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집회에 新 ‘집회 플리’로 K-팝 등장
소녀시대·싸이 등 2010년대 가요 인기
“정치적 메시지 없어도 광장에서 의미 확장”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이 노래를 아십니까.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 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지난 9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 제1소위원회에에서 정청래 위원장은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언급, 가사를 읊다 목이 메인듯 잠시 말을 멈췄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 계엄 선포 이후 이어지고 있는 집회 현장의 이끌고 있는 곡이다.
지금 대한민국 곳곳에선 ‘다시 만난 세계’를 비롯한 K-팝이 2024년 버전의 ‘집회 플리(플레이리스트)’로 떠올랐다. 앞서 지난 7일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는 서울 여의도 국회 앞 범국민촛불집회에선 20곡 안팎의 K-팝이 등장, 신(新) 민중가요로 이름을 올렸다. 이후 유튜브를 비롯한 각종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집회 참가를 위한 ‘예습곡 리스트’로 회자되고 있다.
이른바 ‘집회 플리’를 내놓은 주인공은 김지호(52)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 연대사업국장. 범국민촛불집회 현장을 총괄하는 김 국장은 “미리 준비했던 것은 아니고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나오게 된 리스트였다”고 헤럴드경제에 귀띔했다.
앞서 지난 7일 집회 현장은 탄핵 표결의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분노와 참담함이 뒤섞인 상황이었다. 김 국장은 당시를 떠올리며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행진을 나가는데 집회에 처음 온듯한 20대 여성들이 굉장히 많이 눈에 띄었다. 응원봉을 든 이들이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무대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면서 ‘질 것 같진 않다’는 희망이 생겼다”며 “그 분들에게 ‘여러분이 주인공’이라며 환대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K-팝을 틀게 됐다”고 설명했다.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몰린 현장은 통신 장애로 음원을 다운로드하거나 스트리밍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김 국장은 “음향업체의 스태프가 가진 노트북의 폴더에서 음악을 찾아 즉흥으로 틀었다”며 “50대이지만 K-팝에 대해 좀 알고 있어 분위기가 좋아질 수 있을 만한 곡들로 골랐다”고 말했다.
집회에서 나온 곡들이 화제가 된 것은 기막힌 선곡 센스 덕분이다. 원곡들이 정치,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았는데도 집회 현장과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다시 만난 세계’를 비롯해 지드래곤의 ‘삐딱하게’, 싸이의 ‘챔피언’, 소녀시대의 ‘힘내’, 방탄소년단의 ‘파이어’, 샤이니의 ‘링딩동’, 에스파의 ‘슈퍼노바’, 에이식스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와 ‘웰컴 투 더 쇼’가 등장했다.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은 로제의 ‘아파트(APT.)’와 1982년 윤수일의 ‘아파트’가 연이어 등장하며 세대 통합도 시도했다. 에스파의 ‘위플래시’는 ‘윤석열 탄핵’을 외치는 구호에 활용됐고, 2NE1의 ‘내가 제일 잘 나가’는 개사 버전이 호응을 얻었다.
김 국장은 “계엄 사태 이후 우리의 일상과 행복이 파괴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며 “K-팝은 정치적 의미와 전혀 무관한 노래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덕질하는 아이돌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등으로 의미가 확장되고 있다. 그것이 광장에서의 마력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실제로 응원봉을 들고 집회에 참가하는 20대 여성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K-팝 그룹 멤버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행복한 나라에서 살게 해줄게”라고 인증하기도 한다.
특히 가장 화제가 된 곡은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다. 현재 이 곡은 국내 최대 음원 플랫폼 멜론에서 지난 3일부터 일주일간 직전 일주일(11월 26∼12월 2일)보다 청취자 수가 23%나 증가했다.
‘다시 만난 세계’는 지난 2007년 발매된 소녀시대의 데뷔곡으로, 일찌감치 ‘집회 곡’으로 자리매김했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직전 이화여대에서 열린 학내 시위에서 처음 등장했다. 당시 이화여대 학생들은 평생교육 단과대학 설립을 두고 총장 퇴진 요구를 제기하며 이 노래를 불렀다. 2020년엔 태국 반정부 시위에서도 울려퍼지며 원곡의 탄생 배경과는 무관하게 새 시대를 향한 희망 노래가 됐다.
소녀시대 뿐 아니라 2010년대 국민적 인기를 모은 싸이, 2NE1, 지드래곤 등의 히트곡도 집회 현장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다만 이 곡이 익숙하지 않은 60대 이상 집회 참가자들은 다소 생소하다는 반응이지만, 이는 도리어 ‘학습 열기’로 이어졌다. 유튜브에선 ‘탄핵 플리’, ‘집회 플리’ 영상을 통한 중장년 세대들의 사전 학습도 화제다.
특히 정청래 위원장이 ‘다시 만난 세계’ 가사를 읽다 울컥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 밈이 된 이후, 유튜브와 카카오톡에서도 ‘다시 만난 세계’의 노래 가사를 공유하는 사례도 늘었다. 60대 초반의 한 집회 참가자는 “집회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래들도 나와 미리 공부를 하고 이번 주말 집회에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집회에서도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모이다는 점을 감안해 K-팝을 비롯해 기존 민중가요와 무한궤도의 ‘그대에게’, 김수철 ‘젊은 그대’, 김연자 ‘아모르 파티’, 뮤지컬 ‘레미제라블’과 ‘영웅’의 넘버도 함께 틀었다. 중장년 세대가 ‘K-팝 집회 플리’에 소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10대들을 위한 곡도 있었다. 바로 투어스의 ‘첫 만남은 게획대로 되지 않아’다. 이 곡은 풋풋한 소년소녀의 만남을 그린 곡이나 묘하게 대통령과의 첫 만남, 집회현장과의 첫 만남이라는 상징성을 입고 ‘재기발랄한 집회 플리’ 중 하나로 꼽혔다. 김 국장은 “투어스의 팬층은 10대 청소년이 많고 이들의 생애 첫 집회라는 점에서 틀게 됐는데, 광장의 특성상 (노래의 의미가) 재해석되는 측면도 있었다”고 말했다.
‘집회 플리’가 화제가 되며 보다 다양한 의견을 모으기 위해 한예총에선 구글을 통해 ‘탄핵 플레이리스트’ 설문을 올렸다. 지난 9일부터 12일까지 불과 나흘 만에 무려 2만 명이 참여해 집회에서 듣고 싶은 곡을 자유롭게 추천했다.
김 국장은 “일방적인 집회 문화를 만들지 않고 참가자들의 집단지성이 발휘되는 통로를 만들기 위해 설문을 올렸는데, 상당한 호응을 확인했다”며 “젊은 세대는 중장년층이 소외되지 않게 기존 집회에서 넣은 민중가요를 가사 자막과 함께 틀어달라고 요청했고, 기성 세대는 MZ(밀레니얼+Z)들이 즐길 수 있는 곡들을 더 많이 틀어달라는 메시지를 남겨 세대간 배려를 확인했다”고 귀띔했다.
일각에선 K-팝을 통한 흥겨운 분위기로 탄핵 집회가 가볍게 흐르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는 “집회 참여를 유도하는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는 의견이 많다. 김 국장은 “가르치려 드는 내용 중심의 무거운 집회 보다는 쉽게 융화할 수 있는 집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긍정적이라고 판단했다”며 “ 역사적 현장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정치적 각성은 충분하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