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흑백 화면에 점 몇 개가 전부였다. 기하학적인 모형에 색상이 입혀졌고 움직임이 생겼다. 캐릭터가 등장했고, 자연스러운 동작이 가능해지면서 스토리가 만들어졌다. 이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1995)로 발전했다.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픽사’의 공동 창업자인 앨비 레이 스미스(72)가 10일 그랜드하얏트서울에서 열린 ‘헤럴드디자인포럼2015’의 연사로 나섰다. 그는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꿈꾸게 한 원동력으로 ‘무어의 법칙’(컴퓨터 성능이 18개월 마다 배로 증가한다는 것)을 꼽으며, 오늘날에도 이 법칙이 유효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1960년 대만 해도 휴대전화의 존재는 상상할 수 없었죠. 지금과 같은 컴퓨터 혁명이 가능했던 건 ‘무어의 법칙’ 덕분이예요. 컴퓨터의 발전이 어느 순간 멈출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2065년엔 10억 배 빨라질 거예요. 감이 잘 안 오죠? 그 10억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10억을 벌 수 있겠죠.”

1970년대 초, 스미스와 동업자 애드 캣멀은 컴퓨터그래픽 프로그램을 만드는 공학자였다. 동시에 영화, 더 나아가 캐릭터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어하는 아티스트이기도 했다. 물론 당시만 해도 컴퓨터그래픽과 영화의 조합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은 루카스필름에 몸 담으며, 파라마운트 사의 작품을 수주할 기회를 얻었다. 곧이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을 통해 할리우드에서 제작 중인 영화의 특수효과 작업에 대부분 참여했다. 여기서 안주할 수도 있었지만, 이들은 캐릭터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잊지 않았다.

그러던 중 루카스필름의 재정 상태가 위태로워졌다. 40여 명에 달하는 컴퓨터그래픽 팀이 해체될 위기에 놓였다. 스미스와 캣멀은 창업을 해보자는 생각에 이르렀고, 관련 서적을 사모았다. 이들은 실리콘밸리의 회사 30곳을 찾아가 30번의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번번이 거절당했다. 대기업 15곳에 전략적 파트너십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 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것이 ‘스티브 잡스’였다. 잡스가 루카스필름을 인수하고 그래픽 팀에 투자하면서, 스미스는 애니메이션 제작의 꿈을 키워갈 수 있었다. 디즈니가 먼저 ‘디지털 애니메이션을 해보자’고 회사의 문을 두드리는 겹경사까지 벌어졌다. 그렇게 ‘토이 스토리’가 세상에 나왔다. 스미스는 “처음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꼬박 20년이 걸린 셈”이라고 회고했다. 스미스는 컴퓨터그래픽의 미래를 ‘디지털 인간’을 완성하는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디지털 그래픽이 브래드 피트를 대신한 것을 언급하면서, 2020년 쯤엔 완벽하게 컴퓨터로만 만든 라이브 액션 영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다만 디지털 인간이 배우를 대체할 수 있느냐엔 의문부호를 남겼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연기’라는 것은, 애니메이션도 디지털 인간도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날 앨비 레이 스미스는 질의응답 시간에 스티브 잡스와 관련된 비화를 전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그는 “스티브 잡스는 매우 어려운 사람이었다. 협상 테이블에선 상대를 완전히 겁먹게 만들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개인적으로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다”면서도 “우리를 재정적 어려움에서 구해준 아주 똑똑한 사업가인 건 분명하다. 다들 거절할 때 그가 손을 내밀어줬다”고 떠올렸다.

이혜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