 현자로 여겨진다고 짚었다. 디자인 업계에서는 그런 비관적 태도가 높이 평가되곤 한다. 하지만 거기에 휩쓸릴 필요는 없다”고 당부했다.

“대신 지금 작은 안식년을 가져 보세요. 일주일에 하루만큼은 어떤 상업적 작업도 하지 않고, 당신이 정말로 관심 있는 주제에 온전히 시간을 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