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속으로 흘러들어온다. (중략) 흘러오고 흘러가는 길 위에서 몸은 한없이 열리고, 열린 몸이 다시 몸을 이끌고 나아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은 낡은 시간의 몸이 아니고 현재의 몸이다.” (김훈, ‘자전거여행’ 중)

이미 그 곳은 뜨거운 여름이었다. 1700㎞의 자전거 여행. 개그맨 권재관은 5월 17일부터 한 달 일정으로 미국 서부를 두 발로 달렸다.

84만원 짜리 왕복 항공권을 막 결재하자, 아내(개그우먼 김경아)의 임신 소식이 날아들었다. 얼굴을 마주보고 “이거 어떡하냐”며 잠시 난감해했다. 김경아는 오히려 시원하게 남편의 여정을 허락해줬다. 지난 5~6년간 ‘개그콘서트’ 무대에서 한 번도 내려온 적 없는 남편을 위한 선물이었다.

[인터뷰] 자전거 타는 남자 권재관

“무명도 그런 무명이 없었죠. 한 기수 후배들 뒤에서 깃발 흔들고 있을 때였어요.” 2008년, 개그맨 3년차 시절 권재관은 자전거로 전국일주를 떠났다. “이 길이 내 길이 맞나 싶었어요. 일탈이었고, 도피였죠.”

“이가 갈릴 정도로 내 자신이 답답했던 시기”에 무작정 떠난 전국일주에서 권재관은 새로운 힘을 얻었다. 서울에서 횡성으로, 강릉, 울진을 거치니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언덕이 나왔다. 8월의 하늘은 궂었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니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커졌다고 한다. 언덕 위에 올라, 털썩 주저 앉았다. “다 그만두자. 개그맨도, 자전거도 여기까지만 하자.”

“문득 돌아보니 내가 온 길이 보이지 않더라고요. 서울에서 울진까지 왔으니 멀리 온 거죠. 여기까지 온 게 아까워서 다시 한 번 해보자고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자전거는 권재관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한 원동력이자, 가보지 않은 곳을 향한 도전이었다.

그 마음으로 미국 일주를 준비했다. 지난해부터 자전거여행을 구상했던 권재관은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을 먼저 찾았다. 자신보다 앞서 미국 일주를 했던 사람들에게 조언을 얻고, 필요한 물품을 하나씩 구입하기 시작했다. 자전거에 부착할 트레일러, “벽돌 만한” 휴대폰 충전 보조 배터리, 자전거용 GPS에 전투식량, 멀티공구, 타이어 펑크 방지 테이핑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2008년 스노우보드 대회에서 2등 상품으로 받은 노트북을 팔아 장만한 자전거가 이번 여행의 동반자였다.

[인터뷰] 자전거 타는 남자 권재관

첫 날은 로스엔젤레스 한인타운부터 시작해 라스베이거스까지 달리는 일정이었다. 400여㎞, 5일간의 고생스러운 여정이었다.

“첫 날 제일 고생했어요. 미국 지도는 우리나라의 것과 비율이 달라요. 지도를 펼쳐보니 뒷동산 만한 뭐가 있더라고요. 사실 태백산맥보다 크고 높은 산이었죠. 몇 시간을 달렸는데 끝이 보이지 않더라고요. 산 속 깊이 들어가니 휴대폰도 터지지 않고요.” 가까스로 찾은 캠핑장에 짐을 풀던 그 날 밤, 발자국 소리 같은 바람소리에 흠칫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아무리 패달을 밟아도 끝나지 않는 모래사막이 이어지는 네바다에 접어드니 기온은 40도까지 올랐다. 이 곳에선 “사진을 찍어도 의미가 없었다”고 한다. “맨 똑같은 풍경이에요.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죠.” 땀이 나지 않는 건조한 더위에 탈수증세가 오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그랜드캐년’을 마주하고선 눈으로 보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고 감탄한다. “모두가 카메라를 들고 있지만, 결국 내려놓을 수 밖에 없는”, 자연의 위대함이었다. 그 어떤 뛰어난 사진작가라도 눈으로 마주한 장관을 담아내진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권재관은 이번 여행 당시 LG전자에서 협찬받은 휴대폰 G4를 통해 그랜드캐년을 소장하게 됐다.

[인터뷰] 자전거 타는 남자 권재관

한 달간의 미국 일주를 통해 권재관은 ‘사람’이라는 귀한 선물을 얻었다. 자전거 일주 중 만난 한인들, 초등학교 시절 친구의 지인들, 페이스북으로 인연을 맺어 현지에서 만난 사진작가는 권재관이 지칠 때마다 힘을 준 사람들이다.

마스크를 쓴 채 지친 몸을 이끌며 자전거를 타는 데도 “권재관씨!”라는 반가운 한국어가 들렸다. 미국 일주 계획을 페이스북에 미리 알리자 태평양 건너의 나라에서도 끈끈한 정이 이어졌다. 어린시절의 친구는 워싱턴에 살면서도 LA에 도착할 권재관에게 ‘친한 동생’ 두 명을 소개시켜줬다. 인연의 힘은 대단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인데, 권재관과 연락이 되지 않던 일주 첫 날밤엔 행여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 4시간 동안 산속을 찾아헤맸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길에 만난 한인들이 건넨 주먹밥과 가래떡은 “비는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는데, 이미 더위와 무릎 통증에 지쳤고, 음식도 먹지 못했던” 권재관에겐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다.

권재관은 “다녀오면 편안하게 일을 할 줄 알았는데 한국에서의 일들은 그랜드캐년보다 더 높은 산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하는 일이 워낙에 많다. 문화 커뮤니티 KT&G 상상유니브를 통해 대학생들에게 자전거 타는 요령과 법규를 알려주며, 주1회 함께 자전거를 탄다. 메르스로 취소됐던 각종 행사들이 물 밀듯 쏟아진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도 이어진다. 꿈이 없는 청춘들에게 권재관은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인터넷으로 보고 들은 걸로 인생을 좌지우지 하지 말고, 한 번 찔러라도 보라”고 말한다. “나이 오십이 돼 나한테 후회하는 짓은 하지 말자”는 생각에 뒤늦게 개그맨 시험을 본 권재관이 무명의 시간을 자전거로 이겨내며 배운 것이기도 하다.

이제 본업으로 돌아갈 때다. 데뷔 10년 만에 권재관은 MC(부산 MBC ‘바다야 놀자 시즌3’)에 발탁돼 첫 방송을 앞두고 있다. 8월이면 ‘개그콘서트’에 새 코너도 올려야 한다. “가벼운 개그를 좋아하지 않아” ‘10년후’처럼 “감동과 눈물도 기쁨이 될 수 있는, 기승전결을 갖춘 개그”를 생각하고 있다. 오랜 무명을 거쳐, 얽히고 설켜 힘들게 왔어도 “놓을 수 없는 행복한 고민”이라고 한다.

“십년 후요? ‘개그콘서트’의 무대에 제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네요. 궁금하긴 해요. 제일 좋은 건 약방의 감초 같은 캐릭터로 남고 싶어요. 그게 첫 번째 꿈이죠.”

빠른 시일 내의 또 다른 꿈도 있다. 당연히 달리는 꿈이다. 이번엔 알래스카 자전거 여행이다. “궁금해서요. 추운나라는 어떨까요?”

고승희 기자/shee@heraldcorp.com

사진=윤병찬 기자/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