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모를 찾아서’ CG 기술력의 집약체…컴퓨터의 놀라운 성장이 가능케 해 창의적인 이야기 설계도 디자인 영역…향후 성취 목표는 ‘카메라 없는 영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픽사’는 태생부터 남달랐다. 할리우드나 실리콘밸리가 아닌 뉴욕 공과대학 한 구석에서 출발했다. 설립자들은 당시 모두 ‘실패자’였다. 디즈니와 제록스에서 각각 퇴출된 존 라세터와 앨비 레이 스미스, 애니메이터의 꿈과 공학자 사이에서 방황하던 에드 캣멀까지. 또 다른 ‘실패자’ 스티브 잡스가 이들이 속한 부서를 루카스필름으로부터 헐값에 사들인 것이 픽사의 출발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기사회생한 픽사는 어느덧 세계 최고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성장했다.
픽사의 공동 창업자 중 한 명인 앨비 레이 스미스(72ㆍ사진)가 11월 10일 열리는 ‘헤럴드디자인포럼2015’에 연사로 나선다. 강연에 앞서 서면 인터뷰를 통해 그를 먼저 만났다. 1970년대 초, 그가 에드 캣멀과 함께 컴퓨터그래픽(CG)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고 나섰을 때, 업계에서조차 불신의 눈초리를 보냈다. 스미스는 컴퓨터가 비약적인 속도로 발전할 것을 내다봤고, 이로 인해 CG기술로만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믿었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먼저 컴퓨터 만으로 영화를 만드는 팀이 될 것이라는 비전이 있었어요. 당시 저한테 확실한 선견지명이 있었던 건 아니예요. 그 시기는 불확실하지만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컴퓨터가 좀 더 빠르게 가능하도록 만들었죠. 어떻게 보면 ‘무어의 법칙’(컴퓨터 성능이 18개월 마다 배로 증가한다는 것)이 내 선구안의 토대였어요.”
마침내 픽사 설립 10여년 만에 CG 기술 만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이 탄생했다. 오늘날의 픽사를 있게 한 ‘토이스토리’(1995)로, 당시 전 세계에서 3억6000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거둬들였다. 그보다 놀라운 것은 한 편의 컴퓨터 애니메이션이 불러일으킨 파장이었다. 전통적인 셀 애니메이션 외의 방식을 상상하지 못했던 업계 뿐만이 아니었다. 소프트웨어 및 게임업체들도 3D 애니메이션 기술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픽셀(pixel, 컴퓨터 화면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과 예술(art)을 조합한 사명의 ‘픽사’(pixar)는 그렇게 ‘예술’을 지향하는 할리우드도, ‘픽셀’의 고향인 실리콘밸리도 엄두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
픽사의 대표작 중 하나인 ‘니모를 찾아서’는 CG 기술력의 발전이 집약된 결과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제작진은 물고기 전문가를 초빙해 강의를 듣는가 하면, 실제 물고기를 해부해 근육과 주요 부위를 공부하기도 했다. 바다 속을 직접 관찰하기 위해 스쿠버 다이빙에도 도전했다고. 생물과 환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제작진의 집념 덕분에, 물의 질감과 빛에 따라 달라지는 심해의 풍경 등이 실사에 가깝게 표현될 수 있었다.
“컴퓨터그래픽의 목표는 인간의 눈이 자연의 것을 보고있는 것처럼 반응하는 그림을 만드는 거예요. 저는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죠. 물론 컴퓨터의 놀라운 성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니모를 찾아서’에서 수중 풍경을 표현한 픽사의 시뮬레이션은 굉장히 사실적이었죠. 심지어 배경이 전경에 위치한 캐릭터를 압도해, 캐릭터에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배경의 사실감을 덜하게 해야할 정도였어요.”
누군가는 픽사의 성공에 있어 ‘창의적인 스토리’가 절대적인 지분을 차지한다고 말한다. 분명한 건, 기술과 접목된 디자인이 스토리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는 사실이다. 스크린에 펼쳐진 세계가 믿겨져야 등장인물과 에피소드에 몰입할 수 있다. 이야기를 설계하는 것 또한 디자인의 영역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스미스와 함께 픽사의 성공 신화를 쓴 존 라세터는 이렇게 말했다. “예술은 기술을 발전시키고, 기술은 예술에 영감을 준다. 우리가 떠올리는 아이디어는 현재의 기술로는 구현이 불가능한 때가 많다. 우리는 그 아이디어를 포기하는 대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을 개발한다. 기술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고.
앨비 레이 스미스는 향후 컴퓨터그래픽 분야에서 성취해야 할 목표를 ‘카메라 없는 영화’로 꼽았다. 이 분야의 최고 난제로 꼽히는 ‘인간’을 구현하는 것이 국내 기술력으로 가능해진 상황에서 먼 얘기는 아니다. 스미스는 3D 애니메이션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던 ‘무어의 법칙’이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며, “컴퓨터와 인터넷의 지속적인 발전이 우리에게 10배, 100배, 1000배의 더 큰 힘으로 활용될 수 있다. 보물이 어디에 널려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있다”고 강조했다. 동시에 그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잠재력에 주목하면서, 해당 분야에 관심 있는 젊은 사업가들을 지원하는 일에도 시간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내 경력의 기반이 된 건 예술과 과학 둘 다예요. 과학자로 교육 받으며 컴퓨터라는 새로운 기기를 사랑했어요. 동시에 캔버스 위에 유화 물감과 아크릭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아티스트였죠. 이 두 가지를 결합한 것이 나의 원동력이었어요. 결국 내 일생에서 오직 컴퓨터 기술로만 만든 영화를 성취했어요. 그 과정에서 많은 충돌도 있었지만, 결국 우리는 목표에 도달했어요. 더 나아가 그 목표를 뛰어넘을 수 있었죠.”
이혜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