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주소현 기자] 도로를 뒤덮을 만큼 주렁주렁 걸렸던 선거 현수막들. 선거가 끝나면 당연히 건 사람이 치워야 한다. 후보자들이 현수막 철거를 해야 하는 게 의무다. 도의적으로도, 제도적으로도 그렇다.
그런데 현실은?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이 나선다. 심지어 선거가 끝나고도 한참 뒤까지 방치돼 있는 현수막들도 부지기수. 당선했다고, 낙선했다고 또 현수막을 걸고선 먼지가 쌓일 때까지 방치돼 있는 선거 현수막들도 적지 않다. 결국, 또 지자체 공무원들이 나선다. 이 때문에 혈세가 쓰인 사례까지 있다.
혈세를 지원받아 일회용 쓰레기를 양산하더니, 그걸 치우는 데에도 또 혈세가 쓰이는 셈이다.
강원도 A시의 B동은 지난 2022년 6월 16일 선거 현수막 철거에 일용 인부를 사역했다. 제8대 지방선거가 끝난 지 보름이 넘었는데도 떼지 않은 현수막이 많았던 탓이다.
이곳뿐 아니다. 환경단체 지구를지키는배움터(지지배)의 정보공개청구에 따르면 서울과 부산, 세종, 충남, 경북, 전남 등 전국 각지에서 선거 종료 바로 다음 날부터 보름이 넘은 시점까지 관내 기초지자체와 지역 선관위 등에 선거 현수막을 철거하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현수막 설치자는 선거일 후 ‘지체 없이’ 철거하도록 돼 있다. 당선 및 낙선 인사 현수막은 선거 다음날로부터 13일 이내에 떼야 한다. 이번에 치른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지난 10일이 끝났으니, 24일 이후 혹 선거 관련 현수막을 발견했다면 불법 현수막인 셈이다.
여기에 제도의 허점이 있다. 현행 법상 지체 없이 치우지 않은 현수막은 불법으로 간주돼, 선거관리위원회나 지방자치단체가 대신 뗄 수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는 “선거 현수막은 공직선거법에 따라 선거관리위원회가 관리·감독하고 후보자가 철거해야 한다”면서도 “불법 현수막을 바로 철거할 수 있는 옥외광고물법에 따라 지자체가 바로 철거하는 경우들이 있다”고 설명했다.
보행자들의 안전을 지키고 빗발치는 민원에 대응해야 하는 만큼 선거 현수막을 ‘지체 없이’ 떼야 하는 쪽은 어쩔 수 없이 지자체인 셈이다. 게다가 지난해부터 올 초까지 옥외광고물법의 정당현수막이 대상에서 빠진 기간, 현수막이 무분별하게 거리를 점령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시민들의 피로도가 높은 시점이다.
지자체들도 어느새 선거 현수막 철거를 지자체 몫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지역 선관위에 철거 협조를 구하더라도 법 해석과 현실적인 여건 상 지자체가 철거를 주도할 수밖에 없어서다.
경기도 C시의 D구청은 2022년 6월 8일 D구선관위에 현수막 관련 공문을 보냈다. 선거를 마치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현수막이 철거되지 않은 33곳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D구청은 “현수막 설치 위치가 아주 높은 곳은 단속 장비 부족으로 자체 철거할 수 있는 여력이 없다”며 “(선관위의) 자체 철거 또는 설치자에게 철거를 요청하길 바란다”고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D지역 선관위는 후보자들에게 철거명령을 내리지도, 과태료를 부과하지도 않았다. 공직선거관리규칙 상 지체없이 현수막을 철거하지 않은 후보자에게 선관위는 철거명령을 내리고 철거기한을 지키지 않으면 과태료 100만원, 기한을 넘긴 날마다 과태료를 50만원씩 부과해야 한다.
D구청은 이번 총선 이후에는 D구선관위에 협조 요청 없이 자체적으로 현수막 철거를 마무리했다. D구청 관계자는 “선관위에 문의했더니 옥외광고물법에 따라 구청에서 처리하라고 했다”며 “민원이 들어오는 대로, 평소 불법현수막을 정비하는 현장 정비조가 수시로 철거한다”고 설명했다.
정치인들이 현수막 철거 책임을 피해갈 수 있는 이유. 현수막의 게시와 철거 등에 관한 법률이 허술하거니와 선관위의 관리감독도 소홀한 탓이라는 게 환경단체들의 지적이다. 이에 지지배는 지난해 11월 말 구·시·군 선관위의 현수막 단속 소홀에 대한 공익감사를 청구했다.
그러나 감사원은 지난 18일 감사 착수 없이 종결 처리했다. 선관위나 지자체가 현수막을 후보자 대신 철거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또 2022년 치른 지방선거와 대통령선거에서 249개 구·시·군 선관위 중 후보자 등에게 자진철거요청과 철거명령을 한 사례가 있다는 점도 들었다.
홍다경 지지배 대표는 “현수막을 ‘지체 없이’ 떼라는 문구가 모호해 현수막을 건 후보자들이 철거 책임을 빗겨가고 있다”며 “현수막 쓰레기에 대한 책임을 강화하는 방향의 공직선거법 개정을 22대 국회에 요구하겠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