탬퍼링 문제 엔터산업 전반으로 확대

선투자·후수익 구조의 韓 시스템 원인

표준계약서 개정·중간브로커 제재 필요

분쟁 중 타사 이적 유예기간도 있어야

“터질 게 터졌다”…연예계 탬퍼링 문제 해법은?
걸그룹 ‘피프티피프티’. [어트랙트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걸그룹 ‘피프티피프티’의 전속계약 분쟁으로 수면 위에 오른 ‘탬퍼링(전속계약기간 사전 접촉)’행위로 대중문화계가 어느 때보다 시끄럽다. 일파만파 커진 ‘피프티 사태’에 결국 정부까지 나서는 형국이지만 변화된 산업환경과 권력구조에 대한 이해 없이는 땜질처방에 불과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30일 가요계에 따르면, 국내 주요 연예제작자단체인 한국매니지먼트연합(한매연), 한국연예매니지먼트협회(연매협), 한국제작자협회 등은 최근 유인촌 대통령실 문화체육특별보좌관(문체특보)과 면담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관계자들은 “피프티피프티 사태를 비롯해 현재 엔터산업 현황과 산업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고 귀띔했다. 추후 면담은 정해지지 않았다.

지난 25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 출석한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공정성이란 잣대에 주목해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며 “상황을 면밀히 계속 검토하면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탬퍼링 문제는 걸그룹 ‘피프티피프티’뿐 아니라 보이그룹 ‘오메가엑스’까지 번지면서 특정 아이돌의 정산 문제나 전속계약 갈등이 아닌 엔터산업 전반의 문제로 확대된 상황이다.

이남경 한국매니지먼트연합 국장은 “탬퍼링 문제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지금은 연간 벌어질 일들이 한 달 안에 모두 쏟아져나올 만큼 급증했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들 역시 “언제 터져도 터질 일”이라며 “한국 대중문화산업만의 독특한 시스템 때문”이라고 말한다.

‘선(先)투자·후(後)수익’ 독특한 韓 엔터산업 시스템이 문제

우리나라의 대중문화 시스템은 미국, 일본 등 다른 나라에선 찾기 어려운 독자성이 있다. 연예인들이 에이전시계약을 하는 미국 할리우드 시스템도 아니고, 프로덕션이 모든 권한을 가지며 연예인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일본의 시스템도 아니다.

이 국장은 “한국 대중문화산업은 소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발굴해 그들에게 투자하고 이후 수익이 발생하면 투자를 회수하는 형태”라며 “연예인과 기획사가 사업자로서 대등한 입장에서 계약을 하는 구조로,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선 ‘대중문화예술인 표준전속계약서’가 달라진 산업 환경을 반영하지 못해 지금의 문제를 키웠다고 본다.

현재의 표준계약서는 산업 성장 초기였던 지난 2007년 SM과 ‘동방신기’ 멤버 사이의 전속계약 분쟁 이후 만들어졌다. 당시 표준계약서는 대중문화산업 환경을 반영해 소속 연예인을 기획사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제정됐다.

계약서는 대부분 연예인의 인권을 지키기 위한 회사의 의무 조항으로 구성돼 지난 14년간 별다른 수정 없이 사용돼왔다. 하지만 이후 K-팝과 드라마가 글로벌 시장으로 향하며 한국 대중문화산업이 팽창하자 기획사와 연예인 간 권력관계가 역전됐다. 배우와 가수가 두루 소속된 한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이전엔 마치 소속사가 ‘갑’이고 연예인이 ‘을’인 것처럼 보였으나 막대한 수익을 내며 대형 팬덤이라는 지지를 업은 연예인들이 갑의 위치로 올라선 지 오래”라고 말했다.

특히 연예인 권익보호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계약서 내용에 ‘연예인 빼가기’와 같은 행위를 막을 수 있는 기획사의 권리보호 규정이 없다.

이 국장은 “전속계약기간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연예인 빼가기’를 시도할 때 빼가는 측에서 아무런 리스크를 지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지금의 전속계약서는 이런 상황에 대한 구속력을 가질 수 있는 조항이 없어 누군가 악의적으로 빼가기를 시도해도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

“터질 게 터졌다”…연예계 탬퍼링 문제 해법은?
걸그룹 ‘피프티피프티’ 소속사 어트랙트. [연합]

사실 과거 상당수 전속계약 분쟁은 탬퍼링으로 시작됐다. 한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기획사와 연예인 간 분쟁이 시작되면 대체로 연예인이 불합리한 일을 당해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라는 대중적 인식이 컸다”며 “과거엔 연예기획사가 ‘갑’의 위치에 있다는 인식 때문에 법적 책임은 물론 윤리적인 책임을 묻기도 어려웠다”고 말했다.

