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보수 사화과학적으로 구분 모호
오히려 생물학 측면에선 명확히 설명
보수 편도체·진보 7R변이 자주 사용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인간은 오직 번식을 위한 ‘유전자 운반자’다.”
48년 전 리처드 도킨스가 자신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밝힌 이 주장은 과학계는 물론,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인간이 유전자를 매개하는 기계로 전락했으니, 후폭풍은 너무나 컸다. 이런 시선으로 보면, 사랑도 순수하고 고귀한 게 아니라 그저 유전자를 잘 번식시키기 위한 진화 전략이다. 아기와 유대 관계가 깊어질수록 이른바 ‘사랑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더 많이 분비되는 엄마의 상태를 보면, 사랑은 상대방을 위한 희생적 감정이 아니라 자기 만족 기제에 불과하다.
그런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어떨까. 정치적 극한 대립과 사회 부조리 등 온갖 불행의 대물림도 철저하게 이기적인 유전자가 초래한 결과라면 말이다.
유전학자인 최정균 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는 그의 신간 ‘유전자 지배 사회’를 통해 생존과 번식을 위해 작동되는 유전자가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종교까지 넘나들며 인간의 문명으로 포장돼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과시적 소비와 착취의 행태로 나타나는 자본주의 경제가 생물학적 번식 경쟁의 모습이고, 정치 성향이 보수와 진보로 나뉘는 이유도 신경전달물질에서 비롯됐으며, 심지어 창조론과 기독교 세계관을 관통하는 성서도 진화론으로 풀이된다는 것이다. “유전자의 조종이 너무나 교묘해서 인간이 이런 유전자의 작동 방식을 감지하지 못한다”고 저자는 거듭 강조한다.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는 바는 인류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나타나는 갈등의 원인이 결국 생물학적인 요인에 기인하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고 수용하라는 것은 아니다. 사회과학으로 명확히 규정하기 힘든 행동 양식을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 속뜻을 알 수 있다는 제언이다.
예컨대 보수와 진보에 대한 내재적 가치관의 구분을 설명하기란 사회과학적 측면에서 여전히 모호하다. 보수의 기본 이념은 ‘자유’로 상징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낙태나 성적 취향의 자유에 대해선 강력하게 반대한다. 진보도 마찬가지다. 진보적이라 여기는 사상적 조류에는 공산주의를 포함해 사회주의, 여성주의, 생태주의, 해방신학 등이 있는데 이들 사이에서 어떤 공통의 신조를 찾기가 어렵다.
하지만 생물학적 속성에 따라서는 설명이 가능하다. 저자가 교감신경의 중추가 되는 편도체라는 뇌 기관에 주목하는 이유다. 편도체는 생존을 위해 발달한 공포와 혐오라는 정서를 발동시키는 부위다. 연구에 따르면, 위험이 수반된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과정에서 자기공명영상(MRI)으로 실험 참가자 82명의 뇌를 살펴봤더니, 보수 성향의 이들이 편도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세로토닌의 분비를 관장하는 5-HTT의 유전자 변이 종류에 따라 편도체의 공포 반응 강도가 달리 나타났다.
그런데 도파민 수용체 중 7R이라는 변이를 지닐 경우에는 진보적인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저자는 “7R 변이는 인간의 진화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에 발생했다”며 “도파민의 활성이 항상 개체의 생존에 유리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균형 선택’(유리하거나 불리한 각 상황에 맞게 증가하거나 감소)을 받아온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세로토닌 활성이 ‘양의 선택’(개체의 생존과 번식에 유리해 자연 선택으로 인구 집단에 확산)을 받는 것과 다르다”고 짚었다.
저자는 “자연의 원리와 법칙이야말로 보수가 지키고 따르고자 하는 내재적 가치며, 이러한 신념 체계는 진화의 성공적인 산물로서 유전자 변이에 새겨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어 “진보란 진화로부터의 일탈이자 자연 체제에 대한 저항과 도전”이라고 분석한다.
한편 유전자의 관점에서 인류 문화 전반을 분석하는 그의 주장에 설령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이 나오더라도, 진화로 써 내려간 문명 연대기라는 점에서 분명 흥미롭다.
유전자 지배 사회/최정균 지음/동아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