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탄핵과 다른 반도체 시장
주가·실적 흔들리는 삼성…‘비빌 언덕’ 없다
트럼프 출범에 중국까지 혼조세
“한국, 반도체 시장서 벤치 신세 우려”
[헤럴드경제=김민지 기자]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 가결로 국내 정치 불확실성은 일단락 됐으나, 경제에 미칠 부정적 영향은 과거 탄핵 보다 더욱 클 것이라는 경고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특히, 국가 경제의 기둥 역할을 하던 반도체 산업의 위상이 예전같지 않다. 다른 주요국들이 각종 정책적 지원을 쏟아내며 공급망 재편에 열을 올리는 상황에서 한국 반도체의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선 정부와 여야가 함께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016년 탄핵 땐 반도체 슈퍼사이클…삼성 주가 41% 오르기도
지난 15일 한국은행은 ‘비상계엄 이후 금융·경제 영향 평가 및 대응방향’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하고, 과거 두 차례의 탄핵 사태와 이번 탄핵 사태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대외 여건을 꼽았다. 2004년에는 중국의 고성장, 2016년에는 반도체 경기 호조 등이 성장세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년 1월 트럼프 정부 2기 출범 등 통상환경의 불확실성 증대, 반도체를 포함한 주력산업의 글로벌 경쟁 심화 등으로 대외 여건이 악화된 상황이다.
특히, 국가 경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반도체 산업의 여건 변화가 크다. 2016년 12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는 메모리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이제 막 시작되는 시기였다. PC, 스마트폰에 탑재되는 D램 가격이 급등하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이 크게 올랐다.
삼성전자는 2016년 4분기 반도체 사업에서 4조9500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2017년에는 연간 35조2000억원에 달하는 영업이익을 냈다. 전체 영업이익 53조6500억원 중 65% 이상이 반도체에서 나온 셈이다. SK하이닉스도 2017년 영업이익률이 전년 대비 319% 증가했다. 전년대비 주가 상승률 역시 삼성전자는 41%, SK하이닉스는 67%를 기록했다.
이러한 반도체 호황은 설비투자와 수출 증가로 이어졌다. 2016년 4분기와 2017년 1분기 설비투자 증가율(전 분기 대비)은 각각 5.6%, 6%에 달했다. 2017년 9월~11월 한국의 반도체 수출액은 3개월 연속 역대 최고 수준인 90억달러를 넘어섰다.
탄핵 정국으로 인한 민간 소비 부진을 반도체 호황 효과가 상쇄하며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오히려 상승했다. 2016년 3분기 0.4%(전 분기 대비)였던 GDP 증가율은 4분기 0.8%, 2017년 1분기 1.1%로 늘었다.
트럼프·중국 추격에 전력투구 해도 모자랄 판인데…“반도체특별법부터 우선”
그러나 이번 탄핵에서는 반도체 시장 상황이 다르다. AI 시대의 도래로 D램 시장의 가격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고, 삼성전자의 반도체 경쟁력도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미국 주도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과 중국의 추격도 K-반도체의 위상을 위협하는 요소다.
삼성전자는 3분기 반도체 부문에서 3조 8600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올해 연간 누적 영업이익은 18조원대로 예상된다. 주가 역시 연초 대비 30% 가량 하락하며 힘을 펴지 못하고 있다.
당장 트럼프 정부 2기 출범을 앞두고 변수가 많다. 바이든 정부가 운영하던 반도체지원법(이하 칩스법)의 직접 보조금과 세제 혜택 등이 축소될 수 있다. 여전히 1430원대의 고환율이 이어지는 가운데, 계획했던 미국 투자에 대한 재검토가 불가피하다. 트럼프 정부는 보조금이 아닌 관세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자국 내 반도체 생산시설 투자를 늘리겠다는 방침이다. 산업부와 외교부에서 트럼프 취임 전부터 사전 스킨십을 적극적으로 하며 대응 해야 하는데, 탄핵 정국에선 쉽지 않을 거란 우려가 많다.
폴 공 루거센터 선임연구원은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트럼프가 당장 취임 첫날부터 관세를 때린다고 하면 나라마다 협상팀을 워싱턴에 보내서 어떻게든 관세를 낮추려고 할 것인데, 미국 상무부나 미무역대표부(USTR)가 한국 산업부 사람들을 먼저 만나려고 하겠나”라며 “번호표 받고 줄 서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호주와 일본 같은 주변국은 (새 미국 정부를 겨냥해) 열심히 뛸 텐데 한국은 그냥 벤치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게 치명적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은 메모리와 파운드리 두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을 바짝 쫓아오고 있다. 중국 메모리 업체 CXMT의 D램 생산능력은 올 2분기에 16만장(글로벌 점유율 10%)으로 증가했다. 세계 D램 시장 4위에 올랐다. 내년 말까지 월간 D램 생산 능력을 웨이퍼 30만장 수준으로 늘린다는 방침이다. 세계 3위 D램 업체인 미국 마이크론의 월간 생산능력의 85%에 이르는 수준이어서, 일각에서는 2026년 CXMT가 마이크론을 제치고 3위에 오를 거란 관측도 나온다. 중국 파운드리 업체 SMIC도 3분기 시장 점유율 6%를 기록, 삼성과의 격차를 3.3%포인트로 좁히며 시장 3위에 올라섰다.
반도체 업계 전문가들은 글로벌 경쟁에서 K-반도체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가장 힘을 합쳐야할 시기에 주류에서 소외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업계 관계자는 “기업과 정부가 함께 전력투구해도 모자랄 시기에 현재 한국 정부의 상황으로 벤치 신세에 처하게 된 것”이라며 “업계에서는 정말 ‘이러다 큰일 난다’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위기감이 높다”고 강조했다.
재계에서는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 여야 간 이견이 없는 무쟁점 법안의 조속한 처리를 강력히 촉구하고 나섰다.
반도체 기업 직접 보조금 지급 근거 마련 및 반도체 관련 연구개발(R&D) 종사자의 주 52시간 근무제 적용 예외(화이트칼라 이그젬션) 등을 포함한 반도체특별법이 대표적이다. 현재 한국의 반도체 관련 인센티브 규모는 세액공제를 포함해도 1조 2000억원 수준이다. 이는 일본의 10분의 1, 미국의 5분의 1 수준에 그친다. 이에 여야는 지난달 산자위에서 반도체특별법을 두고 협상을 벌였지만, 야당이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에 반대하면서 정기국회 마지막 날인 지난 10일 본회의에도 상정되지 못했다.
반도체 기업에 대한 투자세액공제율을 현재보다 5%포인트 높이고 국가전략기술 투자세액공제 대상에 연구개발(R&D) 시설 투자를 포함하는 방안도 논의됐지만, 12.3 비상계엄 사태로 여야와 기재부가 면밀히 논의하지 못하면서 결국 내년도 세법 개정안에 담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