분쟁 과정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정산자료 미공개’ ‘노예계약’ ‘부당한 수익배분’ 등이다. 이 국장은 “정산자료에 대한 비용과 수익의 상세한 작성 기준이 불분명한데 이 부분을 들며 계약 해지에 대한 책임과 문제를 기획사로 떠넘기는 악의적 사례도 있다”며 “그럼에도 그것이 계약을 파기할 목적의 탬퍼링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증빙하기 어려워 책임을 묻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번 ‘피프티 사태’에서도 멤버들은 정산 내용을 문제 삼아 소속사 어트랙트를 상대로 전속계약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이 사안을 심리한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50부는 피프티피프티가 지급받을 정산금이 없고, 신뢰관계를 파탄 낼 만큼 소속사가 정산 의무나 정산자료 제공 의무 위반이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바 있다.

물론 전속계약서상에 계약 파기에 대한 규제 조항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 계약 파기 원인을 제공한 쪽에서 위약금을 지급해야 한다. 가수의 경우, 전속계약 체결 2년 이상이 되면 2년간 연평균 매출액과 월평균 매출액을 구해 계약 잔여 개월 수를 곱한 금액을 위약금의 기준으로 삼는다. 피프티피프티처럼 데뷔 2년 미만 그룹은 계약 해지 소송 직전 3개월의 평균 매출에 잔여 개월 수를 곱한다.

업계에선 “연습생 시절부터 K-팝 그룹 한 팀을 데뷔시키기까지 30억~50억원이 들어가는데 그에 비해 위약금 규모가 크지 않아 위약금 조항이 악의적 계약 해지와 탬퍼링을 막기 어렵다”고 본다.

‘기울어진 운동장’ 계약서 개편·브로커 제재 필요

대중문화산업이 커지며 탬퍼링 시도는 나날이 늘고 있다. 업계에서도 산업이 불러오는 수익과 경제 가치가 커진 만큼 탬퍼링 문제는 더 빈번해질 것으로 본다.

한매연을 비롯한 세 단체는 “가장 시급한 것은 ‘기울어진 운동장’ 형태의 전속계약서 전면 개편”이라고 강조한다. 달라진 산업 환경을 반영해 기획사는 물론 소속 연예인의 책임과 의무 역시 계약서에 함께 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와 함께 연예인과 투자자를 알선하는 ‘중간 브로커’, 즉 탬퍼링을 시도하는 세력들에 대한 관리도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다. 소속사 어트랙트는 앞서 용역업체인 더기버스가 자사 승인 없이 소속 그룹인 피프티피프티의 바이아웃 건을 진행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더기버스를 이번 탬퍼링 문제를 일으킨 ‘중간브로커’로 지목됐다.

더기버스는 이에 대해 ‘레이블 딜(자금이나 인프라가 부족한 중소회사를 글로벌 직배사 산하 레이블로 두는 운영방식)’이었다고 반박했다. 업계에선 그러나 “피프티피프티의 사례처럼 중간에서 알선하는 사람들이 과연 이런 시도를 할 만한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문제 의식과 이런 시도를 관리할 수 있는 허들을 만들어야 한다”고 봤다.

“터질 게 터졌다”…연예계 탬퍼링 문제 해법은?
보이그룹 ‘오메가엑스’. [연합]

마지막으로 전속계약 분쟁을 겪은 연예인이 다른 기획사와 계약을 맺기 전 ‘의무적 유예기간’을 갖는 방안도 해법으로 제기된다. 이 같은 제재가 선(先)투자·후(後)수익 구조의 연예산업에서 기획사의 ‘하이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재 ‘탬퍼링 사태’는 정부에서도 예의주시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표준계약서 개정 여부와 대중문화산업 전반을 검토하겠다는 계획이다. 현재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도 대중문화산업 실태조사를 진행 중이며, 표준계약서 문제 역시 들여다볼 예정이다.

곪을 대로 곪아버린 현재의 시스템을 바로잡기 위해선 여러 대책과 함께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 국장은 “한국의 독특한 대중문화 시스템은 한류의 성취와 함께 성공적인 모델이었다는 점이 확인되고 있다”면서도 “해외에선 우리 시스템을 벤치마킹하고 있지만 정작 내부에서 곪아 있는 부분들을 보면 이전의 성취가 거품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사람을 상대하는 산업 특수성과 한국만의 여건을 반영해 기본적인 시스템부터 차근차근 다져 우리나라에 맞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