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주소현 기자] “어릴 때부터 기후위기를 겪었는데, 이제 온실가스를 줄일 책임도 우리가 해야 한다구요?”
2013년 생인 김나단 학생은 이미 지구 평균 기온은 산업화 시기보다 1도 가량 높아진 때에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코로나19가 발생하면서 학교에 갈 수도, 밖에서 뛰놀지도 못했다. 마스크를 쓴 친구의 얼굴부터 익혀야 했다. 폭우로 사람들이 죽고, 식료품 가격이 오르는 걸 지켜봤다.
매일같이 다가오는 기후위기를 늦추려면 온실가스를 줄여야 한다는데, 정부의 노력은 더디기만 했다. 이런 생각에 김나단 학생은 2022년 6월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김나단 학생뿐 아니다. 2020년 3월부터 4차례에 걸쳐 255명의 시민들이 정부의 온실가스감축목표가(NDC)가 생명권과 재산권, 평등권 등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기후소송의 첫 공개 변론이 열리는 23일. 2년 새 키가 30㎝ 훌쩍 커버린 김나단 학생은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김나단 학생은 “정부는 당장 온실가스는 조금만 줄이고 나머지 모든 숫자는 우리에게 떠넘기겠다고 합니다”라며 “재판관님, 더 늦기 전에 하루라도 더 빨리 우리가 살아갈 권리를 지켜주세요”라고 말했다.
첫 헌법소원이 제기되고 약 4년 만에 공개변론이 열리면서 이날 헌법재판소 앞은 기자회견에 참석한 청구인과 대리하는 변호사, 취재진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당일 선착순으로 배부되는 방청권을 받기 위한 줄도 헌법재판소 정문 밖으로 이어졌다.
방청석 100석을 가득 채운 이들 중 상당수는 교복을 입고 있거나 앳띈 얼굴이었다. 이들은 저마다 노트북이나 수첩을 펴들고 대리인단과 헌법재판관들의 말 한마디를 놓칠세라 받아 적었다. 중간 중간 정부 측 대리인의 발언 중에는 야유하거나 실소가 터지기도 했다.
공개변론은 헌법재판소는 국민적 관심이 높은 사건들에 한해 진행된다. 그동안은 탄핵심판, 사형제도 헌법소원 등이 공개변론 대상이었다. 청구인 측과 환경단체들은 공개변론이 열린다는 점에도 의미를 부여했다.
청구인 측 공동대리인단의 윤세종 변호사는 “법정에서 기후위기의 시급성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이라며 “큰 진전이고, 판결이 다가왔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이날 공개변론을 통해 원고와 피고인 정부가 처음으로 대면했다. 2020년 3월 청소년 19명이 헌법소원을 제기한 이후로는 만 4년이 지난 뒤에야 마련된 자리다.
이어 2021년 시민기후소송(123명), 2022년 아기기후소송(62명), 2023년 탄소중립기본법소송(51명) 등 헌법소원이 추가로 제기했다. 이 4건이 병합되면서 한국 헌정사 최대 규모의 기후소송이 됐다.
아시아 최초의 기후소송이라는 점에서 전세계적인 관심도 크다. 최고법원의 전향적인 결정들이 주변 국가의 법원들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다.
유럽에서는 기후위기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온실가스 감축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결정이 잇따라 내리고 있다. 특히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2021년 독일의 기후변화법 내 2030년 온실가스 감축 내용이 충분하지 않아 온실가스 감축 부담을 미래세대로 넘기는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청구인 측 이병주 변호사는 “유럽에서 독일연방헌법재판소가 주변국 최고법원들의 판결에 영향을 줬다면 아시아에선 대한민국 헌법재판소가 그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국내법을 넘어 국제법에 영향을 줄 것”이라며 “기후위기 대응의 규범성을 강화하고 완성할 역사적인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헌법소원의 대상은 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 이후 대체된 탄소중립기본법의 시행령, 기본계획 등이다. 이 법에 따르면 우리 정부는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의 40%를 줄이기로 했다.
쟁점 중 하나는 탄소중립기본법 기본계획에 담긴 온실가스 감축 경로다. 쉽게 말하면 2030년까지 온실가스의 40%, 2050년까지 100% 줄이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해마다 온실가스를 얼만큼 줄여가느냐를 두고 청구인 측과 정부 측이 다투고 있다.
탄소중립기본법 기본계획에 따르면 2023년부터 2027년까지 5년간 누적 온실가스 감축량은 4890만t인 반면 2028년부터 2030년까지 3년 간 누적 감축량은 1억4840만t에 이른다.
돌이킬 수 없는 기후변화(티핑포인트)를 막기 위해서는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1.5도로 제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현 시점에서 추가로 배출할 수 있는 온실가스 배출량(탄소예산)은 한정돼 있는데, 이를 현재 기성세대가 소진해버린다는 게 청구인 측의 주된 주장이다.
청구인 측은 초반에 온실가스를 크게 감축하는 오목한 그래프의 경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정부 측은 기술 개발과 상용화 등으로 기후위기 대응 정책의 효과가 나타는 데 시차가 발생하므로 온실가스 감축량이 볼록한 경로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맞섰다.
정부 측 대리인 김재학 변호사는 “사실 온실가스에서 가장 많은 것이 산업과 발전 부분이고, 그중 전환 중 석탄이 60%”이라며 “석탄을 당장 줄이고, 이행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면 현재 우리의 기본권이 침해된다”고 설명했다.
청구인 측 이병주 변호사는 “기술적인 한계가 아니라 정부의 의지 문제”라며 “볼록 경로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게 아니라 이번 정부 임기 하에서 소극적으로 감축을 하고 나머지 목표 달성을 차기 정부로 넘기는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어 재판관들을 향해 “선거에 의해서 구성되고 변경되는 정부의 구조 하에서는 장기간 목표가 바뀌는 만큼 헌법재판소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기후위기 대응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 과학계의 의견도 이날 제시됐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의 2018년 보고서에 따르면 전세계 평균 기온 상승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 이하로 제한할 수 있는 확률을 67%로 봤다. 바로 지난해에 낸 보고서에 낸 보고서에는 1.5도 이상 상승을 저지할 확률이 50% 이상으로 줄어들었다.
청구인 측이 추천한 참고인 조천호 전 국립기상과학원장은 “미끄럼틀의 기울기로 줄일 수 있던 온실가스 배출량이 이제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수준에 이르렀다”며 “미래의 어린, 젊은 세대가 아니라 현재 기성세대가 1.5도 이상 온도 상승을 막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날 1차 공개변론은 약 다섯 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2차 공개변론은 다음달 21일에 열릴 예정이다. 청구인 측 공동대리인단의 윤세종 변호사는 “재판부에서 이 사건을 대단히 상세하게 검토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국제협정에 관한 다음 변론기일의 심리를 통해서 긍정적인 결론에 이를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