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서구 중심 밖 미술사 조명
여성·비유럽 작품 주목…주류시각 벗어나진 못해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들어가려면 여성은 나체여야 하나요?’
1985년 미국 뉴욕에서 만들어진 단체 ‘게릴라 걸스’는 이런 문구가 적힌 포스터를 거리 곳곳에 붙였다. 포스터에는 남성의 시선으로 그려진 작품인 장 도미니크 앵그르의 누드화 ‘그랑 오달리스크’ 패러디물도 담겼다. 이윽고 익명의 미국 여성 미술가로 구성된 이 단체는 눈길을 끄는 통계를 제시했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근대 예술가 중 여성은 5% 미만인데, 전시된 나체의 85%가 여성이라는 것. 오늘날에도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품의 10%만이 여성 예술가의 작품이다.
영국의 미술평론가 샬럿 멀린스는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중동, 아시아를 넘나들며 예술의 역사를 돌아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신간 ‘예술의 역사’에 실린 40가지 이야기는 예술의 거대한 물줄기 속에서 그동안 잊히거나 간과된 작은 물줄기를 주목해 다룬다.
이 책 역시 서구 중심의 시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는 한계를 보인다. 다만 저자는 지금껏 우리의 지식 체계에 자리매김하지 못한 광범위한 예술의 역사에 귀 기울인다. 이러한 시도는 여성 예술가들의 활약상과 아프리카의 공예품이 가진 미학적 가치 등을 통해 예술사를 다각적으로 이해하는 위대한 밑거름이다. 예술을 새롭게 바라보는 완벽한 전환점은 아닐지라도 이같은 시선 끝에 한국 미술이 다다를 수 있기를 소망하게 되는 이유다.
아카데미가 주도한 유럽 예술은 여성을 배제했다. 실물을 보고 그리는 소묘화 수업에는 여성들의 참여가 금지됐다. 작업실을 만들 수도 없었다. 왕과 왕비를 그리거나 수녀원 미술학교를 운영한 여성 예술가들이 간혹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예외 사항일 뿐이었다. 그러나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와 라비니아 폰타나에 이르러서는 달라졌다. 저자는 “그들은 성서의 장면, 여성 나체 같은 전통적으로 남성이 그린 주제를 맡아 다른 시각에서 보여준다”며 “여성 화가도 남성과 동등하게 동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음을 증명했다”고 설명한다.
근현대로 접어들면서 사회적 편견과 인종차별에 맞서고 페미니즘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여성 예술가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협업 단체를 만들고, 잡지를 발행하고,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저자는 이들이 비디오와 행위예술 같은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 눈을 돌렸다고 설명한다. 이런 매체는 회화나 조각과 달리 남성 지배의 역사가 길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브루스 나우먼 같은 예술가들은 1960년대 후반부터 비디오 작품 실험에 나섰다. 캐롤리 슈니먼, 애나 멘디에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등은 행위예술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기도 했다.
저자는 “이 모든 예술가의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지만, 그 근저는 오래된 사회 가치에 관한 질문”이라며 “점점 더 많은 현대 미술가가 사회 변화를 위해 예술을 사용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21세기에 들어서 예술가들은 서구적인 시각으로 제시된 역사를 뒤집는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올해 4월에 개막해 오는 11월에 막을 내리는 베니스비엔날레 주제도 ‘이방인은 어디에나 있다(Foreigners everywhere)’다.
예술의 역사/샬럿 멀린스 지음·김정연 옮김/소소의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