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발진 의심사고 매년 평균 26건 발생
제조사와 사고 피해 소비자 간 갈등 고조
“소비자 입증책임 완화 위한 법 제도 개선” 요구 목소리도
[헤럴드경제=서재근 기자] 자동차 급발진 의심 사고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차량 결함 입증 책임 주체 및 방법 등을 두고 완성차 업계와 소비자 간 갈등이 깊어지는 모양새다.
13일 국회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한국교통안전공단 자동차안전연구원에 접수된 2020년 이후 연도별 국내 자동차 급발진 의심 신고 건수는 2020년 25건, 2021년 39건, 2022년 15건, 2023년 24건 등 연평균 25건을 넘어섰다.
한국교통안전공단이 자동차관리법 제31조(제작 결함의 시정 등) 및 제31조의3(자동차 사고조사)에 근거해 급발진 의심으로 신고된 차량에 대한 조사를 시행하고 있지만, 아직 국내에서 급발진 원인이 차량 결함으로 밝혀진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
일부 사고 피해자들이 자체적으로 재연시험에 나서는 등 차량 결함을 증명하기 위해 적극 나서고 있지만, 완성차 업체들은 아직 차량 결함을 뚜렷하게 증명할 수 있는 사례가 없었던 데다 사고 당사자들이 자체적으로 시행하는 재연시험이 사고 당시 환경을 온전히 재현할 수 없다며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최근에는 KG 모빌리티(KGM)에서 지난 2022년 이도현(사망 당시 12세) 군이 숨진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 유가족 측이 진행한 재연시험에 관해 첫 공식입장을 발표하면서 사고 원인 입증 책임을 둘러싼 제조사와 사고 피해자 간 갈등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KGM은 지난 10일 입장자료를 통해 ▷재연시험이 운전자가 ‘모든’ 주행 구간(약 35초의 구간)에서 가속페달을 100% 밟았음을 전제로 진행됐다는 점 ▷사고 차량이 EDR(일정 크기 이상의 물리적인 충격 신호가 발생하는 경우 충돌 5초 전부터 충돌 시점까지 정보를 저장하는 사고 기록 장치) 데이터가 기록되기 이전에 다른 차량을 추돌하는 등 큰 충격이 있었다는 점 ▷실제 시속 110㎞로 주행한 구간은 오르막으로, 사고 장소와 전혀 다른 평지에 가까운 구간에서 시험(시속 110㎞에서 5초 동안 100% 가속 페달을 밟는 조건)이 이뤄졌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정확한 재연이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KGM은 유가족 측이 지난달 추가로 시행한 사적 감정에 관해서도 “법원을 통하지 않은 사적 감정은 객관성이 담보된 증거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유가족 측은 “재연시험은 ‘운전자의 페달 오조작’이라는 국과수의 분석 결과가 틀렸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 풀 액셀 시험을 한 것”이라며 “페달 오조작은 가속페달을 브레이크로 착각해 풀 액셀을 밟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재연하기 위해 사고 장소와 같은 도로에서 풀 액셀 가속시험을 한 것으로 제조사에서 억지 주장을 하면서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즉각 반박했다.
유가족 측은 이번 재연 시험결과를 차량 제조사인 KGM 상대로 약 7억6000만원 규모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판에 증거물로 제시할 예정이다.
제조사와 소비자 간 크고 작은 갈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자동차관리법, 제조물 책임법 등 관련 법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고도의 기술력이 집적된 자동차의 특성상 일반 소비자들이 급발진 의심 사고 원인이 자동차의 결함으로 인한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어려운 만큼 입증책임을 완화하기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재 이른바 ‘도현이법’(제조물 책임법 일부법률개정안)은 지난 21대 국회에서 계류를 거듭, 끝내 통과되지 못하고 폐기됐다. 21대에서 해당 법안을 대표 발의했던 허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도현이법’을 22대 국회에서 바로 재발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정부 부처에서도 제도 개선에 나서고 있다. 국토교통부에서는 ‘자동차 및 자동차부품의 성능과 기준에 관한 규칙’에 규정된 EDR에 제동 페달(브레이크)의 압력 센서값이 기록되도록 제도 개선을 추진 중이다.
현재 사고기록장치에는 제동 페달의 경우 작동 여부(ON・OFF)만 기록되고 있다. 국토부는 운전자가 제동 페달을 밟은 압력 수준(압력 센서값)까지 표시되도록 함으로써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 시 사고분석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김필수 대림대학교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급발진 의심 사고 피해자들이 실제 사고 당시 때와 똑같은 환경을 재현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비자가 아닌 제조사가 주체가 되어 차량 결함이 없다는 것을 밝히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등 일부 선진국과 같이 정부가 적극적으로 패해 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에 나서지 않는다면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급발진 의심사고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미국의 경우 디스커버리(증거개시) 제도를 통해 제조사들이 법원의 자료 제출 명령에 따르도록 해 제조사가 차량의 결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2017년부터 보행자 대상 비상자동제동장치나 페달조작 오류 급발진 억제장치를 탑재한 서포카의 구매에 최대 10만엔, 사후 장착 페달조작 오류 급발진 억제장치의 구입 및 설치에 최대 4만엔을 보조해 주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