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세때 처음 만난 16세 문학소녀
‘문학’이란 공통분모…연인으로 발전
고단한 삶에도 아내 덕분에 안정 찾아
[헤럴드경제=신소연 기자]시대를 풍미한 예술가에겐 늘 영감을 주는 여인이 있었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은 작가 주르주 상드를 만난 후 ‘빗방울 연주곡’, ‘환상의 폴로네즈’ 등 명곡을 쏟아냈고, 초현실주의 작가 살바도르 달리는 10세 연상 갈라를 만나 그의 예술세계를 꽃피웠다.
‘풀꽃’, ‘폭포’ 등으로 유명한 자유주의 저항시인 김수영에게도 그만의 뮤즈가 있었다. 바로 아내 김현경(97)씨다. 홍기원 김수영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엄청난 국가폭력에 시달리는 고단한 삶 속에서도 시인이 예술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근원을 찾다 그의 아내인 현경씨를 재발견했다. 홍 이사장은 김현경씨의 인터뷰를 토대로 그들의 열정적인 사랑과 그에 따른 김수영의 작품 세계를 재조명하는 신간 ‘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 여인’을 내놨다.
저서에 따르면, 김수영과 김현경은 1942년 5월 22세 시인 지망생과 16세 문학소녀로 만나 ‘문학’이라는 공통 관심사로 연락을 이어가다 1948년이 돼서야 연인이 된다. 당시 김현경은 첫사랑인 배인철을 충격적인 총기 사건으로 잃은 후 상실감에 빠져 있었다. 그때 김수영은 그녀에게 “문학 하자”라며 마음의 불씨를 다시 지폈다.
사실 부잣집 딸인 현경과 가난한 집 장남인 수영은 이뤄지기 어려워 보였다. 암치질(내치핵)을 앓던 수영의 병간호를 하던 현경은 문단에 둘이 동거한다는 소문이 돌자 결국 헤어지게 된다. 하지만 서로을 잊을 수 없었던 연인은 다시 만났고, 수영이 비이런의 시 ‘My soul is dark(내 영혼은 암울해)’를 인용해 프로포즈 하면서 그들은 진짜 동거를 시작한다. 그들은 1940년대에 ‘동거 후 결혼’이라는 파격을 실천한 자유주의 커플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조선의 독립과 한국전쟁, 4·19혁명 등 시대적 풍파로 고초를 겪는다. 특히 한국전쟁은 수영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기며 시인의 정신과 육체 모두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남편이 죽은 줄만 알았던 현경도 밥벌이를 위해 다른 남자 집에 기거, 2년6개월 간 떨어져 지냈다. 서로에 대한 그리움은 결국 재결합으로 이어졌고, 이는 수영의 “가자!”라는 한 마디로 가능했다.
수영이 저항시인으로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은 13년의 ‘구수동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경과 함께 양계를 하면서 오붓하게 지낸 그 시절, 물론 여전히 주사는 심했지만 현경이 해장을 위해 살뜰히 끓여준 좁쌀 미음을 먹으며 수영은 점차 안정을 되찾았고 문학 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다. 아내의 내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하지만 행복의 순간도 잠시, 1968년 6월 동료 문인들과 술 한잔 하러 나갔던 수영은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수영이 1968년 5월 달력에 상주사심(常住死心,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라)이라 써놓았더라구요. 당시엔 그의 좌우명이라 여겼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영국 여류 소설가의 ‘Menmento Mori(죽음을 잊지 말라)’를 번역하면서 그 사자성어를 만든거죠. 수영의 학문 깊이를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 여인/홍기원 지음/어나더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