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주소현 기자] 눈도 채 뜨지 못한 새끼 강아지 네 마리가 단잠에 빠져 있습니다. 이 어린 생명들의 앞날을 걱정하듯 곁을 지키는 엄마 개의 퀭한 눈이 슬퍼 보이네요.
경북 성주의 한 폐업 개 번식장 구조 당시의 모습입니다. ‘동물권행동 카라’를 비롯한 13개 동물단체들의 연대체 ‘루시의 친구들’은 지난 3월 20일과 지난 9일 두 차례에 걸쳐 이곳에서 개 284마리를 구조했습니다.
번식장이라면, 열악한 환경에서 무분별하게 강아지들을 낳는 곳을 떠올리기 쉬운데요. 최근 이 번식장들 중 자진 폐업하는 사례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른바 ‘강아지 공장’들의 마음이 돌아서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루시의 친구들에 따르면 폐업을 앞둔 경북 성주의 개 번식업자 A씨는 새끼 강아지들이 어리고 허약할수록 비싼 값을 쳐 주는 시장, 특히 이익이 ‘경매장’에 집중되는 기형적 구조 등에 문제를 느꼈다고 합니다.
가정에 입양되는 강아지들의 대부분은 ‘번식장’에서 태어나, ‘경매장’을 거쳐 ‘펫숍’에서 새 가족을 만나게 됩니다. 강아지를 낳는 번식장은 전국에 약 2000곳, 소비자들에게 강아지를 판매하는 펫숍은 약 3000곳 있는데, 경매장은 17곳뿐입니다.
즉, 강아지 불법 생산과 가격 경쟁을 부추기는 게 바로 경매장이라는 게 동물보호단체들과 업계의 이야기입니다. 경매장들이 강아지 한 마리당 11%의 수수료를 취하며 이익을 독식하니 펫숍에서의 분양가도 덩달아 올라간다는 거죠.
또 번식장에는 더 어리고 작은 강아지를 대량으로 생산하도록 유도합니다. 심지어는 경매장주가 번식업자에게 작은 크기로 개량된 품종의 개들을 비싼 값에 팔아넘기기도 합니다.
A씨가 폐업을 결정하게 된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A씨는 2016년부터 비숑 단일 품종을 키워 왔습니다. 비숑은 곱슬곱슬한 흰 털에 온순한 성격으로 인기가 많은 견종인데요. 다 성장하면 무게가 8~10㎏로 덩치가 있는 중형견입니다.
동물보호법에 따르면 2개월 미만의 새끼 강아지들의 분양은 금지돼 있습니다. A씨는 법에 따라 두달 간 잘 키운 강아지들을 경매장에 내놨지만, 경매장에는 법을 어긴 채 갓 젖을 뗀 새끼 강아지들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성장한 A씨의 강아지들은 경쟁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에, 비숑의 3분의 1 크기인 중국산 ‘미니비숑’까지 등장했습니다. A씨도 울며 겨자먹기로 미니비숑 아빠 개들을 마리 당 1000만원씩 주고 들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미니비숑 아빠 개들은 슬개골 탈구와 전립선 및 방광 이상 등 문제가 있었고 이 아빠 개들의 새끼 강아지들의 생존율도 30%에 그쳤습니다.
더 이상 번식장을 이어가기 힘들다고 판단한 A씨는 폐업을 하고 싶었지만, 이마저 쉽지 않았습니다. 대개 번식장들은 폐업 시 주변 번식장에 헐값으로 남은 개들을 넘깁니다. 애지중지 기르던 200여 마리 개들을 열악한 환경에 번식장에 팔 수 없었던 A씨는 동물보호단체들에 구조를 요청한 것이었죠.
A씨가 기르던 284마리의 개들은 13개 동물보호단체들이 나눠 구조, 새 주인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국의 2000여곳의 번식장들의 개들은 여전히 공장식 생산, 어린 나이에 생이별, 헐값 경매의 굴레에 갇혀 있습니다.
이에 지난해 11월 말 반려동물 대규모 번식과 경매, 인터넷 거래, 진열 금지 등을 골자로 한 동물보호법 개정안, 이른바 ‘한국판 루시법’이 발의됐습니다. 루시법은 6개월 미만의 강아지 분양을 금지하는 영국의 법인데요. 평생 번식만 하다 구조된 엄마 개의 이름을 따왔다고 합니다.
2개월이냐 6개월이냐가 인간의 관점에서는 대수롭지 않을 수 있지만, 인간보다 생이 짧은 개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성장기입니다.
신주운 동물권행동카라 정책팀장은 “현행 법상 2개월 이상 자란 강아지들을 판매할 수 있지만, 실은 강아지들이 어미와 형제자매 개들과 교감하고 사회화하는 중요한 시기”라고 설명합니다.
안타깝게도 한국판 루시법이 계류된 채로 21대 국회는 마무리 수순입니다. 그러나 이 법안의 발의만으로도 개 번식장과 펫숍들은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신주운 팀장은 “동물보호법 개정안 발의 이후 번식장들이 동요하고 있다”며 “펫숍의 폐업 문의도 많이 들어왔다. 펫숍들이 프랜차이즈화되는 경향도 있지만, 개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펫숍들은 정리되는 추세”라고 덧붙였습니다.
이렇듯 번식장과 펫숍들이 자진해서 줄어들고, 동물보호법 개정안이 22대 국회에서 다시 발의되고 통과된다면, 한창 엄마와 형제들과 어울려야 할 시기에 유리장에 전시되는 새끼 강아지들이 줄어들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렇다면 새 강아지 식구를 맞이하고 싶을 땐 어디를 찾아야 할까요? 동물보호단체들은 각 지방자치단체 소속의 보호소를 권합니다. 규모가 한정적인 공공 보호소의 특성 상 정해진 기한 내에 입양처를 찾지 못한 동물들은 안락사되기 때문입니다.
지난 3월 17일 루시의친구들은 충남 홍성의 한 보호소에서도 유기동물 105마리를 구조했습니다다. 이중 절반이 넘는 60마리는 반려견 시장에서 ‘환영 받는’ 1년에서 4개월령 미만의 어린 동물들이었다고 합니다.
아니면은 경매장을 통하지 않고 개나 고양이 등 반려동물을 전문적으로 키우는 소규모 생산자(브리더)를 찾는 방법도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 엄마와 형제자매들과 어울려 자랐는지 직접 확인하고 데려오는 겁니다.
신주운 팀장은 “동물을 키우고 싶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보호소나 브리더를 통한 분양이 확산되면 아기 동물 전시에 치중하는 펫숍과 경매장, 번식장들의 역할이 축소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