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M 세대 진화 2년서 1년으로 단축”
SK하이닉스, 양산 앞당기며 ‘속도전’
삼성전자-SK하이닉스 12단 기싸움
뒤에는 기술 경쟁 부추기는 엔비디아
수율·가격 안정화가 최대 목적인 셈
‘칩(Chip)만사(萬事)’
마냥 어려울 것 같은 반도체에도 누구나 공감할 ‘세상만사’가 있습니다.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 주요 국가들의 전쟁터가 된 반도체 시장. 그 안의 말랑말랑한 비하인드 스토리부터 촌각을 다투는 트렌드 이슈까지, ‘칩만사’가 세상만사 전하듯 쉽게 알려드립니다.
[헤럴드경제=김민지 기자] “자기네 제품이 빨리 나올 수 있도록 우리 R&D를 빨리 서둘러 달라 이런 정도 이야기를 했습니다.”(지난달 젠슨 황 엔비디아 CEO를 만난 최태원 SK그룹 회장)
AI 메모리의 핵심 제품인 HBM(고대역폭메모리)을 둘러싼 반도체 업체들의 기술 경쟁이 속도전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현재 엔비디아에 납품되고 있는 가장 최신 HBM 제품은 5세대 제품인 HBM3E인데 벌써 차차세대, 즉 7세대 HBM4E 개발 로드맵까지 언급됐습니다. 올해뿐 아니라 내년 물량까지 거의 완판될 정도로 불티나게 팔리는 가운데 더 빠르고, 더 성능이 좋은 제품에 대한 고객사들의 요구도 거세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HBM 기술 발전은 계속 이 속도로 빠르게 진화할 수 있는 걸까요? 오늘 칩만사에서 알아보겠습니다.
“2년→1년 신제품 주기 단축”…양산 계획 ‘속도전’
13일 서울 그랜드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국제 메모리 워크숍(IMW) 2024’에서 김귀욱 SK하이닉스 HBM선행기술팀장은 “HBM 1세대가 개발된 후 4세대(HBM3) 제품까지는 2년 주기로 신제품이 개발돼왔지만, 5세대(HBM3E) 제품부터는 1년 주기로 단축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올해 HBM3E 양산이 시작되는 것을 감안하면, 6세대엔 HBM4는 내년, 7세대인 HBM4E는 내후년인 2026년에 개발에 성공할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최근 SK하이닉스는 공격적으로 HBM 개발 로드맵을 앞당기고 있습니다. 삼성전자가 본격적으로 HBM 시장을 겨냥하고 바짝 추격하고 있는 만큼, 기술 선도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단적인 예가 12단 HBM3E 양산 계획에 대한 발표입니다.
지난달 말 SK하이닉스는 올해 1분기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 “HBM3E 12단 제품은 고객 요청 일정에 맞춰서 올해 3분기에 개발을 완료하고 고객 인증을 거친 다음, 내년에 수요가 본격적으로 늘어나는 시점에 안정적으로 공급하려고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이달 초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곽노정 대표는 “HBM 시장 리더십을 확고히 하기 위해 세계 최고 성능의 HBM3E 12단 제품의 샘플을 5월에 제공하고 3분기 양산 가능하도록 준비 중”이라고 말했습니다. 단 일주일만에 양산 계획을 변경할 정도로 속도전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 간담회에서 SK하이닉스는 2025년에 HBM4를 양산한다는 로드맵을 공개했는데, 이 역시 앞서 TSMC와의 협력을 통해 2026년 HBM4를 양산하겠다고 밝힌 계획보다 앞당겨진 수치입니다. 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가 약 반년 정도 양산 목표를 당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분간 이어질 HBM 발전 속도…‘불티’ 판매에도 고객사 요구 여전
빨라진 HBM 진화 시계는 그럼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요? 업계에서는 양산이 아닌 개발만 보면 당분간 1년마다 신제품이 나올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는 HBM4까지 10나노급 5세대(1b) D램을 활용했지만, 그 이후에는 10나노급 6세대(1c) D램을 적용하는 것을 검토 중입니다. 여기에 HBM의 두께를 획기적으로 줄이면서 더 많은 D램을 적층할 수 있도록 하는 ‘하이브리드 본딩’ 공정의 적용 연구도 계속 이뤄지고 있습니다.
다만, 특정 단수 이상으로 넘어가면 난관이 예상됩니다. 김귀욱 팀장은 이날 발표에서 “고객사가 미래에 20단 이상 쌓은 제품을 요구했을 때에는 두께의 한계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공정을 모색해봐야 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HBM은 고가에 속하는 DDR5보다도 약 5배 비싼 고부가가치 메모리입니다. 그럼에도 시장에서는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습니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HBM 가격은 내년에 5~10% 오를 것으로 전망됐는데, 올해 물량은 전부 완판 됐고 내년 물량도 거의 완판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매출로 따지면 전체 D램 시장에서 HBM 비중은 지난해 8%, 올해 21%, 내년에는 30% 이상을 차지할 전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객사들의 고성능 제품에 대한 주문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HBM의 주요 고객인 엔비디아의 젠슨 황 CEO는 지난 3월 열린 연례 개발자 행사 ‘GTC 2024’에서 삼성전자가 업계 최초로 개발한 HBM3E 12단 제품에 ‘Approved(승인)’서명을 남겼습니다. 후문에 따르면 젠슨 황 CEO는 삼성 고위 경영진에게 “12단 HBM3E를 만들 수 있는 건 삼성전자 뿐”이라며 차세대 HBM 제품에 대한 주문과 함께 큰 기대를 걸고 있다는 제스처를 취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결과적으로 엔비디아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기술 경쟁을 부추기며 HBM 시장의 안정화를 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지난 달 젠슨 황 CEO를 만난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엔비디아 측에서 “자사 제품이 빨리 나올 수 있도록 (SK하이닉스의 HBM) 연구개발(R&D)을 서둘러 달라고 말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HBM은 범용 D램보다 아직 수율이 낮고, 가격도 비쌉니다. 이 때문에 양사의 기술 경쟁으로 더 높은 수율이 확보되고 물량이 안정화되는 것을 엔비디아도 바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