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주소현 기자] “초딩 때 추억이 떠오른다. 여름에 이 물병에서 따라 먹었던 시원한 보리차 한잔” (네이버 블로그 두부)
집집마다 끓여 마시던 보리차, 이제는 거의 보기 힘든 풍경이다. 일부러 유리병을 구입해 보리차를 담아보기도 하지만 일종의 놀이에 가깝다. 수돗물을 그대로 먹거나 끓여 먹는 집은 4가구 중 1가구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보리차가 자취를 감춘 건 수돗물을 식수로 마시는 문화가 사라지면서다. 대부분의 가정에는 정수기가 자리 잡았고, 1인 가구의 경우 생수(먹는 샘물)를 주로 마신다. 대세로 자리 잡은 식수들은 수돗물과 비교하면 환경에 좋지 않다. 정수기를 켜 두면 전기를 쓰고, 먹는 생물는 일회용 플라스틱 쓰레기가 나온다.
환경단체들은 수돗물을 마시는 문화가 빠르게 사라진 이유로 시민들의 불신과 불안을 지목한다. 상수원이 오염되면서 수돗물을 꺼리게 됐는데, 수돗물을 안 마실수록 보호해야 할 상수원에 무관심해지고, 다시 오염되기 쉬운 악순환에 빠졌다는 진단이다.
환경부에서 7만2460가구를 대상으로 한 ‘수돗물 먹는물 실태조사’(2021년)에 따르면 물을 먹을 때 주로 이용하는 방법(단수 응답)으로 ‘수돗물에 정수기를 설치해서’(47.5%), ‘먹는 샘물을 구매해서’(27.3%), ‘수돗물을 그대로 먹거나 끓여서(보리차, 옥수수차 등 포함)’(24.3%) 순으로 나타났다.
눈에 띄는 점은 연령대에 따라 마시는 물이 크게 갈린다는 점이다. 60대 이상의 54.7%는 수돗물을 그대로 먹거나 끓여서 먹는다.
반면 오피스텔(77.0%)에 사는 1인 가구(51.2%), 20대 이하(74.0%)에서는 먹는 샘물을 사 마시는 비율이 압도적이었다. 즉, 청년 및 청소년들에게는 수돗물이 마시는 물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다는 의미다.
이는 먹는 샘물 판매가 시작된 시점과 관련 있다.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먹는 샘물을 사는 건 불법이었다. 1994년 3월 8일 대법원은 “깨끗한 물을 자신의 선택에 따라 마실 수 있는 헌법 상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이유로 먹는 샘물 판매 금지는 무효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전에 먹는 샘물은 88올림픽 때 외국인에 한해 판매가 한시적으로 허용된 바 있었다. 그러나 먹는 샘물은 불법이지만 꾸준히 수요가 있었다. 당시 낙동강 페놀 오염사건(1991년) 등 수돗물에 대한 불신이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법원의 결정에도 반발이 이어졌다. 먹는 샘물 판매 허용은 정부가 수돗물 오염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셈이라는 지적이다. 또 먹는 샘물을 사 먹을 형편이 안되는 이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다는 이유도 있었다.
먹는 샘물 판매가 허용됐지만 한동안 광고도 금지됐었다. 당시 보건사회부는 “무분별한 지하수 개발과 환경 훼손을 야기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먹는 샘물이 늘어날 때의 문제점을 판매 허용 당시에도 인지하고 있던 셈이다.
먹는 샘물 수요가 수돗물에 대한 불신과 불안을 타고 크게 성장하는 동안 식수를 둘러싼 환경오염에 변화가 생겼다. 바로 먹는 샘물을 마시면 나오는 일회용 플라스틱 쓰레기들이다.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의 ‘2023 플라스틱 배출 기업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일회용 플라스틱 쓰레기 3개 중 1개는 생수를 비롯한 음료류에서 나온다.
환경단체들은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이고 기후변화 대응이 불가피한 만큼 수돗물이 다시 식수로 지위를 되찾아야 한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는 수돗물, 즉 상수원을 잘 관리하고 보호해 신뢰를 되찾는 게 먼저다.
지난 29일 서울 중구 환경재단에서 열린 먹는물네트워크 제1차정책포럼에서 백명수 시민환경연구소장은 “1990년대 후반부터 발생한 하천(상수원) 수질오염, 수돗물 수질 위협, 그리고 시민 불신이라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들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수돗물 관련 인프라와 공정이 개선됐지만 시민들의 불신은 더 깊어져 갔다”고 덧붙였다. 수돗물을 먹는 사람들이 많아야 상수원인 강에 관심이 커지고, 또 보호할 명분이 생긴다는 이야기다.
또 다양해진 식수 중 수돗물이 선택 받아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최동진 국토환경연구원 대표는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수돗물이 유일한 식수원이 아니다”며 “이제 수돗물의 생산자나 공급자의 관점보다는 소비자인 시민들의 관점에 서야 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